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창세기 12:1-4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 아멘.
고린도전서 1:18-25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현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5:1-11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셨다. 그 때에 무리가 예수께 밀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예수께서 보시니, 배 두 척이 호숫가에 대어 있고,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 배 가운데 하나인 시몬의 배에 올라서, 그에게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 놓으라고 하신 다음에, 배에 앉으시어 무리를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말씀을 그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이 잡은 고기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놀랐던 것이다. 또한 세베대의 아들들로서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뭍에 댄 뒤에,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아멘.
설교문
오늘도 무더운 여름날입니다. 우리는 이 더위를 극복하기 위해 휴가를 떠나기도 합니다. 휴가를 떠나시는 분들은 편안하게 잘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제가 독일에 있을 때의 휴가철 경험입니다. 휴가철만 되면 도로가 막힙니다. 각 주별로 방학하는 날을 다르게 해서 도로밀림 현상을 줄이려해도 모든 도로가 항상 꽉 막혀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휴가 가는 것을 보면서 휴가가 사람을 즐겁게 하고, 또 휴가 후에 새롭게 충전하여 일을 더 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고 느끼기 까지 몇 년이 걸렸습니다. 이것을 느끼기 이전까지는 저에게 휴가는 방안에 콕 박혀있는 "방콕"이었습니다.
휴가 중에는 여러 종류의 휴가가 있는데, 잠깐 밖에 다녀오는 휴가가 있죠. 갔다 다시 돌아 올 수 있기 때문에 아주 편하고 좋습니다. 그런데 휴가 중에는 다시 못 돌아오는 휴가가 있습니다. 스님들은 한 번 휴가를 떠나시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출가’라는 이름의 휴가입니다. 가정을 떠나 사찰에서 평생을 살면서 부처님의 법도를 전합니다. 또 저희 형제교회인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도 한 번 출가하면 다시는 집에 못 돌아오고 성당이라는 큰 집에 있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합니다. 돌아오는 휴가는 별 준비 없이도 되겠지만 못 돌아오는 휴가에는 엄청난 조건이 뒤따름니다. 떠나서 정착해야 하는 곳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출가를 명하는 사람이 확실한 신뢰가 담보되는 분이셔야 합니다. 마음의 감동을 받아 출가를 하건, 명을 받아서 출가하건, 출가하라는 분이 분명해야 하고, 가서 정착할 곳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출가 할 수 가 없습니다. 가출은 자기 멋대로 갔다가 오는 것인데, 출가는 생명을 담보로 하는 뜻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쉽게 말하면 이런 것 같습니다. 신앙인들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항상 이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을 함께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의 일에는 관심하지 않고 땅의 일에만 관심하는 사람은 굳이 신앙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듯이 신앙은 하늘과 땅을 함께 생각하는 결단이요 결단의 삶이라 할 수 있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늘이라는 세계, 공간, 시간을 이 땅에서 경험 할 수 있습니까? 오늘 창세기 말씀은 "출가"를 통해 하나님의, 하늘 아버지의 가르치심을 경험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람의 조상들이 하란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합니다. 하란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흐르는 지역의 동네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라크에 속한 지역입니다. 아브람은 이곳 하란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고향을 떠나라!".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출가"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 명령을 받았을 때가 그의 나이 75세 이었습니다. 물론 아브람이 175세까지 살았기 때문에 그의 절반쯤 되었을 때 출가하라는 명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 명령을 받을 때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더 큰 가족을 이루면서 살게해 주겠다는 약속이 딸린 명령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람은 고향을 떠납니다. 이와 함께 이 명령에 복종함으로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명령에 담긴 역사적 약속들을 경험합니다
출가한 아브람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는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인 명하는 곳, 즉 번성하며 복 받고, 온 세계의 축복이 충만 할 곳이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는 이 약속 하나 만을 믿고 75세에 고향을 떠납니다. 여러분 아브람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75세 나이에, 아니 지금의 평균 수명으로 보면 40대 중반쯤 되었을 때 고향을, 직장을, 우리가 살던 곳을 떠나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절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명령을 받았다면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읍니다. 우리에게 이 명을 하는 분은 누구이신지? 그분이 말씀하시는 종착지에 대해 확신이 가는지? 우리가 평생을 헌신할 수 있는지? 이것들을 확인하고 내리는 신앙결단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말씀을 읽으면 아브람 말고도 떠나라는 명을 받은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들을 남의 이야기로 보지 마시고, 바로 우리 한사란 한사람의 이야기로 생각하고 이 말씀들을 새겨 들으셔야 합니다.
