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 사건을 둘러싸고 여론은 갑론을박하는 양상이다. 기독교계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몇몇 목회자들이 부적절한 발언으로 설화에 휩싸이는가 하면 세월호 생존자의 생환을 기원하는 노란 리본이 혼합종교라는 이야기가 카카오톡 메시지로 유포돼 빈축을 사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고려신학대학원(고신)을 졸업하고, 현재 현재 LA선한청지기교회(KPCA 미주장신 소속) 담임인 송병주 목사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분노하고 탓할 것, 그리고 남은 자와 말없이 함께할 것을 주문했다.
저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게재한다.
‘세월’만 흘러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1. 침묵이 균형은 아니다.
국민여론이 분노로 가득하고 눈물이 가득한 상황입니다. 갑자기 늘어난 별에서 온 사람같은 발언이 넘칩니다. "침묵하고 균형을 이루라” 하지만, 필자는 이 말에 도무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침묵과 균형을 요구하는 것은 가장 '정치적인 발언'입니다.
저도 균형을 강조하는 사람입니다만, 지금 상황에서 참된 균형은 침묵이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균형은 분노하고 탓하면서 함께울고 돌보는 일입니다. 지금 필요한 균형은 분명하게 처벌하면서 따뜻하게 격려하는 일입니다. 지금 필요한 균형는 사실대로 보도하며 고발하면서 위로하고 용서하는 일입니다.
분노와 슬픔 없이 용납과 회복으로 그냥 건너 뛸 수 없습니다. 분노와 슬픔에 빠진 사람들은 함께 분노하고 슬퍼하는 주변사람들로 인해 '용납과 회복'으로 나갑니다. 분노와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미개’라는 단어를 쏟아놓고, 우는 자들에게 ‘선동질’이라는 단어만 남발한다면 용납과 회복이야 말로 침몰합니다. 같이 울고 분노해야 할 주변 사람들에게 침묵하라고 한다면 용납과 회복은 구조될 수 없습니다. 지금 필요한 균형은 침묵이 아닙니다. 분노하고 탓하면서 함께 울고 돌보는 일입니다.
2. 직업소명을 잃어버린 것은 선장만인가?
이번 사건에서 직업소명을 잃어버린 것은 과연 세월호의 선장이기만 할까요? 또 다른 선장들이 지금 탈출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준석 선장은 모두가 아는 도망간 선장일 뿐, 지금도 세월호 주변에서는 책임지지 않으려는 다른 선장들의 탈출이 가득합니다. 지금 세월호 사건에는 이미 탈출한 선장과 지금 탈출하려는 또다른 선장들로 넘치고 있습니다. 선장과 기관직 선원들이 탈출과 변명은 배안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더군요. '나면 살면 된다'는 식의 탈출과 변명은 지금 배 밖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양심선언을 하고 진상을 밝히며 잘못된 관행에 대해 고백해야 회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진상을 밝히고 양심에 순종하지 않으면 평생 그 배를 탈출하지 못합니다. 정권과 조직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세월호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니… 그것이 정권과 여러분이 속한 조직 그리고 결국 자신을 위하는 길입니다.
무엇보다 언론의 기능에 대한 고민을 나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직업소명이 아니라 '직업병'에 걸린 모습이었습니다. 언론이 만든 사각형은 실제보다 작은 것이지만, 더 진실하며 크고 깊은 것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언론은 왜곡, 과장, 거짓의 사각형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편집된 방송'도 아닌 '검열된 사실' 앞에 선 듯한 마음이었습니다. 진실을 찾는 것인지 '꺼리'를 찾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열심을 보면서 '소명'보다는 '병'이다 싶더군요. 유언비어는 과연 SNS만 책임질 일인가요?
3. 어른 놀이 그만합시다.
아이들도 전문인 어른들의 말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부모들도 전문인 어른들 말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배 안에 어른들이나 배 밖의 어른들이나 모두 '나면 살면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또다른 전문인 어른들이(목회자들을 포함해서) '어른 말 들으라’고 점잖게 훈계합니다. 알아서 할테니 경거망동 하지 말고, 비판하지 말고, 침묵하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합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말 아닙니까?
전문인이라고 사회의 어른이라고 훈수하는 듯한 ‘어른놀이'는 이제 그만했으면 합니다. 그러니까 정치인의 아들까지 그 어른놀이에 동참하는 지경이 되었군요. 배에 타지 않은 많은 또다른 많은 청소년들이 또다른 배를 타고 지금 어른들을 보고 있습니다. 이제 어른으로 하는 훈수는 좀 그만했으면 합니다. 아무리 내가 ‘진심’이라 하더라도 상대가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특별히 목회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어른 놀이 그만하십시오. “침묵하라. 기다리라"고 설교 하실려면 제발 부탁이니 차라리 “침.묵."하십시오.
4. 분노하라. 그리고 탓하라.
자꾸 침묵하라고 말합니다. 물론 필자도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 퍼나르기를 주의하라고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침묵하면 안됩니다. 분명히 분노하고 탓해야 합니다. 단지 선장 하나 죽이기로 끝날 문제가 아니죠. 20년전 서해 페리호 사건과 삼풍 백화점 때 침묵한 젊은이들이 이번에 자식을 잃었습니다. 이번에도 젊은이들이 침묵한다면 20년뒤에 그들의 자녀들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지금 부모들은 이제 손자 손녀를 위해서 분노하고 탓하셔야 합니다. 20년 뒤 오늘 이 사건을 다시 자료화면으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국민이 무서워하는 나라가 아니라 '국민을 무서워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부패와 관행의 문제는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대충 깃털 뽑고 꼬리 자르고 넘어갈 수 있게해서는 안 됩니다. 분노하고 탓해야 합니다. 공직자들은 대통령의 엄벌하겠다는 말을 두려워하지 말고, 대통령부터 국민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정권을 두려워하면 공직 기강이 무너집니다. 국민을 두려워해야 공직 기강이 바로 섭니다.
5. 남은자와 말없이 함께합시다.
이제 침묵은 남은자들을 향해야 합니다. 살아 남은 아이들 앞으로 친구 없이 살아 내어야 하는 아이들을 향해서는 침묵합시다. 카메라와 마이크는 어른들을 향해야 하고, 살아 내어야 하는 분들에게는 말없이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카메라는 남은자들에게 들이대지 말고, 그들을 남은자로 만든 이들을 향해 들이 대어야 합니다. 모든 반 친구들이 실종되고 홀로 남은 학생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가 살아내어야 할 삶을 위해서 기도하면 눈물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도록 말없이 함께해야 합니다.
죄없는 죄인 만들지 않도록, 잘해서 잘못한 일이 되지 않도록 말없이 손잡아 주는 이들이 필요합니다.그분들은 '살아남은 이들'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살아 내어야 하는 이들’ 입니다. 살아 남은 기쁨 보다도 살아 내어야 하는 무게도 만만치 않을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 구조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어야 합니다. 누가 이분들을 구조 하시겠습니까?
교회는 노란 나비 탓을 하고 있을 곳이 아닙니다. 레드콤플렉스 보다 무서운 노랑 콤플렉스를 봅니다. 노란색도 나비도 만드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셨습니다. 누군가...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예수님 그러실 겁니다. "아버지... 저도 그랬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무능해 보일 만큼 실종자 부모들과 함께 울고 계십니다.
이번 만큼은 ‘세월'만 그냥 덧없이 흘러가지 않게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