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예레미야서 1:4-10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 내가 아뢰었다. "아닙니다. 주 나의 하나님,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직 너무나 어리다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그에게로 가고, 내가 너에게 무슨 명을 내리든지 너는 그대로 말하여라. 너는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해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런 다음에,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고,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 아멘.
베드로전서 4:7-10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각 사람은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봉사하십시오. 아멘.
마태복음서 7:24-27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아멘.
설교문
오늘 우리는 8.15 광복절 기념 주일을 맞아 감회가 새롭습니다. 저는 해방/광복 절 예배를 드릴 때 마다 의식적으로 출애굽기의 말씀을 읽게 됩니다. 출애굽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400여년 동안의 이집트 식민지 생활에서 해방된 기쁨, 이 기쁨 속에 담긴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뜻,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결단, 이 모든 것이 나와 있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이야기만 성경책에 기록되었을까? 우리나라의 출애굽인 해방의 역사는 성경말씀에 기록할 수 없을까? 우리가 지니고 있는 성경은 이미 기록이 끝난 것이기 때문에 또 다시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 신앙인들의 마음속에는 "출애굽기"를 이스라엘의 출애굽기로 읽는 것으로 족하지 말고, 그 정신을 받들어 우리 민족의 출애굽기인 해방역사, 해방의 기쁨,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은총, 우리의 마음 속의 감사의 결단을 담은 "우리들의 출애급기"를 씁고 읽읍시다. 그리고 감사하며 삽시다. 이렇게 하는 것이 8.15기념 주일의 뜻일 것입니다. 그것을 하지 않고 옛날 역사만 이야기하고, 우리끼리만의 민족적 역사로 이야기하고 축하하는 것으로는 감사주일 그리고 기념주일이 될 수 없습니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양 사십년의 준비 기간동안의 지긋지긋한 고생을 겪은 다음에 가나안 땅으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형편좀 살펴 보실래요? 우리는 우리를 식민지배 하던 일본이 망하면서 동시에 해방을 받았습니다. 과거에 이집트는 망한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만 해방되어 빠져나왔을 뿐입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라 믿고 지금까지 살고 있읍니다. 우리나라는 일본 식민지에서 벗어난 것만 가지고도 고마워해야겠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식민지배한 일본이 망해버렸습니다. 이런 역사를 보면서 동북아에서 일어난 출애굽 사건은 중동에서 일어난 사건 보다 훨씬 의미가 깊고 또 뜻이 묘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며 오늘 8.15를 기념해야 합니다.
"8.15"는 무슨 날인가요? 숫자로 말하기는 쉽고 동일한데 이 말을 하는 각 나라의 입장이 다릅니다. 우리나라는 ‘광복일’이라고 합니다. "흙 다시 만져 보자", 이제야 우리 흙을 내가 만져 볼 수 있게되었읍니다. 빼앗긴 땅에도 봄은 오니까요. 봄이 왔지요. 빼앗긴 "바닷물도 우리 앞에서 춤을 추니까요". 그것이 출렁거립니다. 이것이 광복입니다. 헤어졌던 민족이 서로 사랑의 가슴으로 만날 수 있으니까. 그게 광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광복절 노래를 기쁘게 부릅니다. 우리는 이 날을 광복, 또는 해방, 이렇게 부릅니다.
