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예레미야서 23:25-29
"나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로 예언하는 예언자들이 있다. `내가 꿈에 보았다! 내가 꿈에 계시를 받았다!` 하고 주장하는 말을 내가 들었다. 이 예언자들이 언제까지 거짓으로 예언을 하겠으며, 언제까지 자기들의 마음 속에서 꾸며낸 환상으로 거짓 예언을 하겠느냐? 그들은, 조상이 바알을 섬기며 내 이름을 잊었듯이, 서로 꿈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내 백성이 내 이름을 잊어 버리도록 계략을 꾸미고 있다. 꿈을 꾼 예언자가 꿈 이야기를 하더라도, 내 말을 받은 예언자는 충실하게 내 말만 전하여라. 알곡과 쭉정이가 서로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 주의 말이다. 내 말은 맹렬하게 타는 불이다. 바위를 부수는 망치다. 나 주의 말이다. 아멘.
디모데후서 3:12-1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더 악하여져서, 남을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굳게 믿는 그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그대는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대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 있습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16:19-31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그러다가,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고, 그 부자도 죽어서 묻히었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다.` 부자가 말하였다. `조상님, 소원입니다.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나는 형제가 다섯이나 있습니다. 제발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고통 받는 이 곳에 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부자는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로 가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아멘.
설교문
우리는 오늘 성령강림절을 지키고 있으며, 이 절기에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간구합니다. 성령의 역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방금 새 생명을 달라고 찬송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죽으면서도 생명을 달라고 간구할 수 있을까요? 모순처럼 들립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사람이 땅에서 살다가 죽어서 이 땅을 떠난 다음에는 하나님 품으로 간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땅에서 이미 죽은 모든 사람들을 부활시키시고, 그 당시 살고 있을 사람들도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 심판을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양’편에 속한 사람들은 따로 모아 천국에 보내고, ‘염소’ 편에 속한 사람은 지옥으로 보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천국과 지옥이 완전히 갈라집니다. 그래서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천당과 지옥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날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 때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인간의 역사, 자연의 역사, 그리고 온 우주의 역사가 마지막을 고할 때가 언제인지 하나님만 그 시간을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자신도 마지막 때와 시간을 모르니 그것을 안다고 떠드는 사람이 있으면 믿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큰 종말의 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나사로 비유를 통해 이런 세계와 우주의 종말 이전에 있는 또 다른 종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세상 끝이 언제 오건 우리들의 개인의 끝과 우주적 종말의 끝은 시간적으로 서로가 상관이 없습니다. 세계의 종말과 상관없이 우리 각자의 실존적 종말은 자기 목숨이 끊어지는 것과 동시에 시작됩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죽음과 함께 바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최후의 심판을 받지는 않습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을 보면 우리가 죽어 이 세상을 떠나면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셔서 그 영혼을 이끌고 ‘아브라함의 품’이라 이름하는 임시 천국으로 데리고 간답니다. 또한 심판 받을 사람은 천사가 아닌 -아마도 사탄이라고 합니다만- 그 사탄이 ‘하데스’라 이름하는 곳, 우리 성경에는 "지옥"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곧 그 곳으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불, 유황, 아픔이 있는 지옥의 고통"을 견뎌야만 한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개인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천당에 갑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분명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온 우주의 종말을 맞이할 때 까지, 곧 예수님이 재림하기 전까지, 일종의 임시천국과 임시지옥으로 가서 기디리면서 삽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소망합니다. 우리 각자가 생을 마감하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영원한 심판을 기다리면서 "아브라함의 품"이라 이름하는 임시천국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와 부자를 통해 죽은 후의 모습을 실예로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죽기 전에 어디로 갈지를 결정하는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의 하나님 뜻을 따라 살며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느냐의 여부에 따른 것이라고 하시니, 우리 모두 아브라함의 품으로 갈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면서 부자 한 사람과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대비시킵니다. 얼마나 부자인지는 모르겠으나 부자가 매일 입는 옷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이랍니다. 이것은 비싸기 때문에 왕실에서만 입을 수 있는 옷입니다. 이 부자는 매일 즐겁고, 행복하고, 배불리 살았답니다. 이에 반해 이 집 앞마당 구석에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 웅쿠리고 앉아있는데 몸에 너무 헌데가 많고, 몸의 상처를 개가 핥아 먹을 정도로 건강이 약한 사람입니다. 앉은뱅이라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부자가 밥을 먹다 상에서 떨어뜨린 부스러기를 가져다주면 그것을 먹고 삽니다. 혼자서는 일어 설수도 없고, 치유 받을 수 도 없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부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의 이름은 밝힙니다. 나사로입니다. 이 이름은 어느 특성 성씨와 이름이 아닙니다. 어원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어서 하나님이 끌어안고 사는 사람입니다. 죽은 후에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부자는 임시지옥으로 갑니다. 카톨릭에서는 이 임시거처를 ‘연옥’이라고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연옥이라는 말 대신 "아브라함의 품"과 임시지옥이라고 합니다. 임시지옥의 원어는 "하데스"라 하구요.
