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에스겔서 18:25-32
그런데 너희는, 내가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말을 하는구나.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는 잘 들어라. 내가 일하는 방법이 어찌 공평하지 않으냐? 너희가 하는 행실이 오히려 공평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 의인이 자신의 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죄를 짓다가, 그것 때문에 죽는다면, 그는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신이 저지른 죄에서 떠나 돌이켜서, 법대로 살며, 의를 행하면, 자기의 목숨을 보전할 것이다. 그가 스스로 깨닫고, 자신이 지은 모든 죄에서 떠나 돌이켰으니, 그는 반드시 살 것이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족속은, 내가 일하는 방법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을 하는구나.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일하는 방법이 어찌 공평하지 않으냐? 너희가 하는 행실이 오히려 공평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 각 사람이 한 일에 따라서 너희를 심판하겠다. 너희는 회개하고, 너희의 모든 범죄에서 떠나 돌이켜라. 그렇게 하면, 죄가 장애물이 되어 너희를 넘어뜨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지은 죄를 모두 너희 자신에게서 떨쳐내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왜 죽고자 하느냐?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가 죽는 것을 나는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아멘.
디모데전서 1:12-17
나는 나에게 능력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나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나에게 이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끝없이 참아 주심의 한 사례를 먼저 나에게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왕, 곧 없어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 무궁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15:1-7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니지 않겠느냐? 찾으면, 기뻐하며 자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아멘.
설교문
저는 예배에서 찬양을 하거나 들을 때 가끔 솔로몬 궁전도 이랬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성경에 보면 솔로몬시대는 아름다움을 즐기고 만끽했던 시기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처음으로 통일한 왕으로 기초를 닦고, 통일된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솔로몬왕은 이를 바탕으로 문화·예술적으로 그 당시 중동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화를 이루었고,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이렇게 최고에 올랐던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합니다. 세상 역사는 그런 것 같습니다. 솔로몬 왕이 죽고 그 아들들 사이에 권력 쟁탈이 벌어집니다. 이로 인해 그 아름답던 솔로몬 궁전과 문화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로 나라가 분단됩니다. 이 분단이 무엇을 가져 왔는지 아십니까? 바로 주변 강국들의 침략을 가져왔습니다.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이 BC 721년 앗시리아 제국으로부터 멸망을 당합니다. 남 유다왕국은 겨우 목숨을 보전했습니다. 그러나 외형상으로는 독립을 유지했지만 내적으로는 앗시리아 제국에 조공을 받쳐야 했습니다. 유다는 150년을 식민지 아닌 식민지로 지냅니다. 그 다음 앗시리아 제국은 바벨론에게 망하고, 북 이스라엘은 자동으로 바벨론 제국의 속국이 됩니다. 바벨론은 급기야 남왕국 유다를 식민지화 합니다. BC 586년의 일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초토화되었읍니다. 앗시리아는 지금의 시리아, 바벨론은 지금의 이라크입니다. 바벨론은 다시 페르시아(현재 이란)에게 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또 다시 페르샤의 속국이 됩니다. 급기야 흐랍제국을 거쳐 BC 63년 부터는 로마제국의 속국이 됩니다. 누가 지배자이던 이스라엘은 분단이라는 현실 앞에서 쓰디쓴 고배의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성경말씀을 읽어보면 나라의 분단으로 인해 정치적/경제적 힘을 잃었고, 자연스럽게 온 나라가 결집할 힘과 중심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힘도 반 토막이 났습니다. 예언자들이 하는 말입니다. "너희는 타락했다. 나라가 망했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근본인 하나님을 신앙하는 정신적인 힘도 잃었다. 하나님도 일었다"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믿는 신앙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가 되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그 하나님은 하늘에 사시는 분이 아니라 피조물인 우리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사신다. 보이지 않지만 인간이 사는 집에도, 사회에도, 나라에도 온 세상 우주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사신다. 특별히 하나님을 보고 당신을 믿는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같이 살고 있는 부부끼리 왜 사랑하는지 확인하자고 하면 우습지 않나요? 사랑으로 맺어진 부모와 자식 사이에 사랑하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나요? 이와 같이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존재 자체가 신앙이고 사랑이며,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 자체가 삶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은 사는 것 자체이며, 그 믿음을 히브리어로 ‘에무나’(Emuna)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랑하며 사는 것,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기 때문에 자기가 실수하면 하나님은 심판하시고, 잘하면 칭찬하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생활 속의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에무나의 믿음을 말씀하셨는데 신약성경에서는 그 믿음을 헬라어로 ‘피스티스’(Pistis), 즉 신앙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 의미는 병자가 낫는 것을 보고 믿는다. 