성경 귀절
예레미야서 20:7-9, 12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은 의로운 사람을 시험하시고,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억울한 사정을 주님께 아뢰었으니, 주님께서 그들에게 내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내가 그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아멘.
베드로전서 1:18-21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그것은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리스도를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미리 아셨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내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에게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9:57-62
그들이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또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 또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아멘.
설교문
우리는 이제 사순절 중간에 들어섰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향해서 길을 가시면서 자기와 함께 그 길을 갈 동료를 찾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이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과 마찬가지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받은 수난 이야기와 연결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의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이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두 나라로 갈라져,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가 됩니다. 북 이스라엘이 먼저 망하고, 남 유다는 이후 150년이 지나서 망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유일무이한 신으로 섬기는 여호와를 배반하면 하나님이 등을 돌립니다. 그러면 그 백성은 힘이 빠져 침략을 당하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죄입니다. 하나님은 등을 돌립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신을 만들던지, 자신들이 신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힘이 아니고 우리가 힘이다라고 오만을 떱니다. 자신의 한계를 모르기 때문에 이 힘이 자라서 독재 권력이 되고, 타락합니다. 오늘 예레미야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으니 이제 망할 것이다"라고 탄식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가 좀 먹고 있는데 왜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느냐! 내가 보기에는 평화가 없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폭력이 난무하는데 왜 이 사회가 안전하다고 하느냐! 곧 이 나라가 파멸될 텐데 왜 아무 일이 없다고 하느냐?"고 비판합니다.
예레미야에게는 이 두 가지 사실이 걱정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이전의 말씀들을 살펴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입을 빌어서 예언자적인 선포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이야기를 하며 나라가 망한다고 합니다. 이 일로 예루살렘 성전의 총 감독이며, 제사장인 바스홀과 싸움이 붙었습니다. 바스홀은 기득권 종교를 대변하는 대표자입니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비판적 기독교를 대변합니다. 바스홀이 예레미야를 불러다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뺨따귀를 때리고, 폭력을 가합니다. 그리고 손을 묶어서 변두리로 유배시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입을 빌어 선포한 대가였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선포하라고 해서 선포했는데 저에게 돌아온 분깃은 사람들의 조롱입니다. 저는 치욕 속에 살아갑니다. 모욕거리 때문에 못 살겠습니다. 하나님 저를 속이셨죠? 내가 하나님께 속았습니다". 선지자가 감히 하나님을 보고 속였다고 합니다. "내가 당신 말을 믿고 선포했더니 왜 나에게 조롱이 돌아옵니까?". 예레미야가 얼마나 통탄해 하면서 이런 이야기 했겠습니까. 성전의 주인으로부터 뺨을 맞고 폭행을 당합니다. 그것도 공개석상에서 폭행을 당합니다. 상상이 가십니까? 인간적으로 편하려면 폭력과 파멸이 있는 것을 보고 아부하거나 아니면 그냥 침묵하면 됩니다. 나 혼자 하나님 믿으면 되는데 "왜 제 입을 열어 말씀하게 하시고 저에게 조롱거리를 주십니까. 제가 왜 치욕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 저 속이셨죠". 예레미야는 아주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죠. 슬프면 슬프다고 해야죠. 배반당하면 배반당했다고 해야죠. 하나님은 다 보셨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야, 가서 전해라". 그런데 전할수록 예레미야가 받는 것은 조롱입니다. 그래도 예레미야는 조롱도 받자, 뺨따귀도 맞자. 죽이면 죽자라고 결단하고 나서 하나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다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고 서약을 했고, 몇 번이나 결심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 심장에서 당신의 말씀이 불타오르고 내 뼛속까지 들어가 있어서 제가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이렇게 호소합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거룩한 역사 속에 나오는 위대한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이런 사실이 이스라엘만, 유대 땅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온 신앙의 역사 속에, 각 나라의 역사 속에도 있었습니다.