부자가 하데스에서 보니 자기가 눈으로 보이는 맞은편에 아브라함이 앉아 있고, 그의 품에 자기 집 문간에서 동냥을 하던 가난한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나사로가 입고 있는 옷은 보기 좋았고, 먹는 것과 잠자리도 좋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너무 살기 힘들고,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은 이 한 마디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기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눅16:24) 여러분 이 장면을 상상 할 수 있겠지요? 이에 대해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 네가 있는 곳과 우리가 있는 곳의 간격이 너무 커서 네가 넘어 올 수 도 없고, 우리가 넘어 갈 수 도 없다". 부자가 이야기 합니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있는 곳은 고통이 너무 심합니다. 아직 죽지 않은 형제 다섯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이 곳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 그들이 이곳에 오지 않게 조치를 취하라고 전달케해 주십시오". 아브라함의 대답입니다. "나사로는 부활해서 그리로 다시 갈 수 없다". 믿는 우리도 구원받으면 죽어 아브라함 품으로 가는데 그곳에서 이 땅으로 다시 살아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있노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거나 그런 사람이 있으면 다 가짜입니다. 나사로도 못 옵니다. 그러나 오신 분이 딱 한 분 계시는데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너희 형제들에게 모세가 있었고, 예언자들이 있지 않았느냐. 그 사람들이 했던 말을 지키면 되는데 왜 그것도 지키지 않으면서 나사로를 보내라고 하느냐. 모세 말씀대로 살면 네가 있는 곳이 아니라 나사로가 있는 곳으로 올 수 있다. 예언자들이 했던 말을 지키면 이런 하늘나라에 올 수 있다". 이렇게 말하시고 끝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확인할것이 있읍니다. 세상의 종말이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고, 그 시간도 하나님 뜻이니 그 때와 시간은 하나님 아버지께 맡깁시다. 염려한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그 시간계획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관심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의 품과 임시지옥에 어떻게 하면 가고, 어떻게 하면 가지 않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모세부터 시작해 예언자, 그리고 지금 사도들에 이르기 까지 우리들이 하나님나라에 갈 수 있는 방법과 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수 없이 많이 했는데 왜 그것을 다시 증거 해 달라고 하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의 복음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이 그것인데 왜 또 다른 것을 찾느냐. 성경말씀이 있는데 왜 또 성경말씀을 만들어 달라 하느냐.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또 다른 하나님을 찾느냐. 그분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게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했으면 그것을 믿으면 되지 왜 또 다른 복음을 찾느냐. 다른 하나님은 없다. 다른 구세주도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옛날부터 고백한 바로 그 분 구세주가 우리를 구원하실 바로 그분이시다라고. 이 사실을 예수님이 확신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지금도 믿어라고 하십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잘 산다는 이야기 보다는 못산다는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아니 그 현실에 담긴 고통이 너무 심합니다. 모슬렘끼리 서로 싸우고, 기독교인끼리 서로 싸웁니다. 이로 인해 개인이 죽고, 집단이 죽습니다. 전부 죽음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지금의 인간의 모습이 완전히 없어지고,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의 삶의 관계도 완전히 단절됩니다. 죽으면 만날 사람도 없고, 쳐다 볼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이 제일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세계와 우주의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기 전에 지금처럼 우리가 죽으면 아브라함의 품속이라는 곳이 있고, 하데스라는 임시지옥이 있기에 그곳으로 가서 최후의 심판을 가다립니다. 허나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온 세계가 함께 죽고 세계의 종말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리 고통이 심해도 그냥 죽어버리고 말자거나, 온 세상과 함께 끝장내자고 말할 수 가 없습니다. 죽음으로 끝내자고 해도,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믿는 한 세상의 역사를 개개인이 끝낼 수 가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은 후에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그 곳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 몸이 죽고 썩지만, 오늘 하나님 말씀을 보면, 살아 있는 영인 하늘의 천사가 이끌어 아브라함 품속으로 인도한답니다. 