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랜드마크인 성 비투스 성당. 성 비투스 성당과 구 왕궁은 프라하 여행의 필수코스다. |
사회적 변혁기에 갈등은 불가피하다. 이런 갈등이 종교적 신념과 결합되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번진다. 30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30년 전쟁’이 바로 그런 경우다.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신교의 영향력은 확대일로에 있었고, 이에 비례해 로마 교황청의 권위는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신흥 세력인 신교와 기존 기득권 세력인 구교는 자주 알력을 드러냈고, 이런 알력이 기나긴 전쟁으로 비화된 것이다. 프라하는 30년 전쟁의 단초가 된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이 벌어진 도시다. 1618년 5월 23일 벌어진 이 사건은 당시 복잡했던 정치지형과 종교지형이 뒤엉키면서 불거졌다.
프라하를 아우르는 보헤미아 지방은 신성로마제국(이하 제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고, 제국의 황제는 보헤미아의 왕위를 겸직했다. 당시 제국의 마티아스 황제는 사촌 동생인 페르디난트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이양한다. 당시 황제는 마인츠 대주교,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보헤미아 국왕, 작센 공작, 팔츠 백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작 등 선거권을 가진 일곱 명의 제후(선제후)가 다수결로 선출했기 때문에, 마티아스가 페르디난트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먼저 내준 것은 황제 선출에 필요한 한 표를 먼저 확보하게 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였다.
▲프라하 구왕궁의 블라디슬라프 홀. 높이 13m, 폭 16m, 길이 62m로 유럽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과거엔 이곳에서 마상 경기도 벌어졌다고 한다. |
그런데 페르디난트는 골수 가톨릭 교도였다. 그래서 왕위에 오르자 신교탄압 정책을 펼쳐 신교 귀족의 관직 임용을 금지하는 한편 신교 교회를 폐쇄했다. 이런 조치는 신교측을 격분시켰고 신교 귀족 100명은 왕의 거처로 난입해 신교 탄압에 거세게 항의했다. 마침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에 가 있었고 두 명의 섭정왕이 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들은 신교 귀족들을 심하게 질책했다. 이런 행동은 가뜩이나 왕의 탄압정책에 성이 난 신교 귀족들의 감정을 더욱 격앙시켰다. 그래서 신교 귀족들은 두 섭정왕을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이어 페르디난트의 보헤미아 왕위에 대해 폐위를 선언했다.
창밖으로 내던져진 섭정왕들은 건초 더미 덕분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이들은 보복을 다짐했고 페르디난트는 반란군을 무자비하게 다뤘다. 보헤미아 왕위는 황제 선거권을 가진 선제후였기에 페르디난트는 쉽게 물러설 수 없었다. 이러자 덴마크와 스웨덴이 신교 보호를 명분으로 이 싸움에 뛰어들었다. 결국 이 같은 종교간 알력이 국가간 전면전으로 번지게 되었다.
▲구왕궁내 판사의 방. 바로 이곳에서 30년 전쟁의 발단이 됐던 창문 투척 사건이 벌어졌다. |
소박한 왕궁, 역사성은 무시 못해
프라하 구왕궁은 창문투척 사건이 벌어진 역사적인 장소다. 그러나 역사성과는 별개로 구왕궁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과연 이곳이 왕궁인가 할 정도로 소박하기만 하다. 그나마 인상적인 장소는 블라디슬라프 홀 정도다. 이 홀은 높이 13m, 폭 16m, 길이 62m에 달하는 큰 홀로 대관식 무도회와 마상 경기가 벌어졌다고 한다. 꽃모양의 천장 리브(뼈대)도 인상적이다. 홀 안쪽은 대법관의 방으로 바로 이곳에서 창문투척 사건이 벌어졌다.
▲구왕궁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프라하 시내 전경 |
홀을 빠져 나가 발코니에 이르면 프라하 시내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프라하를 관통해 흐르는 블타바 강도 선명하게 보인다. 발코니에서 감상하는 풍경은 색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그럼에도 옛 왕궁의 전체적인 인상은 아담하고 소박할 뿐이다. 볼거리를 기대했다면 다소 실망할 수 있다. 확실히 왕궁의 규모나 화려함을 감상하려면 절대왕정이 꽃피웠던 프랑스로 가야 한다.
30년 전쟁은 신교와 구교 사이의 알력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전쟁이 전개되나가면서 점차 유럽 각국의 세력게임으로 성격이 변질됐다. 결국 전쟁은 말 그대로 30년을 끌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을 맺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국제협약이다. 먼저 이 조약은 근대 국제협약의 효시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무엇보다 이 조약을 통해 유럽의 지도가 다시 그어졌다. 지금 유럽의 국경은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그어진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놓음으로써 신교 국가들은 존립기반을 확보했다.
▲프라하를 관통하는 블타바 강은 구왕궁에서 더 잘 보인다. |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은 사소한 해프닝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건의 이면엔 신교와 구교 사이의 알력이 깔려 있었다. 신교와 구교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이런 역사적 필연성이 우연일수도 있는 사건과 얽히면서 새로운 역사가 이뤄졌다. 이런 사연을 안고 블타바 강은 말없이 흐른다. (※사진= 지유석 기자, 장비지원 = 소니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