중국은 ‘중일전쟁 승리 기념일’이라고 합니다. 중국은 1984년 청일전쟁에서 패했습니다. 이제는 중일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의미 일 것입니다. 그래서 전승 기념일입니다. 일본에는 두 종류의 용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피해당한 나라에 참 미안하고 피해도 많이 끼쳤고, 위안부 문제도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용어로 ‘패전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배했습니다. 일본의 파쇼주의도 패배했습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서도 패배했습니다. 따라서 일본에 책임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날을 패전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그룹은 "우리 천황께서 전쟁 와중에 엄청난 고통과 마음의 아픔 안고 살아가는 우리 일본의 신민들이 당하는 고통을 보시고, 마음을 위로할 겸 성덕을 베푸셔서 전쟁을 끝내셨습니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 날을 ‘종전일’이라고 부른답니다. 아베를 위시한 극우적 민족주의자들이 8.15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제가 10년 전에 평양을 갔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996년 부터 밀어닥친 홍수로 북한이 극심한 곤궁에 처했을 때 한국에서 온 구호품인 쌀과 밀가루를 앞에 두고 저에게 북한교회 간부가 귓속말로 하는 말이 "남조선 쌀 고맙고요, 밀가루 정말 고맙습네다"라고 하더군요.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 하시오, 그랬더니 일반 백성들 한테는 "우리 수령께서 은덕을 베푸셔서 남조선에 큰 소리 쳤더니 남조선이 명령에 복종하여 쌀을 가지고 왔다`고 선전 합니다라고 하너군요. 제가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사실 뭐라고 말해도 "남조선 고맙습니다"라는 마음의 언어였읍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일본이 설령 전략상 정치적으로 천황께서 성덕을 베푸셔서 전쟁을 끝냈다고 말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미안합니다. 우리가 너무 죄를 지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라는 귓속말이 중요하다는 점을 말하려한 것입니다. 제가 일본에 가면 아직은 소수이지만 이 말을 가끔 듣습니다.
해방은 굴곡과 아픔, 그리고 억눌림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입니다. 지금 우리는 벗어났습니다. 그것이 해방의 뜻입니다. 또 하나의 해방이 있습니다. 해방은 벗어나는 해방이 있고, 벗어났으면 해방을 통해서 누린 자유와 기쁨을 그냥 가지고 있지 말고 그 기쁨과 자유를 땅에 심고, 물을 주고, 가꾸어서 나무로 자라게 해서 열매를 풍성하게 하여라는 열매맺는 해방 말입니다. 자유는 해방된 자유가 있고, 심어서 가꾸는 해방하는 자유가 있습니다. 해방도 벗어나는 해방이 있는가 하면 심어서 가꾸어 열매 맺는 해방이 있습니다. 오늘 69년 전 이야기를 해상하면서 지금 우리는 해방의 나무를 심고, 뿌리를 내리고, 가꾸고 튼튼하게 길러서 열매를 따 먹고 마셔야 합니다. 이 열매를 우리만 먹지 않고 우리 주변의 나라들과 전 세계가 함께 나누어 먹으면 더 좋지요! 그 열매는 자유입니다. 어떤 분은 해방을 가치로 보아서 평화, 공의, 정의라고도 이름합니다. 무엇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단지 먹고 마시는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혼자 먹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싸웠지만 일본과도 대화를 나누고 협력하며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중국과도 그래야 하고, 주변나라와도 함께 그리해야 합니다. 해방을 심고 가두려면 굉장히 튼튼한 자기 정리가 필요합니다. 일본은 이 해방을 패전이냐, 종전이냐를 가지고 엄청나게 나라가 뒤숭숭합니다. 중국은 옛날에는 아니었지만 이제는 아시아의 맹주로 자임하면서 "조선 사람들아 우리에게 오너라"고 손을 내밉니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들이 맹주였는데 왜 엉뚱하게 떠나느냐며 분기탱천해 있읍니다. 지금 동북아가 난리가 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해방의 기쁨은 컸지만 해방의 열매는 다시 눈물과 땀을 흘려야 이 열매를 거둘 수가 있음을.