그곳에서 살다가, 주님이 재림하신 후에 썩지 않는 몸을 입혀 영원한 천국으로 이끄십니다. 몸이 썩어 아예 없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만드십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합니다. "예수가 죽으셨다. 하나님은 예수의 죽은 몸을 하나님의 생명 속에 삼켜 죽음을 없애고, 그 속에서 부활생명을 만들어 내셨다. "생명이 죽음을 삼켰다"고 말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 우리 인간의 죽음은 생명한테 삼켜지는 운명의 죽음입니다. 모든 인간의 죽음이 그렇습니다. 결국 생명한테 삼켜져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몸이 죽는다고 죽을 수 가 없고, 죽어도 다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결정하셔야 합니다. 죽어도 살아야지요. 예수와 함께 해야만 살아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나 이 땅에 나사로가 너무 많아서 하나님이 도움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자를 구원하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이 부유함을 샘나서 그러신 것인가요? 두 가지를 하나님이 약속하십니다. 인간이 받은 모든 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왜 부를 샘나 하시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부유하게 삽시다. 힘 있게 삽시다. 또 많이 배우고 알아 지혜롭게 삽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샘의 대상이 아닙니다. 축복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늘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 "왜"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지 못하고 그렇게 어려운 지옥생활을 하느냐 하면, 그 대답은 이러합니다. 부자는 자기 집 앞에 있는 나사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기만 호의호식하고 행복하게 살았다. 하나님이 부자에게 주신 축복은 혼자 독차지 하라는 축복이 아니라 나누어 쓰라고 맡기신 것이다. 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자기 것으로 만 사유화 하느냐? 이런 질책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사유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은 나누어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나누어 쓰지 않았으며, 받은 사랑도 나누며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늘나라 조건과 맞지 않습니다. 또 부자는 나사로 속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모른 척 했습니다. 나사로를 통해서 축복의 나뭄을 실현하라 하셨는데 그 하나님의 음성을 모른척 했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반드시 응답을 들어 주신다고 성경말씀에 쓰여 있습니다. 축복을 달라하면 주십니다. 함께 나누눈 축복 말입니다. 그러시면서 왜 하나님의 축복을 사유화 하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사유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어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받은 사람의 배만 채우게 하시는 그런 하나님은 안계십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사유욕심에 부화뇌동합니까? 온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축복을 주셨지 온 땅 사람들을 선포하고 봉사하고 같이 살라고 먼저 택해셔 주셨지, 내가/우리가 이뻐서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부자에게 주신 축복은 나누어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부자는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 물질의 부유함은 하늘나라에서는 필요 없고, 땅에서 나누어 쓰라고 주신 부입니다. 그리고 나누어 쓰라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것은 하늘나라 입소조건과 맞지 않습니다. 부는 땅에서만 필요합니다. 나사로가 문 앞에 앉아 있는 것은 곧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부자는 모르척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기도에 응답하실 때, 반드시 응답을 들어 주신다고 성경말씀에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사로를 돕기 위해서 부자를 보내셨습니다. 보냄 받은 부자는 자기의 사명을 깨닫지도 못했고, 실행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사람을 도울 때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자기가 축복을 준 사람을 통해서 어려운 사람을 돕게 합니다. 하나님은 병자가 치료 받을 때 의사를 보내서 치료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사람이 힘들어할 때 대신 기도해 줄 사람을 보내서 위로의 복음을 전해주십니다.