성경말씀을 읽고 나서 깨달아 믿음이 생긴다.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여 깨어난 확실한 증거를 보고 하나님을 믿는 다는 식의 "믿음"인 것입니다. 헬라사람들은 무언가 확실한 증거를 보고, 경험하고, 체험함으로써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본래 그것을 믿음이라고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는 ‘에무나’를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보고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는 말은 특별한 약을 사용해 병을 낫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살고, 하나님을 부르면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네가 가졌으니 참 좋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이렇게 같이 살고, 호흡하고, 사랑하고,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백성이 하나님과 같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망한 이유는 힘이 없어서입니다. 그 힘은 두 나라가 갈라진 분단으로 없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백성을 받치고, 엮어내는 중심 축인 하나님이 없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인간 밖의 신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혼이고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전부입니다. 가장 깊은 곳이고, 가장 넓은 곳이고, 가장 높은 곳입니다. 높이와 넓이, 그리고 깊이가 없으니까 사람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형편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힘이 없고 약할 때 주변 열강의 전투장이 되었고, 희생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분단되어서 힘이 빠진 것이 아니라 주변 강대국들오 부터 희생을 당하다 보니 일본의 식민지로 살았고, 이후로 다른 강대국들의 힘을 빌어 식민지로 부터 해방되었으너 미국과 쏘련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이 되었습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현재의 동북아 정세도 만만치 않습니다. 지금 북한은 일본과 가까워 졌고, 우리는 거꾸로 중국과 가까워졌습니다. 이로 인해 염려도 많이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민족이, 우리나라가 살길은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역사의 혼이 없는 일본과 달리 우리는 역사의 혼이 힘으로 작용합니다. 과거는 솔직하게 고백하고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물건을 만들 때 중국처럼 가짜상품을 만들면 안 됩니다. 우리는 진짜 진품을 만들어서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물건만이 아니라 마음도 그렇게 써야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힘 있게 살 수 있는 것은 물건의 힘이 아닙니다. 외형적으로 보이는 힘이 아니라 그 안에 담고 있는 생명의 힘입니다. 그 힘이 있으면 우리는 힘 있는 민족이 그리고 나라가 된다고 믿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힘을 가집시다. 그 힘은 우리가 가진 정신, 철학, 도덕, 그리고 윤리의 힘입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보이지 않으나 영원무궁하신 하나님의 힘, 신앙의 힘까지 더하면 동북아에서 우리나라는 힘 있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나라, 역사와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갑시다.
오늘 예수께서 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힘 있게 사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충고하겠다. 지금 우리 가운데 잃은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 잃은 양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이 질문에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예수가 우리가 버린 양으로 취급한 죄인과 세리를 잃은 양이라고 하며 끌어 들여 함께 밥상에서 먹고 마신다고. 이게 무슨 뜻입니까? 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죄인과 세리는 잃어버린 양이 아니라 실은 자기들이 "버린 양"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경제사회적인 이유 때문에 못 지켰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그들이 버린 양이 곧 잃어버린 양입니다. 그 양을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데려다 놓아야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직접 말씀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복음의 눈으로 본 잃은 양입니다. 율법을 핑계로 모든 백성을 하나로 끌어 모아 하나님 나라 잔치를 벌려야 할 우리안에 백 명을 채우지 못하게 하는 그들이 오히려 잃은 양이라고 여기십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율법의 눈에 가려 이런 사실을 잘 모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벽을 헐고 복음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당신들도 하나님 나라의 "우리"안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에스겔서 말씀을 상기했을 것입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을 때 얼마나 힘들어 살았겠습니까. 망하는 집안과 흥하는 집안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불평을 합니다. 망하는 집안의 아버지가 저렇게 흉악한데 아들을 잘 살고 있습니다. 아니 저 아버지는 굉장히 선한사람인데 왜 아들은 잘 살지 못합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모가 자식의 죄를 뒤집어 써야 합니까? 반대로 자식이 부모의 업보를 짊어져야 합니까? 하나님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집의 모든 사람은 각자가 자기 책임을 지고,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 부모에게 핑계 대지 말아라. 부모는 자식들에게 핑계 대지 말아라. 