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늘 자문해야

문: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웃사랑은 최고 수준의 윤리와 다른 점이 있습니까? 

▲코스모폴리탄적 이웃사랑과 최고 수준의 윤리와의 상호 유사성과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강남순교수(미국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TCU)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우)는 "그 목표와 지향하는 세계에 대한 비전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강: 저는 그 목표와 지향하는 세계에 대한 비전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한번은 ‘일반사회운동과 기독교사회운동이 어떻게 다른가?’라는 주제로 글을 부탁받아서 쓴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에 YWCA와 같은 운동에 관여하기는 했는데, 제가 볼 때는 궁극적으로 지향하려는 정의, 평화, 평등 등의 가치는 일반 사회변혁운동이 지닌 윤리적 목적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런데 근원적인 차이점을 찾는다면 기독교는 “회개”를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회개에의 요청”은 인간이 신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는 고도의 낙관적 이해와, 동시에 철저한 죄인이라는 비관적 이해가 공존하고 있는 기독교 인간론에 근거해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는 신학적 입장에 따라 매우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겠지만, 간략하게 보면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이기성의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권력에 대한 집착과 열망을 품고 있지요.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어떤 능력을 부여받으면 그것으로 타자를 위한 일에 겸허히 쓰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열망을 지니고 있어요. 이러한 인간의 죄성, 즉 이기성과 권력에의 집착성을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입장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끊임없이 타락하며 자기 죄에 빠지는 존재이자 이기적인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그래서 예수도 회개하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기독교가 지향하려는 것이 윤리적인 가치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 나라”란 사실상, 사자와 어린 아이가 같이 뛰노는 진정한 정의와 평화의 세계에 대한 표상이지요. 즉 완전한 평화, 정의가 강물 같이 흐르는 세계, 이런 것들이 하나님 나라의 표상인데, 결국 최고의 윤리적 목표도 진정한 의미의 정의와 평등, 그리고 평화가 있는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거든요. 
문: 회개는 일종의 자기성찰인데 자기성찰이 전제가 될 때 정의나 평화나 평등을 구현할 수 있다고 보시는 군요? 하지만 여전히 종교와 윤리 사이에는 색깔의 차이가 느껴지는데요. 
강: 어제 제가 설교를 한 교회는 예배 후 설교자와 교인들과의 대화의 시간을 가지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한 교인중에 죽어서 우리가 천당 가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시더군요. 저는 예수가 ‘사후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사실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가 사용하는 언어들은 매우 은유적이에요. ‘다시 태어나라’라고 니고데모에게 말할 때도 생물학적인 사실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은유를 사용한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때 ‘하나님 = 아버지’라는 사실적 표현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메타포, 상징을 쓰는 거지요. 예수가 사용한 언어들을 보면 사실적인 표현이라기보다 상징적인 표현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상징적”인 표현을 “사실적”으로 이해해서 종교와 윤리가 다르다고 선을 그으면 종교의 울타리를 너무 좁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색깔의 차이를 느끼는 것은 둘 중 어느 한쪽의 세계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말했듯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 교회에서 너무 오용되어서 그 의미가 교리적으로 고정되어 버렸지요. ‘다시 태어남’은 탄생성(natality)과 관련 있는 말입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네이탈리티의 개념으로 ‘다시 태어남’을 새롭게 사용해요. 아렌트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어거스틴의 사랑의 개념이거든요.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나 “타자”를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존재로 보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게 탄생성입니다. 저는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그런 의미로 “다시 태어나라”는 선언을 했다고 신학적으로 해석합니다. 그것은 자신과 타자를 보는 전적으로 새로운 시각을 의미하지요. 인간을 타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하여도 다양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갖고 사는데, 이러한 타자와 자신에 대한 고정된 편견들을 끊임없이 제거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문: 종교와 윤리가 추구하는 궁극은 서로 통하는데 그것들이 굳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교리화된 관념에 매여서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군요? 
