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이 땅에 하늘잔치를

2014년 6월 29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이사야서 55:1-3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어찌하여 너희는 양식을 얻지도 못하면서 돈을 지불하며, 배부르게 하여 주지도 못하는데, 그것 때문에 수고하느냐? "들어라,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으며, 기름진 것으로 너희 마음이 즐거울 것이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와서 들어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살 것이다. 내가 너희와 영원한 언약을 맺겠으니, 이것은 곧 다윗에게 베푼 나의 확실한 은혜다. 아멘. 
에베소서 2:17-22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14:15-24 
함께 먹고 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이 말씀을 듣고서 예수께 말하였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잔치 시간이 되어, 그는 자기 종을 보내서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말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핑계를 대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은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보아야 하겠소.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 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 하고 말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내가 장가를 들어서, 아내를 맞이하였소. 그러니 가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이 돌아와서, 이것을 그대로 자기 주인에게 일렀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더러 말하기를 `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하였다. 그렇게 한 뒤에 종이 말하였다. `주인님, 분부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말하였다. `큰길과 산울타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초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아무도 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아멘. 
설교문
구약성경 시편에 나오는 특별한 말이 있습니다. 시편에 열 번 나오는 두 가지 단어입니다. ‘할렐루야’와 ‘아멘’입니다. 오늘 성가대는 할렐루야 찬양을 하고, 우리는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할렐루야의 의미는 하나님을 송축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너무 기뻐서 "하나님께 영광을 그리고 찬양을!" 이라는 말입니다. 노래 부르는 사람은 할렐루야하고 그 노래를 들은 우리는 같이 아멘과 할렐루야 합니다. 오늘 예배에 오신 우리 모두는 한 주 동안 살면서 하나님 앞에서 잘 살았는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감사하며 할렐루야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할렐루야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론상 우리는 혼자서도 잘 살 수 있고,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내가 이웃과 함께 행복한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 진정으로 "할렐루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상해서 난리 치는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죽어 가는데 할렐루야가 가능하겠습니까? 오늘 장로님이 중보기도 한 것처럼 300명이 넘는 아이들이 바다에 빠져 죽는데 우리는 할렐루야라고 할 수 있습니까? 6·25 전쟁으로 수백만이 죽었습니다. 우리는 예배 들이면서 할렐루야 할 수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할렐루야 고백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할 때 발하는 그 고백적 찬양을 기쁘게 받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불행한데도 하나님께 할렐루야라고 억지의 고백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 거짓말하고 살지 맙시다. 진실로 삽시다. 아니면 아니라고 정직하게 말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부와 아첨을 결코 좋게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나라가 전쟁의 참혹에 빠진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상당히 오래된 일인데도 항상 오늘 일인것 같습니다. 이 전쟁이 발생하고 3년이 지난 뒤의 결과는 전쟁하기 전의 3·8선 유지 그대로 입니다. 그리고 휴전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분단되어 살고 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남북한의 총인구는 3천만 정도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이 520만 명입니다. 약 1/5정도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외국 사람이 군인 포함 100만 명 정도 죽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중국 사람이 많이 죽은 것 같습니다. 전쟁은 세상을 변화시키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옛 그대로의 3·8선과 약 60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남겼을 뿐입니다. 
히틀러는 홀로코스트를 통해 600만명의 유대인을 죽였습니다. 온 세계가 놀랐습니다. 우리나라도 그 만큼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할렐루야가 가능합니까? 이 전쟁으로 500만 명의 사상자와 함께 천 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생겼습니다. 3천만 인구 중에서 500만은 죽고, 천만 명은 이산가족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비극 중에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행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전쟁을 일으키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전쟁은 나의 뜻이라고 하는 하나님은 안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냐고 하면, 이런 죽음의 상황 가운데서도 생기를 불어 넣어 다시 살려내겠다는 결단의 뜻인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이 민족아! 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살아라. 다시는 전쟁하지 말고 살아라"고 하십니다. 
전쟁을 하는 인간은 "힘"의 우위를 믿는 족속입니다. 나 홀로, 우리 홀로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 힘의 논리를 가지고 전쟁을 합니다. 전쟁을 위해서는 사람의 힘, 무기의 힘, 그리고 정신적 힘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힘은 하나님 자신이 보여주시려는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은 죽이는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은 죽은 자는 살리고, 병자는 고치고, 앉은뱅이는 걷게 하고, 소경은 눈뜨게 하는 살리는 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그런 살림의 힘이 생깁니다. 그렇기에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세월호 참사도, 군대 총기 사고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살리는 힘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살리는 권능을 받아 죽은 자들을 향해서, 죽어가는 세계를 향해서, 그리고 죽음의 힘이 작용하는 땅을 향해서 하나님의 힘은 살리는 힘이니 살아나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믿는 신앙의 힘은 살리는 힘입니다. 죽이는 힘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거짓 종교 신봉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살리는 분이신데 죽이고 나서 하나님 감사드린다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영, 살리는 영인 성령과 함께 살아내고, 살려내야 합니다. 
