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고난의 특권

2014년 3월 30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 귀절

  
이사야서 50:7-10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나와 다투겠는가! 함께 법정에 나서 보자. 나를 고소할 자가 누구냐? 나를 고발할 자가 있으면 하게 하여라.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니, 그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 하겠느냐? 그들이 모두 옷처럼 해어지고, 좀에게 먹힐 것이다. 너희 가운데 누가 주님을 경외하며, 누가 그의 종에게 순종하느냐? 어둠 속을 걷는, 빛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을 신뢰하며, 하나님께 의지하여라. 아멘. 
 
빌립보서 1:21-26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확신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와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로 가면,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 때문에 많아질 것입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12:20-26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이 몇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리 벳새다 출신 빌립에게로 가서 청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에게로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은 예수께 그 말을 전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 아멘. 
 
설교문  
 
제가 며칠 전 텔레비전을 통해 본 이야기 하나가 오랫동안 마음에 감동으로 남아있어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합니다. 이 이야기는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신생아를 돌보는 일을 하고 계시는 한 목사님의 관한 것입니다. 이 목사님이 새벽녘 어느 시간을 정해놓고 어느 누구든지 와서 신생아를 가져다 놓고 갈 수 있도록 집밖앝 벽에 보금자리 하나를 마련하고 밖에서 열수있도록 문을 만들어놓았습니다. 이렇게 맞아들인 아이들에게 직접 수유도 하면서 아이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제 가슴이 많이 미어졌습니다. 
 
우리는 성탄절과 부활절에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유아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 부모님, 조부모님 그리고 우리 모두의 기쁨이 얼마나 큽니까. 사람의 생명을 얻는 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 줄을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 그 날 텔레비전에 비쳐진 그 모습은 달랐습니다. 왜 똑같은 생명인데, 저 생명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픔을 자아내게 하나라는 죄책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날이 갈수록 우리는 고려화사회로 가고, 젊은 인구는 모자라며, 교회 어린이학교의 수도 줄고 있다며 앞으로 큰 일 났다고 난리들입니다. 그래서 그 광경을 보면서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습니까하고 자문을 해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 가운데 서로 사랑을 나누는 자유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침해받지 않는 정말 훌륭한 자유입니다. 사랑하는 자유는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습니다. 그걸 탓할 수 가 없습니다. 사랑의 결실로 아기가 태어나면 그 때부터 그 용어가 자유에서 책임으로 바뀝니다. 어린 아이 위탁의 경우는 미혼모는 자유는 본인이 누리고, 책임은 타인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아이를 돌보고 기르는 책임은 일부 보육에 봉사하는 사람만이 져야하나요? 오늘 같은 상황에서 보면 이에 대한 책임은 정부가, 우리교회가, 그리고 온 공동체가 함께 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 아이의 생명이 귀하니까요. 
 
자유과 책임 사이의 시간이 임신기간인 10달이라고 가정해봅시다. 그 동안 정성을 다해 기도하며 좋은 아이를 낳기 위해 준비하는 부부에게는 10달이 하루 같은 기쁨의 나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혼모에게는 이 기간이 천년과도 같은 힘든 날들일 것입니다. 똑같은 해산의 아픔이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으로,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이 세상에 고난이 참 많습니다. 아픔도 많습니다. 똑같은 아픔이라고 해도 그 아픔을 받아들이는, 그 아픔을 당하고 함께 고통당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아픔에 대한 인식도 달라집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생명이 태어나게 되면 그에 대한 윤리적, 사회 관습적 잣대가 아닌 다른 잣대로, 곧 생명은 생명으로, 그리고 감사로 받아 드릴 수는 없는 건가요? 우리의 인식 때문에, 우리의 윤리 때문에 사람의 생명이 무시당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듭니다. 
 
이에 대한 부분은 우리가 많이 토론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에 제가 한 마디로 답이라고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 이에 대한 책임을 부모와 함께 우리정부가, 우리교회가, 그리고 우리 공동체가 함께 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이를 통해 그 책임을 함께 지게 되면 그때까지 당사자들이 숨어서 지내는 아픔이 아니라 떳떳하게 생명을 잉태하는 사람의 기쁨으로 위로를 보낼 수는 없을까요? 우리사회가 그래야 더욱 아름다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생명은 귀중합니다. 어린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아니 의학적으로 생명체로 판단되는 순간이 이 어린이에게는 생명의 시간이고, 우리가 말하는 역사적 생명시간의 시작입니다. 이 어린이가 자라서 나이가 들면 의학적으로 뇌사판정을 받던지, 아니면 심장 박동이 멈췄다고 판정을 받는다면 그 시간이 생명시간의 마지막입니다. 생명시간의 출발에서 생명시간이 마감할 때까지 그것을 우리는 인간의 "시간의 시작과 시간의 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 시작이 있었고 또 끝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생명시간을 살아갑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순간들을 시간이라고 합니다. 집단적으로, 한 공동체가, 한 나라가, 지구가, 우주가 살아가는 그 시간을 우리는 역사라고 이름합니다. 역사의 출발이 있었고, 역사의 마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역사가 출발하기 전에도 우리의 역사가 아닌 또 다른 역사가 있었다고 믿습니다. 고고학 연구를 통해 우리는 선사시대 역사를 배웁니다. 역사 이전의 시간들, 그 시간들은 선사시대의 역사라고 하지요. 그러면 역사가 끝난 이후의 시간은 무엇이라고 하나요? 선사시대는 ‘pre-히스토리’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이후는 ‘post-히스토리’인가요? 그런데 이런 후자의 말은 못 들어 봤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죽은 다음은 ‘post-후마눔’입니다. 이 이후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경험하지 못하고, 주장하지 못하고, 연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미래의 공간으로 남겨 놓습니다. 
 