강: 그렇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늘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미국연합감리교(UMC)의 역사와 교리라는 과목을 가르쳐요. 그 과목은 미국 연합감리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기 위해 필요한 필수과목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교리”와 “역사”라는 것은, 그것들을 고정된 것으로 절대화시키자마자 스스로를 배반하게 됩니다. 역사가 변하듯이 교리도 끊임없이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해야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현재 미국의 UMC 교리는 성적 소수자들이 목사안수를 받거나 목사들이 그들의 결혼을 주례하면 안 됩니다. 한 때는 여성들에게 목사안수를 금지하는 교리가 바뀌었듯이, 미래에는 그러한 차별적 교리가 바뀌어야 하며, 바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특히 예수를 너무 교리에다 가두어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를 인간이 만든 종교적 교리안에 가두어놓으면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종교적 교리란 하나의 신앙적 지침이며, 역사적 산물이지 고정불편의 절대적 진리를 담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교리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적 조명과 개혁이 필요한 것입니다. 
미국 UMC의 교리를 가르칠 때도 저는 교리라는 것이 우리 신앙의 중요한 지침 중의 하나이지 그것 자체가 절대불변의 진리를 담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인간은 유한자이고 신은 무한자입니다. 우리가 그 신의 역사에의 개입 또는 그 신의 의지나 생각을 모두 다 파악할 수 있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우리가 신이 되겠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교리도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교리를 중요한 공동체적 작업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절대화시키지 않는 자세가 늘 필요한 것입니다.  
문: 인간 자신이 항상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존재인데 그 때문에 무언가를 절대화시키려는 속성을 갖게 된 것은 아닐까요? 인간의 역사도 변하지 않습니까? 
▲스스로의 항상성 유지를 위해 자신도 모르게 무엇인가를 절대화시키는 인간의 속성 때문에 신은 왜곡되어 인식되기 십상이다. 강 교수는 굳어진 교리가 이 같이 신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더욱 부추긴다고 주장했다. 

강: 그렇지요. 역사를 보면, 어느 교단이든지 교리가 끊임없이 변해왔어요. 또한 과거에 일어난 사건으로서의 “역사”를 보는 방식도 지속적으로 변하고 있지요. 그래서 역사나 교리를 새롭게 조명하고 성찰한다는 것은 “암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비판적 성찰을 통해서 비로소 공부할 수 있다고 봐요. 교리의 변화상을 보는 한 측면은 어떻게 기독교가 “포용의 원”을 확장해 왔는가에 대한 공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교육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지금 기존의 기독교가 이 “포용의 원”을 끊임없이 넓힐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사실 우리 기독교, 유대교가 가진 유일신 사상의 심각한 신학적 문제점 중의 하나는 그 “유일신”의 개념이 굉장히 왜곡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유일신이라는 개념이 ‘하나님이 한 분이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라는 셀 수 있는 존재로 규정하는 것, 그 자체가 무한자인 신을 유한자인 인간의 인식구조로 끌어내리는 것이거든요. 신은 하나다, 두 개다 또는 세 개다 등으로 인간의 수학적 계산방식으로 셀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일신 사상이 진정으로 의미가 살아있으려면, “하나” (one)와 “하나 이상”(many)이라는 것이 대립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만약 그 “하나”가 이 우주를 끌어안는 “무한한 하나”인 “우주적인 하나”로 이해된다면, 유일신 사상 자체가 다른 종교들을 정죄할 수 있는 신학적/신앙적 근거는 될 수가 없지요. 
문: 하나님을 산술적으로 하나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절대화시키려다 보니 하나님을 우주적인 존재로 보지 못하고 결국 상대화시켜버리고 말지요. 하나님을 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사실적 상상력에만 제한된 사고 경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몇 살이었을까? 
강: 성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매우 비산술적인 이야기를 하지요. 이 말은 사실 종교의 차원이 우리의 과학적이고 산술적인 계산방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에 ‘하나님이 6일 동안 세계를 창조하고 하루를 쉬었다’라고 언급되었을 때, 그 6일 또는 7일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현재 생각하는 24시간 주기의 하루하루가 아니지요. 즉 창세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루”가 우리가 지금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태양력에 의한 24시간의 하루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으려고 하다보면 오히려 그 의미를 왜곡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성서를 “낯설게 볼” 필요가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즉 잘 알고 있는 익숙한 책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낯선 책”이라고 생각하면서 접근해야, 그 속에서 끊임없이 지금 여기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전달되는 살아있는 메시지들과 조우할 수 있는 가능성이 휠씬 많아진다고 저는 봅니다.