아브람이 떠납니다. 아내도 함께 떠납니다. 그 후 24년이 지났읍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시험합니다.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은 이제 이 사람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가도 되겠다고 생각하십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약속이 실질적으로 시작 됩니다. 그 약속의 시작은 자녀가 없던 사래에게 자녀를 허락한 것입니다. 아브람의 나이가 99세 일 때 그의 아내 사래의 나이는 89세입니다. 사래는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고, 그 이듬해에 아이를 낳았읍니다.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이 바뀝니다. 아들을 데리고 하나님이 명한 곳으로 갈 때, 이제는 아브람 가족이 아니라 온 세상을 끌어안는, 온 세계를 끌어안는, 우주를 끌어안는 큰 가족의 조상이 되는 뜻으로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뀜니다. 이렇게 해서 한 가정의 자애로우신 아버지, 훌륭하신 가문의 조상인 "아브람"이 아니라 온 백성의 조상이라는 뜻의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때 일입니다.
90세에 아이를 낳은 사래도 이제 이름을 바꾸어 온 백성의 어머니라는 뜻인 "사라"로 이름이 바뀜니다. 이렇게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을 낳고, 함께 지금의 가나안 땅으로 떠납니다. 떠나 보내실 때 하나님은 반드시 인간을 새로 바꿔서 떠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조상은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민족과 역사를 초월한 모든 사람들의 조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명을 받아 떠나는 사람이요, 그래서 신앙의 아버지가 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도 온 백성의 어머니가 됩니다. 이렇게 외형적인 이름의 변화는 떠나는 사람에게 주시는 결단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내 가족이 아닌 더 큰 가족, 큰 사회, 큰 나라, 더 나아가 온 세상을 위해서 살겠다고 결단하면 출가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출가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출가를 하면서 하늘 세례를 받고, 이름도 바뀝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된것은 떠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직접 가지 못했지만, 그의 자손들을 통해 가나안 땅에 입성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입성하기 까지 그 자손들은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400년 이집트 종살이와 40년 광야 생활을 통해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이 때에도 온 세상 백성과 함께 하는 축복을 주시겠다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가나안 땅의 삶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렇듯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확신하는 한 이스라엘 백성은 단순히 유대 땅에만 국한 된 백성이 아니고 온 세상을 구원할 백성으로 선택받게된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런 약속을 상기시킵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광야에서는 젖소와 양을 길러서 우유를 마실 수 있습니다. 젖소와 양은 풀을 뜯어먹고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푸른 초장이 있는 곳에서만 우유를 낼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 유목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양이 마음대로 풀을 뜯어 먹고, 젖을 짤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여기에 더해 꿀이 나오는 벌들이 있는 곳으로 보내주겠다고 하십니다. 벌들이 꿀을 만들기 위해서는 꽃과 봉우리를 먹어야 하고, 공기도 햇볕도 좋아야합니다. 사막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곳이 지상천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한반도 삼천리 금수강산에 사는 우리들의 눈에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막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지상낙원입니다. 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잘 못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끼리끼리만 둘러 앉아서, 유대인 가족들끼리만 오손도손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온 세계를 구원 하는 백성으로서 앞장서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주신 율법도 자신들 만을 위해서 준것처럼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온 백성을 위해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래의 뜻과는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들, 온 백성을 위해 살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이 유예가 되고 말았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수많은 벌이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이 결단하십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이제는 사람을 출가시켜서 하나님 나라 만드는 일을 그만 두어야하겠다. 실패를 너무 많이 하셨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결단하십니다. 차라리 하늘 문을 열고 내가 출가하여 땅으로 가야겠다. 누구든지 특별한 "사람"을 보내는 일을 이제는 그만하겠다. 예언자를 보내는 일도 그만하겠다. 내가 직접 고향 하늘을 떠나 내가 창조한 세상 나라로 가야겠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출가시켜 보낸 분입니다. 그 분은 자신의 분신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하십니다. 제자들을 뽑고 가르쳐야 했읍니다. 갈릴리 바다를 걷고 있는데 어부들이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명령하십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많이 잡힐것이다". 이 말의 뒷면을 생각해 보면 어부들은 깊은 곳까지 들어가기 어려워 평소에는 낮은 곳에 그물을 던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을 따라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더니 배 하나가 아니라 두 첟에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읍니다. 그물이 찌어지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갈대와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내가 약속한 땅으로 가는데 그곳은 아주 먼 곳이다. 온 세상을 끌어안으려면 좁은 곳은 안 된다. 아주 먼 곳, 넓은 곳으로 가야 한다. 가는 곳이 넓다는 의미가 아니라 온 세상을 끌어안을 만큼 품이 넓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곳에 가면 온 백성을 위한 하나님 나라를 만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주 먼 곳, 넓은 곳에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깊은 곳에도 있고 또 그곳에 세워진다고 말입니다.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 사고의 깊은 곳, 양심의 가장 깊은 곳, 세계정신의 가장 깊은 곳에 하나님이 계시며 그 나라를 잉태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그 깊은 곳이 하나님 나라의 자리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잉태합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면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읍니다.