제가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이야기 하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본회퍼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서 타락한 교회를 수습하고 새로운 신앙운동인 고백교회운동을 전개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제1차 세계대전때 해군잠수정 함장으로 봉직하고 제대한 후에 뜻한바 있어 신학을 공부하고 안수받고 교회에서 봉직하던 목사님이신데 나중에 전후 독일교회에서 총회장까지 지내셨습니다. 이름은 마틴 니묄러(Friedrich Gustav Emil Martin Niemöller) 목사님이십니다. 이분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치가 여러 사람들을 숙청했는데 제일 먼저 죽인 사람들이 공산당원입니다". 니묄러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나는 그때 침묵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니까요. 그 다음에 비판적인 사회민주당 소속 사람들을 나치가 유배시켰을 때도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사민당 당원이 아니었으니까요. 히틀러가 노동조합 사람들을 전부 잡아 죽일 때도 나는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노조원이 아니었으니까요. 유대인들을 대량 살상할 때도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나치가 나를 잡아가더군요. 그랬더니 아무도 저를 위해서 대변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그 다음은 더 이상 제가 인용을 하지 않겠습니다만 우리가 듣고싶은 속시원한 답은 성경 말씀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 "내 말을 입에 담고 선포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 그러나 용기를 가져라. 내가 세상을 이기였노라"고. 아마 이 답변을 니묄러 목사님도 감옥 속에서 고난을 당하면서 들었을 것입니다. 이분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일교회 통일을 이루고 재건하는데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만 이분이 한 이야기,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도, 사회민주당원도, 노조원도, 유대인도 아니였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내가 잡혀가보니 아무도 저를 대변하지 않더군요". 이런 알리바이가 혹시 마틴 니묄러 목사님께만 해당할가요? 정말 그럴까요? 여러분도 살아가면서 이런 비슷한 상황을 맞으며 고민하지 않으십니까?
저도 하나 고백하겠습니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제8차WCC총회(Harare/Zimbabwe)에서 특별강연자로 오셔서 그동안 WCC와 회원교회들이 흡백차별 철폐와 인권보호를 위해 엄청난 도움을 주신데 대하여 고맙다고 인사할 때 저는 속으로 이런 내적 고백을 했습니다. 흑백차별이 수많은 남아공의 흑인들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그때 저는 침묵했습니다. 제가 흑인이 아니였거든요. 물론 기도로 함께 독기는 했지만요. 최근에 송파의 한 어머니와 두 딸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삶을 포기했습니다. 저는 몰랐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찾아와도 몰랐습니다. 제가 가난해 본적이 없었거든요. 우리 사회에서 이런 사건들이 생기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해야 합니까? 나는 아니라고, 나는 관계없다고 말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말씀하려고 하는 것같읍니다. 나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배부르게 먹였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다 고해서 한 불쌍한 과부의 아들을 관에서 일으켜서 살려주었다.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었다. 하나님나라를 선포했다. 그 결과 나와 함께한 모든 사람들의 죄악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데 아무도 나를 대변해 주지 않았다. 하나님, 당신까지 나를 버리십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몇 몇 여성들이 그리고 나를 따르는 제자들이 안타깝고 너무 미안해 하기는 했지만 어느 누구도 당당히 나서서 나의 억울한 죽음을 대변해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물으시는군요. 내가 당신들을 위해서 대신 죽어주었는데 당신들이 나에게 주는 것은 무엇이요? 나는 당신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생명을 선물로 주었는데 당신이 나에게 주는 것은 무엇이요? 부활생명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기는 하나요? 아마 이러한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되묻고 싶으셨을 것이고, 예레미야는 예수를 몰랐으니 당신 자신의 상황에서 "하나님 저 좀 살려주세요. 왜 나는 당신 말을 하고 침묵하지 못한 죄로 왜 이렇게 걱정해야 합니까?"라고 항변한거죠. 하나님 말씀은 "너는 죽어야 한다. 온 백성은 살아야 한다"네요. 오늘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예수께서 스스로 이제는 자신이 나서서 사람들을 만나서 자기 제자도 만들고,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동역자를 찾을 길을 가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주님 가시는 곳 제가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여기의 "어떤 사람" 은 마태복음에 보면 서기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나라의 최고의 학식을 갖고 있는 사람, 율법교사인 사람, 중산층 이상의 사람, 권력도 있는 사람이 예수께 와서" 내가 당신을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예수님 보시기에는 한심했을 것입니다. 