제가 한번은 저의 학생들에게 ‘아담과 이브를 하나님이 창조했는데, 그 창조 당시 아담과 이브가 몇 살이었을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을 받은 학생들이 굉장히 당황하더군요. 사실 성서를 읽으면서 우리 대부분은 그런 생각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서를 “사실적”이고 “문자적”인 책으로만 읽으려면 대답해야 할 질문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들이 몇 살이었을까?’ ‘정말 갓 태어난 아기처럼 마구 울었을까?’ ‘그럼 누가 기저귀를 갈았을까?’ ‘누가 젖을 먹였을까?’ ‘무엇을 먹였을까?’와 같은 구체적인 아기 탄생과 관련된 물음뿐만 아니라, 아담과 이브는  ‘무슨 피부색을 가지고 태어났을까?’ 그리고 ‘하나님과 소통했을 때 어떤 언어를 썼던 것일까?’’ 등과 같은 인간의 구체적인 육체성에 관한 물음도 생깁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적” 물음에 절대적인 답을 가지고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서를 “사실적”으로 읽기 시작하면 별안간에 많은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게 되지요. 제가 제 학생들에게 그 질문을 던졌더니 이런 질문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고, 생각해 본적도 없다고 하더군요.  
문: 저도 그런 의문은 한 번도 품어보지 않았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인간의 유한한 상상력 속에 갇힌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는 군요. 우리가 사실 정도만 파악할 수 있으니까 사실적 상상력만으로 세상과 하나님을 재단하는데, 사실 그것이 우주적인 존재를 왜곡시키게 된다는 것이지요? 
강: 우리가 사실적으로만 성서를 읽게 되면 우리의 무수한 사실적인 물음에 답을 못하게 돼요. 모순이지요? 이것은 결국 우리가 ‘어떤 무한자가 우리를 창조했다’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다윈의 진화론과 기독교의 창조론이 대립할 필요가 없는 것이에요. 서로 이 세계에 대하여 각기 다른 방식의 눈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기독교 창조론을 “문자적”으로 믿는 이들은 “종교와 과학”을 대립적인 선상에서 놓고서, 학교에서  절대로 진화론을 가르치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성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그 일로 제가 오래 전에 한국의 한 신문에 “독일말도 하는 하나님” 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쓴 적이 했습니다. 제가 독일로 유학을 갔을 때 우리 아이들이 1살과 3살이었어요. 어느 날 3살짜리 아이가 유치원을 갔다 오더니 수심에 가득 차있는 거에요. 독일 가기 전에는 몇 개월을 제 부모님 댁에서 지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아침마다 가정예배를 보고 식사기도를 열심히 한국말로 하는 것을 보고 배웠어요. 할아버지는 이제 한국을 떠날 아이에게 한국말로 기도를 매 번 연습시키기도 했구요. 그런데 독일에 가니 유치원에서 독일어로 식사기도를 했나 봐요. 그 아이가 다니던 유치원이 가톨릭 단체에서 운영하는 것이었는데, 아마 아주 단순한 한 문장의 감사기도였겠지요. 그런데 이 아이는 하나님이 이제 자기 말을 못 알아듣겠구나 하는 걱정이 되기 시작한 겁니다. 자기가 하나님한테 기도를 하긴 했는데, 한국말로 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분명 자기 기도를 알아듣지 못했을 거라는 거지요. 아마 기도를 안 하면 하나님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무튼 매우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아이에게 “하나님은 독일말도 할 줄 아셔. 그러니 네가 한 독일어 기도도 벌써 모두 알아 들으셨을거야”라고 했더니 다시 “진짜 하나님이 독일말도 할 줄 알아?”라고 확인하고선 얼굴이 환해지더군요. 그때 그 아이와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저는 ‘우리의 사유라는 것이 늘 그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제한된 인식을 가지고 신을 제한시키는 구나’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세 살짜리 저의 아이에게 하나님은 한국말만 알아듣는 한국사람 모습의 존재이지요. 지금도 사실 신에 대하여 이렇게 자기세계에만 제한시켜서 생각하고,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문: 그러니까 이웃사랑이라는 것도 너무 낭만화하거나 교리화해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매우 일상적인 일들 가운데서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지요? 무언가를 절대적인 교리로 고정하는 것 자체가 인간세계를 불변하는 그 무엇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지요. 