전쟁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6·25 전쟁과 같이 다시는 이 땅에 죽음이 아닌 살림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전쟁을 경험한 분이나 경험하지 않은 분이나 죽이는 일은 하지 맙시다. 살려냅시다. 제가 죽이는 일에 관해서 우리니라 남북 이야기만 했지만 과거에 하나님을 믿는 종교도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것이 약 500년 전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끝나고 100년이 지날 무렵인 1618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내적 전쟁이 발발합니다. 각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을 따르는 신교도와 반대하는 천주교도 사이에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 전쟁이 발생된 배경은 이러합니다. 그 당시는 자신의 신앙의 신념에 따라 천주교와 개신교를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속해있는 지방의 영주의 선택에 따라 이루어 졌습니다. 그 당시 영주들은 신앙로선의 선택도 있었겠지만, 주로 크게는 자신의 정치/경제적 이유로 카톨릭을 선택하고, 또는 개신교를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갈등의 원인이 되어 1618년 시작해 1648년까지 30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우리는 3년 동안만 전쟁을 했지만 이 기독교 내의 전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30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여러분, 천주교 하나님이 옳습니까, 아니면 개신교 하나님이 옳습니까. 왜 하나님을 나누며 전쟁을 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이것은 전적으로 사람의 타락한 뜻입니다. 이로 기독교 전체가 다 망가집니다. 
결론은 우리나라는 3년 전쟁으로 휴전협정하고 옛 그대로의 3·8선만을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 전후로 국토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단지 인간의 탐욕스러운 권력욕 때문에 수많은 사람만이 죽었을 뿐입니다. 유럽에서는 기독교 두 파가 서로 전쟁을 하고 ‘종교협약’을 맺었습니다. 영주의 선택에 따라 천주교/개신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이 알아서 선택하자는 협약 바로 그것입니다. 이 한 줄의 합의가 지난 30년 전쟁의 결과입니다. 당연한 결과를 위해 지난 3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전쟁 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인구의 합은 2,100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끝낸 후에는 전체 인구가 1,350만명으로 줄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인구가 증가한 것을 빼고도 750만명이 종교전쟁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교파에 속한 사람들을 서로 죽였습니다. 우리는 이 상황 가운데 있으면서 회개해야 합니까, 아니면 할렐루야 해야 합니까. 천주교가 훌륭했는지, 아니면 개신교가 훌륭했는지 잘 모르지만, 어느 교파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교파 사람을 죽이는 일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천주교도, 개신교도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다시는 누구 이름으로도 전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가 범한 큰 잘못 중의 하나입니다. 
최근에는 이슬람에서도 자기 내부 갈등으로 전쟁을 합니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죽기 전에 아들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래서 수장권을 상속할 아들이 없어 자기 맏사위에게 상속을 합니다. 이 일로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맡사위 상속이 옳다고 주장하는 쪽이 ‘시아파’입니다. 시아파는 맡사위 이름인 시아트 알리(Shiat Ali)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잔, 바레인 등의 시아파 주류국은 이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수니파는 가계직속이 아닌 사람가운데서 후계를 뽑는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수니파는 전체 세계 이슬람의 80정도가 되며, 시아파는 20 정도입니다. 미국에 의해서 처형된 사담후세인은 시아파가 대다수인 이라크에서 수니파 독재자였습니다. 후세인이 죽음 다음에 시아파가 집권합니다. 그런데 수니파가 반군을 조직해 공격하고 있습니다. 과거 정치적으로 원수 관계였던 이란과 이라크가 시아파 결속의 기치아래 협력해 수니파와 전쟁하고 있습니다. 이슬람은 자신의 하나님을 ‘알라’ 라고 부릅니다. 이 모습을 보고 알라가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 기독교가 범했던 잘못을 이슬람도 똑같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은 성경에도 없고, 그런 알라는 꾸란에도 없습니다. 하나님, 알라,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이든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는 하나님이시지 산 자를 죽이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산자를 죽이는 하나님으로 알고 믿었다면 잘못된 믿음이고, 잘못된 신앙입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갇혀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얼마나 가슴 아파하실까요. "나는 전쟁의 신이 아니라 생명의 신인데, 왜 사람들은 죽이고, 또한 이것을 찬양하느냐"면서. 우리는 어떻게 죽이는 현장을 보고 할렐루야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나는 살리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살리는 그 나라를 "하나님 나라라고 이름하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시면 그 나라에는 전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에 가면 전쟁 없는 평화의 나라에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평화를 주는 것이다. 멀리 있는 사람이나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교인이나 교인이 아닌 사람들이나, 하나님은 온 백성의 하나님임으로 평화를 주신다. 그 평화는 죽은 다음에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평화가 아니라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당연히 하늘에 있지만 그것만을 바라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 있는 전쟁 속에서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땅의 불행 속에서 행복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있느니라. 이 땅에 있는 평화를 맛보아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하늘 사람이 육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탄절, 십자가, 부활절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지는 나라의 주인 만이 아니시고,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늘나라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평화의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평화를 누릴 수 없으면 할렐루야는 불가능합니다. 어떤 이유로도 불가능합니다. 