난 지금 죽으러 가는데 나와 같이 갈수 있느냐는 속뜻으로 대꾸합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인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예수는 집이 없어서 말구유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비참한 사람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 말구유 간에서 태어났죠. 아무도 몰랐죠. 여관방도 없었죠. 부엌도 없었죠. 그저 말구유간, 짐승이 사는 곳에 태어나신 것이죠. 태어난 장소를 보면 예수님은 짐승의 경우와 똑같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태어나는 것도 중요합니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죽을 때 영화롭게, 보람되게, 아주 훌륭하게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장소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예루살렘 성안도 아니고 성 밖이고, 어느 집 안방도 아니고, 구석에 있는 허름한 병실도 아니고, 성 밖으로 쫓겨나서 해골이 득실거리는 "해골의 언덕"골고다에서 누워서도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죽어 갑니다. 하나님이 죽어가는 장소는 어릴 때 태어난 말구유보다 더 험악한 십자가입니다. 이 죽음은 자기 때문이 아니고 "나" 때문에, "우리" 때문입니다. 서기관아, 이 길을 따라올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 겁니다. 본문에는 물론 답은 없습니다만 그 이야기 듣고 서시관은 고민 많이 했을 것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당신들 때문에, 너 때문에 죽어야 한다.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죽을 곳도 없다"고 하시는 분께 말입니다. 죽을 장소가 없는 사람은 얼마나 비참합니까. 행불자들도 십자가에서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누구 때문에 그리고 무엇 때문에죠? 수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죽으셔서 수난입니까?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죽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 라고 무한히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작지만 수난의 진실 된 실천입니다.
또 한 사람이 찾아와 말합니다. 제가 선생님을 따라 가겠는데 아버지가 돌아 가셨습니다. 그러니 먼저 장례식을 치루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죽은 자를 장사하는 일은 죽은 자에게 맡기고 너는 당장 하나님 나라를 많은 사람들에게 선포하라고. 예수님 좀 몰상식하지 않으십니까? 자식이니까 의당 장례식을 먼저 치루고 와야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깨우치시려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불만이 있고, 흠이 있지만 모든 인간이 가장 순전하고, 가장 진실하고, 가장 아름다울 때가 있습니다. 죽음의 기로 한 가운데 놓여 있을 때 모든 인간이 진지해 집니다. 가진 것 하나도 가져 갈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합니다. 권력도 포기합니다. 심지어 가족관계도 포기해야 합니다. 그냥 떠나야 함을 알지만, 도대체 떠나서 어디 가야하나요? 사람은 사실 내일을 바라보고 죽지, 옛날 것을 바라보며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흉악한 사람도 자신의 죽음의 기로에서는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를 관심하고 떠나게 됩니다. 그분들에게는 항상 미래희망을 확고부동하게 심어 주어야 합니다. 내일을 향해서 떠나게 해야합니다. 그럴 희망속에 죽는 사람은 행복하게 죽어갑니다. 예수님 말씀은 사람은 죽은 이후에 내일을 염려해서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지금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죽은 사람에게 장사를 맡겨라하는 말은 거꾸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권하는 반어적 표현입니다. 왜 행복을, 왜 구원을, 왜 기쁨을 죽은 다음에 맛보려고 하느냐. 내일의 축복을 지금 누려라. 왜 이 축복을 살았을 때는 한 참 일할 때는, 정력이 있을 때는 못 누리느냐? 사람 사는 것의 가치는 그냥 먹고 마시는 것만은 아닙니다. 차라리 적게 먹고, 기분 좋게 사는 것이 낫겠지요.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세상 나라도 훌륭하지만 이 세상 나라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가 함께동행함을 알아야 합니다. 사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사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옳게 잘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먹고 마시고 행복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으면 그것이 담순히 이 세상 나라 만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게 아니냐. 하나님 나라는 물량적 계산의 나라가 아니라 계산 할 수 없는, 가치가 높은, 그래서 상상은 할 수 있으나 실현하지 못하는 그런 나라 아니냐. 왜 그 나라를, 그 미래를 죽을 때에 와서야 고백하느냐.