▲강남순 교수는 성소수자들을 상대로 신에 대한 "사랑의 이름으로" 정죄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강: 그 칼럼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무수히 예수를 배반하고 신을 배반하고 있다구요. 제가 다양한 장에서 강연하거나 글을 쓸 때에, 어떻게 하면 그런 인식론적 아집에 근거한 종교적 편견을 조금씩이라도 벗겨낼까를 모색해요. 정말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진정한 종교인이라면, 궁극적으로 이 우주를 다 끌어안는 그런 마음, 그래서 이웃의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 동물, 식물까지도 포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거든요.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고서는 “좋다”고 말씀하셨다고 창세기는 고백합니다. 이런 기독교 창조론의 맥락에서 보자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창조물이니까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 기독교적으로도 타당한 일인 것입니다. 누구도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우월하거나 또는 열등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모든 인간은 각기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데리다나 레비나스 사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독교의 환대나 이웃 사랑의 개념에는 타자, 제3자, 자연, 동물까지도 포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기가 쉽지는 않지요, 아니 거의 불가능하죠.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런 불가능성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살다보면, 지금의 핵 문제라든가 밀양 송전탑 문제, 세월호 참사 문제 등도 사실상 기독교적인 문제라는 인식을 하게 됩니다. 신이 창조한 생태계, 자연계도 우리의 이웃이니까 우리가 이용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공존하려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그렇게 보면 사실 기독교인들의 과제, 사명이라는 것은 정치가를 뽑는 것부터 시작해서 정치인들이 세금을 제대로 운용하는가, 건강보험이나 교육, 이주노동자들의 문제까지 연결되어 있어서 결국 그러한 일들이 이웃사랑을 잘 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 그러면 코스모폴리타니즘이 이웃사랑 속에서 구현되는 것 자체가 신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이 되겠군요? 
강: 사실 이것은 굉장히 성서적이에요. 요한1서에 보면 ‘신은 사랑이다.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신을 알 수 없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우주적인 사랑의 신학적 선언입니다. 그런데 다만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무엇이 사랑인가?’라는 아주 중요한 근원적인 물음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이름으로 사람들은 무수히 증오를 하거든요. 성소수자들을 신의 이름으로 정죄를 하는 것도 ‘내가 그들을 사랑해서 그렇다’라고 말하고, 사랑의 이름으로 자식들에게 물리적, 언어적, 정신적 폭력을 가하는데, 그러한 것은 “사랑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분명히 잘못된 폭력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것들을 다시 근원적으로 점검해보는 것이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신학과 철학의 경계를 긋지 않습니다. 철학도 인간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과 씨름하는 것이고 신학도 종교의 언어를 사용해서 그것과 씨름하는 것이거든요. 예수의 가르침을 보면, 철저히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최후 심판도 다 삶에 관한 것이죠. 종교를 우리의 삶으로부터 너무 유리시켜서 교리의 이름으로 제한하는 것은 예수의 복음, 즉 “기쁜 소식”이 이 종교의 담을 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지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변화에 대해 열린 정체성 가져야 
제가 이런 발언을 하면,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는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정체성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질문을 합니다. 교리적, 종교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사실은, 영어로 하면 “시작점”(point of entry)이에요. 우리는 이 삶을 어디선가 시작을 해야 하지요. 그렇지만 그것이 “종착점”(point of arrival)은 아니지요. 어디선가 들어가지만 들어가서는 더 넓은 것도 봐야 하죠. 예를 들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하나의 시작점이에요. 그렇지만 그 시작점으로부터 모든 인간이 신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이며, 인간만이 아니라 생태계, 동물, 식물까지 다 신이 지으신 우리의 동료 이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철학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그 타자들도 우리의 동료, 동등한 우주적 시민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어가 종교적이더라도 그 용어를 종교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열린 정체성이어야 합니다. 폐쇄적인 종교적 정체성이 아니라 열린 종교적 정체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이고 구체적으로는 감리교인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나 교단들을 모두 일일이 점검하고 난 뒤 기독교인이나 감리교인이 된 것은 아니에요. 제 삶의 정황에서 그러한 종교적 또는 교단적 소속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만이 또는 감리교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라고 주장할 근거는 아닌 것입니다. 모든 종교나 또는 교단들도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덕과 악이 다 공존해요. 그러면서 우리가 타 종교에 대해 정죄를 할 수 있는 시각이나 위치에 서 있지 않다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죄”란 인간이 아닌 신의 일이며, 신이 어떠한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는 기독교인이라면 예수를 통해서 추측할 수 있을 뿐이지 어떠한 절대적인 객관적 기준을 인간이 세울 수는 없다는 겁니다. 예수의 진정한 연민의 시선을 가지는 것, 즉 코스모폴리탄적 시각을 갖는 것이 신학적으로는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의 우선적인 과제이며 책임이라고 저는 봅니다. 