마르틴 루터가 1517년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그 이후에 제일 먼저 쓴 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입니다. 내용은 대충 이러합니다. 종교개혁으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중세기 교회의 억압에서 해방 받았습니다. 우리가 얻은 자유는 이제 누구도 구속할 수 없는 자유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된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구속 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절대 주인이 되었습니다. 주인 된 자유를 얻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첫 열매입니다. 동시에 두번째의 선물이 있읍니다. 자유를 얻은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에게 복종하고, 그 분을 사랑으로 종노릇하며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자유의 또 다른 뜻이랍니다. 다시 정리해 봅니다. 해방 받아서요, 우리는 더 이상 섬길 주인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인입니다. 주인 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독립을 유지 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독립된 주인은 자기 백성을 자유의지로 사랑하고, 섬기고 아껴줘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자유한 사람의 속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오늘 실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해방의 은총을 받고 출애급하여 나왔습니다. 이 해방의 자유를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 열매맺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기로 했습니다. 이집트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복종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사랑의 자유로 섬기며 복음을 전합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 모두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탄도 그대들을 종살이 시킬 수 없다고 하십니다. 복음은 벗어나는 것입니다. 동시에 벗어난 사람은 새로운 땅에서 하나님 말씀을 땅에 심고, 물을 주어야 하는데 이제는 사랑으로 종노릇 하면서 섬겨라응 명령입니다. 갈라디아서5장 1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유함을 입었으니 다시는 종노릇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5장 13절에 가면 "자유를 얻은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신의 정육을 위해서 쓰지 말고 이웃과 함께 사랑으로 섬기고, 종노릇 하면서 자유를 누려야" 하낟고 하십니다.
누구도 여러분을 구속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자유를 에릭 프롬은 "벗어나는 자유"(freedom from) 라고 아주 쉽게 표현했습니다. 허나 얻은 자유는 씨앗이 되어 섬기고, 가꾸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을 프롬은 다시 "열매맺는 자유"(freedom to)라고 이름합니다. 오늘 8.15일 해방절을 맞았습니다. 69년 동안 우리는 벗어나는 자유를 많이 이야기 했습니다. 이제 그만 합시다. 이제는 저극적인 열매맺는 자유를 지향해야 합니다. 우리 백성의 삶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깊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가정의 깊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 사회 깊은 곳으로 가서 자유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고, 길러야 합니다, 그리고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합시다. 이렇게 하지 않고는 해방을 기념하는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국에 오셨는데요, 우리가 왜들 이렇게 열광하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개신교 중에 일부는 그것이 싫어 교황은 사탄의 무리라며 별별 이야기를 다하고 다닙니다. 그것은 온전한 판단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사도베드로를 축복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당신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에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너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할 사람이다. 너 베드로의 "이름은 모든 교회의 바탕이며, 반석이다"라고요. 헬라어로 베드로는 "반석, 바탕"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바탕이요, 바닥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그 이름이 베드로입니다. 천주교는 이 베드로의 전통을 교황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명령임으로 모든 교회와 세계의 바탕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 주장이 일부는 맞고, 일부는 꼭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뿐만 아니라, 그리고 베드로의 후계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실제로는 "베드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베드로가 되는 것입니다. 1세기에 베드로가 있었고, 15세기 베드로도, 21세기에도 베드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모두 베드로이기 때문입니다. " 베드로"(=반석) 위에 우리 자신의 미래를 세웁시다. 베드로 위에 우리 가정의 미래도 세웁시다. 베드로 위에 이 나라의 미래도 세웁시다. 앞으로 복된 미래는 출발이 중요합니다. 바탕이 있어야, 반석 위에 집을 세워야 그것이 복 받는 삶의 본분인 것입니다. 교회의 반석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처럼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이 전통을 교황이 이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는 옳습니다만, 교황 스스로가 유일한 베드로 후계자라 하는 것은 천주교 만의 주장일 뿐입니다. 그런데 천주교 직제상 반드시 교황은 위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해방시킨 그리스도의 구원을 자기가 먼저 받았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교황 그분을 열광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천주교 신자는 다르게 생각 할수도 있겠지만요.