어떤 법이, 윤리가, 도덕이 마치 연좌제처럼 되느며 질책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구원을 받고, 받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부모님 빽으로 하나님 나라 갈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식 빽으로도 구원 받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각자 자기 맡은 일을 스스로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라고 회개하고 돌아서면 기뻐서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눈에 비친 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잃은 양인데 이 잃은 양들이 구원 받지 못하면 이스라엘 전체가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사장도, 바리새인들도, 그리고 우리도 어깨에 지고 올라가십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버린 세리와 죄인을 어깨에 지고 우리로 돌아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율법은 버립니다. 그러나 복음은 데려옵니다. 이것이 율법과 복음의 큰 차이입니다. 예수께서는 잃은 양을 데려와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늘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고백과 간구입니다. 내가 지금은 주님의 제자이고 사도이지만 이전에는 괴수였습니다. 주님, 회개하오니 주님의 우리로 받아주십시오. 이렇게 회개한 사도바울 때문에 오늘과 같은 기독교가 존재 할 수 있습니다. 한 죄인이 회개한 것이 회개하지 않은 의인 아흔아홉 사람보다 훨씬 더 좋게 여긴다는 말씀을 여기서 이해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의 복음의 대상자가 죄인이라면 회개시켜서 우리안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보면 잃은 양이 어떤 신분의 사람이며, 어디 출신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잃은 양이 천하고, 배고프고, 못살고, 배우지 못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잃은 양입니다. 백성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가 잃은 양이라고 하면 그 나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군대의 지휘관이 잃은 양이라고 하면 그 부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와 같은 목사가 잘못하여 실족하면 교회 공동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공동체에 중심이 되는 사람이 정신과 혼을 잃으면 그 나라와 백성 그리고 공동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잃은 양을 판단하지 마라. 이 세상에는 많은 잃은 양들이 있고, 그 잃은 양 중에 하나가 회개하면 사도바울의 회개처럼 온 백성을 구할 수 있다. 만약에 그 잃은 양 하나가 실족하면 600만 유대인을 학살했던 히틀러가 될 수도 있다. 여러분, 잃은 양을 구해야 합니까, 아니면 그대로 두어야 합니까? 잃은 양을 구하지 않으면 공동체가 망합니다. 세계가 죽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자기에게 한 것이랍니다. 물론 큰 자에게 한 것도 자기에게 한 것이랍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이 땅이 구원 받으려고 하면 우리들의 우리에 버린 양은 없어야 한다면서 말씀하십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살려서 생명의 공동체를 만들어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인이 크다고 생가 할수록, 돈과 권력을 많이 가졌다고 생각할수록 잃은 양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저 혼자만 죽고 사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로 인해 온 백성이, 온 공동체가 살고 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면, 하나님의 혼을 버리지 않고 깊게 가지고 살면 우리 모두가 구원 받고, 아흔 아홉도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이 초대장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용서함 받아 새 길을 갈 수 있도록 힘 주십니다. 우리는 그 힘을 길러야 합니다. 힘의 원천은 정신, 윤리, 도덕 거기에 더해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행복하고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잃은 양이 구원을 받고, 그 후에는 구원받은 잃은 양이 거듭나서 온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보냄을 받습니다.
잃은 양이 되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와서 본인의 본래 사명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있는 많은 잃은 양들이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니것입니다. 함께 와서 우리안을 가득 채우자고 하십니다. 그렇지 못하면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이 행복을 받기 위해 잃은 양을 데려오십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호흡을, 의를, 사랑을, 인자하심을 버리지 마십시다. 만약에 잃게 된다면 우리는 죽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회개하고 다시 회복하십시다. 저는 우리나라가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사회도덕이 퇴락한 이유는 우리가 처음 받은 하나님의 혼, 참 인간의 모습, 진실의 모습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다시 찾는 일이 구원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 하나님은 우리의 깊은 곳에, 우리의 몸과 혼의 가장 위에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십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우리안을 가득 채우십시다.
이제 성만찬 예식에 동참하십시다. 상징적인 신앙행위입니다만,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하늘나라 우리에 모이는 잔치상입니다. 새 힘을 얻으라고 그리고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안을 가득 채우라고 떡과 잔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혼을 담은 예수님의 구속의 "몸",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죄 사함의 능력을 상징하는 예수님의 "보혈"을 먹고 마시어 힘을 얻고 새 나라를 만듭시다. 이 성만찬 상에 마련된 생명의 "떡"과 "포도주"를 마시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자 축복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