문(지유석): 코스모폴리타니즘을 말씀하시는데, 최근에 몇몇 기독교인들이 인도의 불교성지인 마하보디 사원에 가서 찬송가를 부른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 그 일은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하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우리가 인도에서 태어났다면 내가 어떤 종교인이 되었을지 몰라요. 그리고 아시아에는 소위 기독교인들이 3%도 안 돼요. 그러면 나머지 97%는 그 사람들의 논리에 따르면 신의 저주를 받는 것이지요. 그렇게 가르친 신학대학도 문제입니다. 그러니 신학교육을 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일부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문: 이웃사랑을 예수의 말씀이라고 선전하면서 이웃을 정죄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예수를 배반하는 행위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사실상 다종교 사회이고 기독교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선교전략상 타종교에 대해 배타성을 띨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한 전략이 고정관념이 되어 여전히 신자들의 믿음 생활을 제한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는 합니다만.   
▲성소수자 문제를 둘러싸고 강남순 교수는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하는 물음에서부터 시작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강: 그렇습니다. 서구에서 타종교 문제를 다루는 정황과 한국사회와 같은 사회의 정황은 굉장히 다릅니다. 그래서 제가 국제회의 등에서 종교적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신학자들과 토론할 때는 이러한 사회적 정황의 특수성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언급합니다. 물론 다양한 종교적 물음은 다양한 철학적 물음들과 겹치지만, 근원적인 차이점 중 하나는 보통사람들의 일상적 삶속에서의 ‘헌신”(commitment)의 문제입니다. 종교는 다양한 방식의 헌신을 요구합니다. 종교적 다원주의가 놓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종교적 헌신입니다. 그들은 헌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얘기를 안 해요. 또 다른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구원”의 가능성을 규정하는 방식입니다.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을 지닌 학자들은 이론적으로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라고 강조하는데 거기에는 굉장한 신학적 오류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타종교를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또는 없다”라고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는 않거든요. “구원”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도 심각한 신학적 물음이지만, 인간의 궁극적 구원의 가능성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종교의 교리나 텍스트를 보면서 단순히 “구원”에 대하여 판단하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일이 아니지요. 저는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인식론적 오류라고 봅니다. 그래서 타종교에 대한 존중과 인정을 강조하지만, 저는 “종교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의 신학적 논의들에 대해서 비판적입니다. 종교 다원주의 사상의 결정적인 철학적 한계중의 하나는 이 세계에 고정된 절대화된 “진리”가 존재한다는 근대주의적 인식론적 토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또 다른 구체적인 측면 중의 하나는 서구의 다종교주의자들은 아무리 타 종교를 인정해도 기독교의 생존이 위협받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서구 문화는 교회에 사람들이 줄어가든 늘어가든, 여전히 그 뿌리부터 유대-기독교사상에 기초한 세계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기독교가 아닌 종교들을 이론적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그 사회에서의 종교적 생존의 문제가 위협받지는 않지요.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 종교적 상황이 다르지요. 제가 배타적인 기독교인들을 조금 이해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가 나중에 들어온 종교이지요. 그러니 기존의 종교들 속에서 생존하고 자리잡아야 하니, 기독교의 절대적 의미를 더욱 배타적으로 형성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최고다’라고 주장하지 않으면 굳이 사람들이 회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거든요. 타 종교에서 기독교로 바꿀 필요가 없지요.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여성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기독교에 귀의한 사실은 당시 사람들이 기독교로부터 불교, 샤머니즘, 유교가 그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하지 못하는 일, 즉 해방적 요소들을 발견했기에 다른 종교로부터 기독교로의 전이가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거든요. 종교 다원주의적 시각에서처럼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면, 그리고 모든 종교가 지닌 유(類)사상이 있다면 사람들이 굳이 종교를 바꿀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왜 특정한 장소와 시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를 바꾸는 것일까라는 문제는 신학자들이 타종교에 대한 논의에서 빈번히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기독교가 그 당시 다른 종교와 무슨 차이가 있었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종교로부터 기독교로 전이하게 했는가와 관련해서는 종교 다원주의의 논지에서는 아무런 단서를 찾기 힘듭니다. 