그렇데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사람이 자기 시간을 시작하기 이전에도 다른 사람의 시간이 있었고, 곧 우리의 역사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의 시간이 끝나도 다른 사람의 시간은 계속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죽었다고 세상이 망하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저의 삶만 끝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세계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 나라가 시작되기 전에도 우주를 경영하는 누군가는 있었읍니다. 그분을 역사 이전에 계신 분, 창조 이전부터 계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선재하는"(preexistence) 창조주라고 이름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그때도 계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역사가 끝나도 계속 계십니다. 우리의 역사 전에도, 후에도, 어제도 내일도 그분은 언제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역사의 공간, 시간의 공간에서도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을 성서에서는 우리의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치 않는 영원무궁한 분이시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넘어서는 그 전과 그 후의 시간을 성서에서는 시간이 아닌 영원(eternity)이라고 말합니다. 영원은 셈할 수 있는 시간, 만질 수 있는 시간의 시작과 끝을 넘어서는 시간을 영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이전에도 계셨고, 이후에도 계십니다. 어제의 하나님, 내일의 하나님이 오늘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어제도 경험하고, 내일도 경험하게 하십니다. 오늘은 어제와 내일이 만나는 시점입니다. 그냥 오늘이라고 하면서 살지 말고, 어제의 연속이고, 내일을 앞당겨 맛보는 시간으로 알고 사십시오. 어제의 하나님이 오늘의 하나님이입니다. 내일의 하나님이 오늘의 하나님입니다. 이 방식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곧 임마누엘의 핵심입니다. 항상 계시는 하나님,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오늘도 계십니다. 오늘을 오늘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살아라. 오늘은 내일까지 계속 될 그 하나님의 시간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이냐고 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시간대의 공간을 세상이라고 합니다. 영원히 사시는 그분의 공간을 천국, 하늘나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주인과 하늘나라의 주인은 같은 분이셔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이 세상에서 하늘을 품고 살아갑니다. 이 땅의 역사 속에서 영원을 삽니다. 신비스러운 삶의 역사입니다. 이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나는 창조주 하나님이고, 그대들은 피조물" 이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사람들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역사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엄마는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서 해산의 고통까지 끌어안아야 합니다. 영혼을 탄생시키는 이 땅의 역사는 기쁨의 역사만은 아닙니다. 슬픔과 고난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묻습니다. 이 고난을, 이 아픔을 어떻게 할 것이냐? 구약성서를 보면 이 아이를 임신하고, 출생시키는 어머니의 심정을 "고난의 우물에서 기쁨의 물을 기르는 자"의 심정이라고 합니다. 고난의 복판에서 희망을 들어 올리는 기쁨, 그것은 고난 가운데 희망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고난을 사는 방식입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잉태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는 해산의 고통을 당할 수 있다. 허나 해산의 고통 가운데서 생명이라는 구원의 물을 길어 올려라. 그리고 마시고, 기뻐해라고. 예수님이 당하신 수난은 쉽게 이야기 하면 인간의 죄 때문에 얼룩진 삶에 대한 심판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죽음을 향한 역사 속에서 부활의 기쁨을 물로 길어 마시라고 하십니다. 이 고난은 함께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함께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민족이 바벨론 포로 생활로 고생하는데 마치 이런 심정입니다. 사람들이 와서 제 등을 얼마나 내려치든지 아예 더 치라고 등을 가져다 대었습니다. 그래도 아픔을 참을 수 있는 것은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의 하나님이 언제 가는 하나님 나라 역사를 이 땅에 만드시려고 나와 그리고 우리와 가까운 곳에 계시다는 것을 믿기에 고난을 참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자기 고백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도 중병을 앓고 있지만 믿음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 안에 사는 분이 예수그리스도인데 이분이 제 안에 살고 있으니, 제가 죽을 때도 이분은 저와 함께 죽을 것입니다. 제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시기에 저는 오늘의 역사적 시간을 떠나서 영원한 시간에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 여러분, 제가 병들었지만 그래도 저와 같이 마주하고 있어야지 위로받겠다고 하셨다면, 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차라리 이 험난한 세상 병든 몸을 벗어나서 병이 없는 하나님의 품으로 가는 것이 훨씬 좋겠다는 마음이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일찍 죽고 싶습니다. 이 질병을 떠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병든 몸이지만 제 얼굴을 보고, 몸을 보면 위로 받으신다면서요. 그래서 제가 간구합니다. 하나님께 가고 싶은데 못 가겠습니다. 빌립보 교회 여러분, 제가 병들었지만 같이 있을 테니 위로받으시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저를 믿지 말고 생명의 주님을 가슴으로 모시고 사십시오. 우리가 살면서 사람이 귀여울 때 살덩이 때문에 그런가요? 사람을 존경하면 아픈 몸이지만 그 인격은 존경합니다. 그렇니까 존경이그 사람의 몸 때문입니까. 아니죠. 몸과 함께 있는 정신, 인격, 영, 혼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 그런 사람이 아주 훌륭한 부부에게서 태어나고, 또 미혼모 부부에게서도 태어납니다. 다만 출생의 여건이 다를 뿐입니다. 이런 해산의 고통 속에서 생명의 물을 기를 수 있는 사람이라야 정말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 할수 있읍니다.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나의 밀알과 같다. 여러분도 밀알과 같습니다. 밀알이 땅위에서 살아가면 밀알의 생명만큼 살다가 죽습니다. 밀알이 땅 속에 들어가서 썩으면 뿌리가 내리고 나무가 되어 자라서 수십 수백의 똑같은 밀알을 만들어 냅니다. 내가 이 땅에 육을 입고와서 그냥 썩지 않고 내 연륜을 다해서 살다가 죽으면 그냥 내 생명길이만큼 살다 갑니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을 위해서 땅 아래로 내려가야 되겠습니다. 가면 썩습니다. 죽습니다. 그래도 나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이처럼 참 재밌는 비유를 하십니다. 사실 땅 위에 있을 때가 생명입니다. 땅 아래로 내려가면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신을 땅 아래에 묻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이렇합니다. 땅은 하나님이 주신 우주공간, 그 공간에서 위에 있으면 생명세계고,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면 죽음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땅 위와 땅 아래와 모든 것이 하나님이 계시는 공간임으로 우리로 하여금 썩어져 뿌리를 내리게 하고, 그 속에서 나무가 되어 새로운 열매를 만들어 내게 하십니다. 
 