우리 모두는 몸의 의사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의사로, 영혼의 전도사로 부름받았읍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사람임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 맞다. 그리고 부자는 하나님과 함께 나사로를 도와주는 축복을 나눔으로 베플어야 한다고. 우리 장로님이 중보기도하셨습니다만, 우리교회가 여름마다 하는 <캄보디아 의료봉사>와 주일마다 하는 주한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선한이웃클리닉의 봉사>를 우리들 인간의 인도주의 적 사랑으로만 도와준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되갚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지, 우리가 잘나서 우리 힘으로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돕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감사의 원천이요 증거입니다. 이처럼 행동이 있는 감사와 사랑을 실천하는 감사가 아브라함 품속에 들어가는 조건입니다. 부 자체가 아니라 부를 빈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우리 행실을 하나님께서 높이 보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브라함이 누구고, 나사로가 누구인지 잘 압니다. 나사로는 말을 못합니다. 가난한 자도 말을 못합니다. 가난함 자체가, 문간에 서 있음 자체가, 우리보고 사랑을 베플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세상의 온갖 불행한 현상을 보고 그 현상에 대해서 하나님 상징적인 부름이요 명령임을 깨달으면, 우리는 그 분을 믿기에 그 분이 행하라고 말씀하신 사랑을 행동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을 고백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예배로 모이지만, 진정한 예배는 형제들 간에 화해할 일이 있으면 먼져 화해하고 와서 들여야 합니다. 나사로를 구해야 하는데 못 구했으면, 나사로의 부름이 아직까지 귀에 쟁쟁하면, 가서 돕고 와서 주님께 예배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사랑과 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을 고백하는 것과 사랑의 실천이 함께 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아브라함의 품을 떠날 수 가 없습니다. 왜 세상을 떠나서 죽어서 가는 곳을 하나님 나라라고 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품속이라고 했을까요? 그곳은 완전한 하늘나라가 아니라 아직은 세상이나 "새로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 이 세상이 아니고 "새 땅, 새 세상"입니다. 그 새 세상은 아브라함 때부터 이미 조금씩 이루어 졌고 지금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읍니다. 우리를 먼저 떠난 사랑하는 우리의 형제자매들, 우리의 지니간 과거에 살았던 분들과 오늘을 사는 우리는 관계를 끊을 수 가 없습니다. 그 분들하고 시간을 넘어서 함께 살아야 되니까요. 우리가 몸을 비비고 살았던 우리의 조상들, 아니면 우리가 눈으로만 보고 살았던 먼저가신 옛 조상들, 만난일이 없는데 귀로만 들었던 위인들, 이 분들과 "기억"을 통하여 함께사는 것이 바로 인간 공동체의 실질 모습입니다. 돌아가신 그 분들을 우리가 잊을 수가 없고, 그분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들이 우리 자신의 과거의 역사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부정하는 사람은 진정한 오늘의 사람이 아닙니다. 역사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그 역사에 살았던 사람들이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가야 할 미래 시간과 공간에 먼저 가 계십니다. 우리의 미래는 아브라함의 품속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지금"을 살 고 있는데 과거의 사람들은 우리가 가야할 우리의 미래를 먼저 선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따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과거가 미래가 되고, 미래가 과거가 됩니다.
지금 우리는 서로 협력하면서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 살아가는 세상은 모세와 예언자와 사도를 포함한 옛날부터 우리에게 말씀을 전했던 그 사람들의 똑같은 말씀이 선포되는 세상입니다. 예부터 전해진 말씀에 지금도 순종하고, 사랑하고 믿고 살면 우리의 미래는 보장이 됩니다. 그 말씀은 본래 미래의 주인이신 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보장받기 원하시는 분은 지금 받은 하나님의 본래의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살고, 과거도 살고, 현재도 하나님 믿고 살아갑니다. 그 하나님은 영원무궁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분은 빨리 오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아브라함 품속으로 빨리 오라고. 그리고 먼저 화해하고 오라고. 그 품속에 가면 기다리는 나사로가 있다고. 나사로가 되어야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서로가 나사로 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자 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사로요, 부자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부르시면 나사로를 찾아 갑시다. 하나님이 요청하시면 나사로 속에서 부르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납시다. 그래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게 아닙니까? 이것이 사랑하는 여러분께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살아가면서 힘드십니까. 고난 받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반드시 모든 사람을 어떤 고난에서도 건져 주십니다. 나사로도 건져 주십니다. 우리가 나사로를 만나면 나사로 안에 계신 그 분이 우리도 건져주십니다.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하나님 믿고 하나님과 함께 항상 동행 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