"이 땅에 평화를 주옵소서!". 오늘 예수께서 이 말씀과 관령해서 비유 하나를 들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비유입니다. 주인이 하늘나라 잔치를 이 땅에 마련하고, 초청장을 보냅니다. 잔치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사람이 안 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서는 세 부류의 사람이 못 오겠다고 답변합니다. 첫 번째로 땅을 산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땅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니 그는 당신이 만드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못 가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자신의 행복은 땅에 있답니다. 재산에 있답니다. 여기에 자기의 모둔 것이 있답니다. 당신 없어도 된답니다. 마지막은 장가든 사람입니다. 신혼의 재미가 너무 좋습니다. 이것이 자기 천국이랍니다. 당신이 초청한 천국에는 못가겠다고 합니다. 당신 없이도 우리는 부부 간에 천국을 누릴 수 있답니다. 유형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살림, 이유가 다양합니다. 하나님이 화가 나셨습니다. "오지 마라. 본래 초청 계획에 없었던 사람들을 불러와라. 불러와 채웠는데도 자리가 남으니 그러면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데리고 와라. 내 집은 꽉 차야한다. 내 평화의 동산은 꽉 차야한다. 초청받은 사람이 못 오면 다음 사람을 불러오겠다"고 하십니다. 
중요한 대목은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한 평화의 나라를 반드시 이 땅에 채우시려고 하십니다. 목적은 이것입니다. 소 산 사람도 하나님 나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를 사지 못한 가난한 사람도 자격이 있습니다. 밭을 산 사람과 못 산 사람 다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밭 산 사람을 시기 질투하여, 장가가고 시집 간 사람들을 시기 질투하여 자기 집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행복은 밭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밭을 사고 경영하는 사람의 중심 속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야 밭 운영이 잘 됩니다. 그래야 밭 농사도 복될 수 있습니다. 신혼부부도 스스로 신혼의 재미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혼부부가 평생 신혼의 재미를 누리려면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창조주의 진실한 사랑이 들어가야 평생 행복할 수 있습니다. 소를 샀다고요. 소가 죽으면 어떡합니까? 소 산 사람의 생명도 그 생명 속에 하나님이 중심을 잡고 있어야 행복합니다. 이 땅을 바치는 모든 경제 /정치가 있습니다. 그 자체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누리는 사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면 정치도 잘되고, 경제도 잘 됩니다. 하나님은 시기질투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욕구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모든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내가 참여하고 싶다. 그대들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 이니라". 그것을 받지 못하면 행복과 평화는 이 땅에 없습니다. 이 땅에 없는 평화를 하늘에 가서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최대한 높고, 행복하고, 진실하고, 평화롭고, 의롭게 살라고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를 중심에 모시고 살면 모두가 가능합니다. 하나님 모시고 산 사람이 전쟁을 어떻게 일으킵니까. 하나님 모시고 산 사람이 어떻게 죽으라고 총을 쏩니까? 이 세상의 양심은, 이 세상의 행복의 가장 깊은 곳에는,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변두리로 몰아 내지 말라"십니다. 오늘 그를 변두리로 쫓아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셔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은 우리는 그 나라에 무엇을 가져다 드리면 됩니까?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 은혜를 믿음으로 받으면 된다. 은혜는 할렐루야 한 마디로 족하다. 거기에다가 값이 얼마인지 붙이지 말고 그냥 가져가라. 그러나 진실로 가져가라. 진실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모아서 가운데 내 집을 마련해라. 그러면 그곳에 내가 성령을 보내겠다"고. 성령은 살려내는 힘입니다. 생명의 하나님 생명의 영, 그것을 여러분에게 주십니다. 그것을 받으시겠습니까? 오늘 받아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항상 복되게 사십시오. 아름답게 사십시오. 가치 있게 사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고, 그 세상 가운데 오셔서 복되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배척하지 마십시오. 그 하나님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하나님이 우리의 근본이요, 목적이요, 높이요, 깊이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한마디 고백으로 족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이렇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사시기 바람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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