최근에 정부의 총리와 장관 후보자들에 관한 인사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제대로된인물들이 없다고들 난리입니다. 이것을 지켜보면서 생가나는게 있읍니다. 조금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뽑아 올려야지요. 얕은 물가에서만 뽑으려고 하니까 사람이 없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사권자가 편리한 대로, 편한 대로, 익숙한 방식 대로 주변만 뱅뱅 돌다가 찾으려 하니 다른 주변의 인물들은 보이지 않는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살아가는 방식만이 옳다고들 흔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얕은 물가의 삶에 속할 뿐입니다. 한 번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시죠! 이 세상은 깊은 곳이 많습니다. 넓은 곳도 많습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더니 자신이 모르는, 그러나 귀한 고기들이 수두룩합니다. 그 고기들은 수많은 효용가치와 가능성들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는 못하지만 그곳 깊은 곳에서 건져낼 수 있는 훌륭한 물고기들이 있습니다. 고기 분량도 풍성히 잡을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익숙한 한 곳에 머물지 말고 조금은 낯설지 모르지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고. 그곳에서 무한한 종류의 수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그대들은 단순히 고기 많이 잡는 법을 가리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을 통해서 온 땅의 깊은 곳에 있는 무한한 인간들을 낚게하고 싶다고. 계속해서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깊은 곳에는 사람이 많다. 배고픈 사람, 배부른 사람, 힘든 사람, 평안한 사람,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이렇게 다양하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라. 얕은 물가에서만 놀지 말라.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말라. 깊이 가봐라. 생각을 좀 더 깊이 하면 세상이 달라 질 수 있다. 사고방식을 조금만 더 깊이 해라. 왜 이렇게 얕은 곳에만 그물을 던지면서 서로 싸우느냐. 이런 겻려의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해서 깊이 조금 더 깊이 생각 합시다. 조금 배웠다고 떠들지 말고요. 조금 가졌다고 우쭐하며 자랑하지 마시고요. 조금 깊이 생각해 보시죠. 조금 더 깊이 인생을 살아보시죠 . 좀 더 깊이 하나님을 찾아보시죠. 조금 은혜 받았다고 떠들지 마시고요. 정말 깊이 말씀 속에 들어가 봅시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깊은 곳에 가야 하나님을 만나보라"고. 그래야 하나님의 진수를 맛보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깊은 곳으로 가라고 명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라 믿으시면 조금 더 깊게 믿어 보지않으시겠읍니까? 조금 더 깊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시겠읍니까? 나의 미래를, 이 나라의 미래를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보지요. 한 발자국만 더 느리고 높게, 아브라함처럼 한 스텝만 더 멀리, 어부들처럼 한 자만 더 깊게,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을 더 크게 받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것을 받아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하나님과 여러분 앞에서 고백합니다. 가장 넓은 곳, 깊은 곳, 저는 그곳을 다메섹 도상에서 찾았습니다. 제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저를 붙잡아서 눈을 못 보게 하고, 삼일 동안 감금시키면서 새로운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가 보았던 가장 깊은 곳은 사람이 죽는 ‘십자가’였읍니다. 가장 넓은 곳은 온 백성이 함께 죽는 십자가였읍니다. 저는 십자가가 넓은 곳인 줄 알았습니다. 가장 깊이 곳인 줄 알았습니다. 가봤더니 그곳에서 온 백성이 구원을 받습니다. 온 세계 백성이 모였는데 십자가 공로로 모두 구원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도 구원 받은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십자가가 가장 깊은 곳이요, 가장 넓은 곳입니다. 그러면 그곳은 죽는 것으로 끝나나요. 제가 보았더니 십자가 죽음 속에서 생명이라고 하는 부활이 생겨납니다. 십자가에서 생명이 태어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욕해도, 하나님은 우리 연약한 사람들을 돌봐주셔서 죽은 자를 살려 내십니다. 하나님의 힘이, 하나님의 능력이, 십자가에서 발현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고백의 말씀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도바울의 말을 빌리면 사람은 통상 인생의 학교가 있지만 마지막에는 다른 특별한 학교를 들어가야 합니다. 