제가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종교와 관련된 사건은 일반 매스컴에 한 줄 정도 보도될까 말까 합니다. 아무리 모여서 좋은 이야기를 해도 신문 방송에 잘 보도가 되지 않아요.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모든 언론이 경쟁이나 하듯 아주 특집으로 일관합니다. 교황이 오기 전부터 가신 후까지도 특집입니다. 카톨릭 국가도 아닌데 왜 이럴까? 제가 나중에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에 내려와 해방을 외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니까, 이 사람이 겸허히 하는 일을 보니까, 누구도 안가는 가장 낮은 곳에 가고, 아무도 보기 싫어하는 환자를 찾아가서 입 맞춤을 하고,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빈민촌에 가서 눈물을 닦아 주니까요. 얻은 자유와 기쁨을 인간의 정욕을 위해서 쓰지 않고, 사랑으로 종노릇하고, 섬기는 잁에 헌신하는 교황의 모습이 우리 국민 모두에게 이렇게 비쳐졌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바라는 리더십은 그런 것이다, 권력 있다고, 돈 있다고, 잘났다고 위에서 누르는 리더십이 아니라 바닥에 내려와서 세월호 눈물도 닦아 주고, 군대의 문제도 고쳐 주고, 사회에서 나쁜 생각하는 사람들 혼내주고, 눈물 닦아 주는 가장 높은 사람의 리더쉽"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가장 높으셨지만 가장 낮은 말구유 에서 태어나시고, 신적인 능력이 있었기에 고통을 피할 수도 피할 필요도 없으셨지만 예루살렘 성 밖의 골고다 언덕으로, 곧 누구도 가지 않는 해골만 득실거리는 곳으로 가서 매 맞고 죽으시면서, 가장 높은 자가 가장 낮은 자가 되시는 십자가의 구원의 진실을 보여주십니다. 그 예수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듯이 교황은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지금 우리가 바라는, 우리와 함께 하고 싶은 리더십의 모습일 것입니다. 단순히 종교계만이 아니라 이런 사람을 지금 우리 사회 구석구석이 원하고 있읍니다. 우리가 정말 이런 리더십을 정치나 경제나 모든 곳에서 보고 싶어합니다. 그런 리더십이 진짜 리더십이니까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리더십’ 입니다.
우리는 최근에 같은 시기에 또 하나의 리더십을 봅니다. 옛날 옛적 우리나라의 장군 이순신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명량>입니다. 이분의 일대기를 보면서 왜 이 영화가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는 가고 생각해 보니, 그것은 바로 이분의 덕목 때문일 것입니다.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충(忠)’입니다. 이 덕목은 임금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제일 먼저 백성이 있고, 백성이 있어서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으니 임금이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충의 핵심입니다. 저는 교회의 가르침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하나님 한테는 가장 낮은 사랑받는 백성이 있고, 그 다음에 교회가 있고, 교회가 있으니 교황이 있고 성직자가 있고, 다시 말하면 이 땅에 십자가로 구원 받은 백성이 있고, 백성이 있다 보니 예수그리스도가 계시고, 원초적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습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이순신의 ‘의’입니다. 장수의 의는 충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항상 백성을 향해있습니다. 그 충을 따르는 것이 장수의 의입니다. 교황의 인기는 어쩌면 그가 그냥 교황이 아니고 "프란체스코" 교황 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냥 명량이 아니고, "이순신"의 명량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헌신의 정신 속에서 "다시 세우자. 씨를 뿌리자. 물을 주자. 정말로 아름답게 다시 만들자. 위에서 지배하는 것 말고 아래서 섬기자"고 결단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려고 하십니다. 인간이 좋으려면, 가정과 공동체가 좋으려면, 교회와 나라가 좋으려면 바탕이 튼튼해야 한다고요. 바탕이 모래 밭이 아니라 바윗돌 이어야 한고요. 반석이어야 한다고요. 예수는 반석이고, 교황도 반석이고, 우리 모두도 반석이어야 합니다. 반석이 되어야 그 위에 있는 집이 바람이 불거나 홍수가 나거나 왜적의 침략을 받거나 어렵더라도 튼튼하게 섭니다.