그런데 교리적으로 절대화하는 경향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형성이 되는 것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소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서 그들 종교의 사원들을 부수는 거예요. ‘너희들은 기독교로 와야지만 구원 받는다’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에요. 그것은 우리가 신의 역할을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기독교를 모독하고, 예수를 모독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예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정죄한 것은 그들이 사람들을 종교의 이름으로 기만했기 때문에 성전에서 화를 낸 것입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왜곡시키고 기만할 때 화를 내신 것이죠.  
그런 면에서 보면, 인도에 가서 그런 일을 한 것은 첫째, 굉장히 무지한 행동이고, 둘째, 신의 역할을 했다라는 면에서 정말 신학적으로도 굉장히 문제가 많죠. 부끄러운 행동이에요. 그리고 성소수자들이 지난번에 퍼레이드를 했을 때 기독교인들이 그들을 정죄하고 그 퍼레이드를 방해하기 위한 갖가지 폭력적 행동들을 했는데, 그것도 굉장히 부끄러운 행동이에요. 여담이지만 제가 일하고 있는 학교는 학생이나 교수 중에 그런 성소수자들이 여러 명 있어요. 그런데 그들의 얼굴을 한명 한명 마주하면서 그 사람에게 감히 ‘너의 성적 성향이 그러니깐 지옥에 간다’든지의 생각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학생으로 가르치고, 동료로 함께 일하면서 그 사람들이 그런 성적 성향 때문에 얼마나 고통당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이 굉장히 개방된 것 같지만, 아직도 제 학생 중에는 자신의 부모로부터 아주 내놓은 자식으로 취급받는 경우도 꽤 있어요. 제 어느 학생은 소위 커밍아웃을 한 이후로, 부모들이 ‘이제부터 내 자식 아니다’라고 선언하고서, 7년째 전혀 왕래를 하고 있지 않는 이도 있어요.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  부모님들이 모두 다 교회를 열심이 다니는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문: 80-90년대에는 우리나라에서 젠더 문제, 성차별 문제가 굉장히 심각했는데, 요즘은 성소수자 문제가 점점 표면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강: 성소수자 문제가 이제 시작 단계라서 몰이해나 그들에 대한 박해가 더 심한 것이에요. 이제는 곧 우리 한국 교회에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한글 페이스북을 열었습니다. 일전에 어느 신문에 “성소수자,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제가 쓴 성소수자에 대한 글이 실렸는데, 그 기사의 댓글들이 ‘강남순 교수 회개하라,’ ‘기독교인도 아니다’ 등 노골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고 어쨌든 그런 문제를 다뤄야겠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다루었던 것뿐입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 이제 새로운 주제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하려고 할 때,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는 영어로는 “WWJD”(What Would Jesus Do?)인데, 미국에서는 잘 알려진 유행어입니다. 오래 전 어떤 자동차 광고에서는 “예수라면 무엇을 운전할 것인가?”(What Would Jesus Drive?)라는 카피를 사용하기도 했었습니다. 미국은 기독교세가 약화되고 있는 사회라고 하지만 대통령이 아직도 성서 위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국가이니까 “예수”라는 이름이 여전히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지요. 이 용어는 1896년에 찰스 셸든(Charles Sheldon) 목사가 쓴 책의 부제에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서: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책이었지요. 사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늘 이 질문을 해야 한다고 저는 봅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지금 ‘성소수자를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어봐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라도 예수의 “연민의 시선”을 가지고 성소수자들을 보기 시작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문제가 참으로 달라질 것입니다. 
문: 이렇게 장시간 말씀을 나누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나라의 현 세태와 관련하여 통찰력이 있는 조언이었습니다.(끝) 
 
[대담= 이인기 편집국장, 정리= 이가람·백결 객원기자(연세대 신과대 재학), 사진= 지유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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