그 학교 이름은‘십자가 학교’입니다. 그 학교의 교장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 학교에서 아주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이 십자가 학교에 들어가면 졸업할 때는 용서 받은 의인의 졸업장을 받습니다. 죽은 자가 십자가 학교에 들어가면 부활이라는 생명 증명서를 받고 졸업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감히 생각을 못합니다. 그러나 다메색 도상에서 만난 예수께서 제게 십자가 학교를 소개하면서 저에게 들어 와 보라고 해서 가봤더니 저에게 죄 사함을 주시고, 생명을 주셔서 제가 오늘 사도로서 여러분 앞에 나와 고백합니다. 십자가가 가장 높고, 가장 깊고, 가장 넓은 곳입니다. 이곳에 오시면 부활이라는 선물을 받습니다. 새로 태어납니다. 악한 역사가 선한 역사로 바뀝니다. 땅이 하늘로 뒤집어 집니다. 이 역사가 바로 부활의 영광이고, 이것이 바로 십자가 학교를 졸업할 때 받는 졸업장입니다. 이런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셔서 자기 제자를 택할 때 왜 아주 무식한 어부들을 택하셨을까요? 성경말씀에도 제자들을 무식했다고 했어요. 공부를 안했어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데 그 사람들을 십자가 학교에 집어넣어서 완전히 지혜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냈어요. 이분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기록된 책이 4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입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조금 안다고 잔꾀를 부리는 사람들을 제자로 썼더라면 그런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순박하게 전했을까요? 자기 멋대로 각색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내 말을 있는 그대로 전해라.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담대하게 전해라고 하셨죠.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제자가 무식했다고 했는데요, 무식했지만, 아니 오히려 인간의 잣대로 보아 무식했기에 훨씬 순박해서 십자가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서 오늘의 4복음서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진짜 무식한 자가 하나님의 성령을 받으면 하늘의 유식함을 받아 이렇게 하늘의 음성을 곡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합니다. 예수님의 뜻이 인간들 보기에는 연약하고 무식하다고 해도 하나님의 십자가 학교를 졸업하면 거듭나서 하늘의 음성을 있는 그대로 전합니다. 우리 모두 하늘 음성을 곡해하지 맙시다. 들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있는 그대로 받는 순박한 신앙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무식한 사람이 아닙니다. 당대 최고의 학자입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고, 자격증과 바리새파 소속 증명서도 받은 아주 훌륭한 지성인이며, 지혜가 뛰어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어떻게 사용했을까요? 아까 순박한 제자들을 통해서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게 하시고, 아주 많이 배운 지혜가 충만한 사도 바울은 십자가 학교 교육을 통하여 인간과 사고와 행동을 완전히 근본적으로 바꾸시고,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신학적으로 잘 분석하고 파악해서 제대로 전달하게 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에게 주신 재능과 성품을 하나도 버리지 않으시고, 다 받아드려서 하나님 뜻에 맞게 항상 새롭게 쓰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는 것에는 차이가 많습니다. 가진 것에도 차이가 많습니다. 사고방식도 그렇습니다. 차이가 있는 것을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덜 가졌다고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것을 그대로 받으셔서 십자가 학교에 입학시켜서 가르치신 다음에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하나님이 알아서 사용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진것의 소유주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신분의 뜻을 따라 선하게 쓰고 관리하는 청지기 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 당신이 알아서 저를 활용해 주십시오"라는 간구와 기도입니다. 우리가 받은 것은 그래서 은총이고, 은혜입니다.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겠습니다라고 약속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대에게 복을 주어 이 땅 끝날 때까지 온 백성을 내 구원의 나라로 이끌어 오도록 늘력을 주마. 이 은총을 풍성히 받을 지어다". 여러분, 이 크신 은총 풍성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