우리는 그동안 반석을 생각하지 않고 아름다운 집짓기 만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성경말씀이나 모든 말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반석입니다.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에게 반석은 대들보와 기둥까지만 마련해주고 나머지는 인간에게 다양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벽을 만들고, 가재도구를 들여 놓고 색칠하고 꾸미는 것은 자유입니다. 예수님이 반석이십니다. 기둥입니다. 그 이외에는 우리가 그 위에 알아서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석과 기둥은 생각하지 않고 겉치레만 많이 합니다. 사고를 바꿉시다. 한 가지 깨달아야 합니다. 반석은 위에서 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반석은 밑에서 받쳐 줍습니다. 반석은 아래에 있습니다. 아래에서 튼튼히 받쳐 줍니다. 이 나라가 잘 되려면 이 나라의 뜻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해방된 조국에서 살고 있읍니다. 그럼 우리의 뜻은 이 민족의 뜻을 어디에 담았읍니까. 제가 보기에 헌법에 담았다고 생각 합니다. 우리나라 헌법에 보면 우리는 민주공화국입니다. 권력은 국민에게 나옵니다. 아까 명량에서 말하는 "충"과 비슷합니다. 교황이 아래로 내려 가셔서 섬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것이 본래 우리의 바탕이었습니다. 법치를 이야기하지요? 헌법이 제대로 되어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면 됩니다. 왜 지키지 못하느냐 하면 헌법을 종이위에 쓰여 진 것으로만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나라가 잘 되려면 국민들이 만든 헌법을 가슴속에 쓴 살아 있는 편지로 알고 지키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의로운 법치가 됩니다. 다시 우리가 합의해서 헌법을 만들었으면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주권을 생활 속에서 실천합시다.
8.15일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본 것입니다. 이 땅을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해방된 자유와 열매 맺는 자유를 주셨는데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기에 그렇습니까? 성경이 하나님 뜻입니다. 한 나라의 말씀이 헌법이라면 우리 신앙의 헌법은 성경입니다. 성경말씀은 그냥 인쇄된 책이 아니고요, 그 성경말씀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가슴으로 끌어안고 살아야 할 책입니다. 박물관 가보셨습니까? 유명한 책들을 전시회 놓은 것 보셨지요? 인쇄되어 바로 나온 책이 전시된 것 보신 적 있으십니까? 전시된 책을 보면 누더기가 된 책, 손때가 진하게 묻은 책, 읽는 사람과 쓴 사람이 많이 읽어서 책갈피에 때가 묻은 책입니다. 그 책가지고 매일 매일 살아서 험상궂게 일그러진 책들이 박물관에 전시되는 책입니다. 인쇄소에서 바로 나온 책은 값이 있는 게 아닙니다. 성경책은 그냥 집에만 모셔두는 책이 아닙니다. 심방을 가서보면 그런 경우를 꽤 보았습니다. 또 어떤 분은 말씀에 빨간 줄, 파란 줄로 줄을 쳐 놓습니다. 그런 책은 사람의 가슴에 쓴 하나님의 영으로 쓴 말씀으로 본 때문입니다. 그냥 인쇄된 책은 돌 판에 쓴 율법과 같은 말씀의 인쇄본입니다. 헌법이나 하나님의 말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말씀처럼 살면 8.15일은 해방 받은 날 만이 아니라 앞으로 해방해야 날 입니다. 우리 다시 삽시다. 8.15일은 1년에 한 번이 아니고, 저는 매일 해방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성경말씀은 매일 때가 묻었으면 좋겠습니다. 사건마다 때가 묻었으면 좋겠습니다, 줄치고, 상처 났으면 좋겠습니다. 영으로 쓴 말씀이니까요. 예레미야가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 제가 말을 할 줄 몰라서 이 백성들에게 예언 할 수 가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네 입술에 내 말씀을 담아라. 그 이야기만 하면 너는 모든 백성들에게 가서 내 말로 사람과 동네를 뽑고 헐고 멸망시키고 파괴할 수도 있다. 동시에 내 말을 하면 뿌리고, 가꾸고, 열매 맺게 할 수 도 있다"고. 반석이 된 베드로가 예수님 섬기고 나서 그 분이 돌아가신 후에 이런 말을 오늘 본문인 베드로 후서 본문을 통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러분 구원 받는 길은 마지막이 될 수 있으니 정신 차리세요. 그전에 뜨겁게 사랑하세요. 그 사랑으로 서로 봉사하세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라고. 그것이 바로 삶의 가슴속에 쓰여진 살아움직이는 성경입니다. 그것이 반석입니다. 그런 사란이 반석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반석이 된 여러분에게 항상 크신 축복으로 임재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