여러분께 부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땅에 태어났으니 혼자 살고 싶으시면 그냥 땅위에 살다가 가세요. 자신의 생명시간이 다하면 가세요. 다만 나 예수와 함께 세상을 살리거나. 하늘을 품고 살거나. 보람되고, 훌륭하게 살고 싶으면 나와 함께 땅 속으로 들어갑시다. 가서 썩읍시다. 썩고 새 생명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읍시다라고. 이것이 여러분이 믿는 예수님이 보이시려는 삶의 방식입니다. 십자가는 그냥 세상 위에서 살다가 죽지 않고, 땅 속에 들어가 사는 삶입니다. 그 속에 들어가 보니 우리는 죽은 줄 알았는데 죽음을 뚫고 죽음 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물을 길어 올립니다. 죽음이 역사에서 생명의 역사를 끌어 올립니다. 유한한 시간의 공간에서 영원의 물을 길어 올립니다. 그래서 죽음은 신비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신비입니다. 그것은 경험해야 아는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삶이 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하나만 하시면 됩니다. 고난을 고난으로 받지 말고, 고난 속에서 기쁨의 물을 길어내며 살자구요. 고난이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어떻게 고난을 당하느냐가 고난속에서 희망을 만들어 내는가가 가치의 결정기준입니다. 
 
제가 언제인가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요. "죽음이 오는 것을 알면 죽음한테 당하지 말자. 차라리 죽음을 맞아 드리자"고요. 죽음을 살자. 죽음에서 생명의 물을 길어내자. 이것이 오늘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의 최고봉이지만 그 속에서 부활 생명을 길어냅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가능한 일, 이 가능성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드립니다. 고난 자체는 축복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난당하는 자가 구난을 이기며 받을 수 있는 기쁨이 축복입니다. 고난을 어떻게 끌어안느고 사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오늘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와 함께 십자가의 고난 길로 가는 사람은 죄악과 허물을 다 털어놓고 영원한 세계에 생명을 지금 얻을 수 있느니라"고. 십자가 부활은 내세의 것 만이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는 매 순간마다, 지금 여기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 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하나님이 오늘의 역사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작은 십자가, 작은 부활, 큰 십자가, 큰 부활, 현실 세계 역사에서의 십자가와 부활, 영원한 세계에서의 십자가와 부활 , 그것들은 다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경험의 폭이 다를 뿐입니다. 오늘도 이 땅에, 이곳에 주님께서 오셔서 함께 밀알이 되어 주십니다. 부활생명을 얻게하시려고요. 이 신비한 축복이 여러분에게 크신 축복이되시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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