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를 죽은 다음이 아닌 세상사는 동안에 누려라. 죽을 병상에서 고백할 이야기가 있다면 그 이야기를 이미 살아가면서 말과 행동으로 고백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에 있읍니다. 오늘에 하나님 나라가 있지. 내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은 이곳에 있습니다. 또 하시는 말씀입니다. 죽는 다는 게 몸이 죽는 것만이 아니고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표현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무지해서 "죽은 자처럼 깨닫지 못하는 자"란 뜻이고, 그런 사람을 깨우치기 전에 먼저 급한 것은 그 분한테도 하나님 나라 기쁨을 알려라는 분부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찾아와 부탁합니다. 제가 가족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해주시지요. 예수님 말씀은 쟁기 잡고 밭을 갈다가 뒤를 돌아다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다가 행여 가족의 목소리를 뿌리치지 못하게 붙들면 어떡하느냐? 길을 가거라고 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유대사람들이 잘 들어서 압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고, 용서를 받을 때 롯과 롯의 아내가 도망갑니다. 그런데 롯이 잘못된 아내를 두어서 아내가 가다가 뒤를 돌아봅니다.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뒤 돌아보면 소금 기둥이 됩니다. 미래를 향해 가다가 과거에 집착하면 미래는 생명의 나라가 아니고 소금의 나라로 바뀝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운명과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면서 미래를 보여주마. 내 십자가는 오늘 끝나는 나라가 아니라. 내 십자가에서 내일의 부활이 잉태되고 있다. 이 나라를 먹어라. 이 나라를 마셔라. 내가 죽어서 이 나라를 주겠는데 너희는 무엇하느냐. 너희는 이 나라를 먹고 마시면 된다. 그 나라는 인간이 계산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 인간의 계산보다 조금 위에 있는 질적으로 우수한 새로운 가치가 있는 나라다"라고요. 그래서 이 나라는 질량의 세계가 아니고, 우리가 말하는 초월적 아니 내재하는 훌륭한 우리가 계산할 수 없는 위대한 가치의 세계입니다. 보람의 세계입니다. 이 나라를 차지하십시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권고하십니다. 행복은 몸으로만 누려서는 안 된다. 행복은 마음까지도 함께 누려야 한다. 구원은 몸으로만 누리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합한 인간 전체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 병에서 치유 받는 것은 몸이 낫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 정신 전체가 다 받는 치유이니라고. 사실 그것이 내일이라는 말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철학자 데카르트는 인간이 동물과 비교해볼 때 인간에게는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동물은 생각하지 못하지만 인간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합니다. 사람은 삽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i, ergo sum)고. 인간의 특징은 사고하는데 있읍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합니다다. 옳은 말입니다. 이 말은 지금도 통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하나 추가할게 있습니다. 생각하고 살면 만물의 영장입니까? 동물과 대비했을 때는 맞습니다. 우리가 오늘 수난절에 십자가에서 함께 결단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산다. 그 말 전에 "왜?" 라는 답안을 쓰셔야 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여기에 예수가 하시는 보태는 말씀들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 봐라.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내가 산다".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아름답게 산다". "나는 진실로 행복하다. 그러니까 내 생이 기쁘다". "나는 행동한다. 그러니까 내 생활이 활기차다, 역동적이다"라고 .
나는 생각한다. 나는 믿는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희망한다. 나는 행복하다. 이 말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미래의 나라의 술어라고 믿습니다. 이 나라는 옛날 나라가 아니고 지금 우리가 누릴 나라입니다. 여러분 결단 하십시오. 예수 믿어서 뭐 하고 싶으세요? 하나님 믿는 여러분 무슨 일 하고 싶으신가요? 어떻게 살고 싶으신가요?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하고 싶으십니까? 이 철학자 말처럼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똑같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채우십시오. 왜 사시죠? 생각하니까. 믿으니까. 기쁘니까. 사랑하니까. 오늘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그 십자가에는 부활의 생명이 있다. 그 부활의 생명은 죽은 다음에 받는 축복 만이 아니니라, 이 땅에서 누리는 축복으로 받아라. 생명으로 받아라. 지금 이 생명을 내가 십자가에서 준다. 부활을 받아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삽니다. 주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