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봄 세계의 이목은 미국에서 열리는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쏠린다. 비록 아카데미상이 세계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아카데미 수상작은 관객들의 취향을 크게 거스르지 않았고, 이에 전 세계 영화팬들은 오스카 트로피의 행방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아카데미는 이따금씩 귀족취향의 속물근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감독-각본-남우주연 등 주요 4개 부문을 수상한 톰 후퍼 감독의 <킹스 스피치(원제: The King’s Speech)>는 여러모로 아카데미의 귀족취향에 딱 맞는 영화다.
▲마이크 공포증에 시달리는 영국 왕 조지 6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킹스 스피치>의 한 장면. ⓒ영화 스틸컷 |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마이크 공포증으로 시달리는 영국 왕이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한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 배우들은 우아한 영국식 귀족 영어를 구사한다. 이야기의 얼개로 보나 출연 배우들의 면면으로 보나 아카데미가 작품상을 줄만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귀족취향의 속물근성을 뛰어 넘는 품격이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소재라도 가공하기에 따라선 훌륭한 보석이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조지 6세다. 그는 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부친이다. 그는 마이크 앞에만 서면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입헌 군주제 하에서 왕이란 존재는 아무런 실권도 없는, 그저 상징적인 국가 원수일 뿐이다. 이런 왕이 마이크 앞에서 말을 더듬는 광경은 코미디 그 자체다. 그래서 사실 소재만 따져볼 때 눈길을 확 사로잡는 매력이 없다. 오히려 그의 친형인 에드워드 8세의 로맨스가 훨씬 입맛을 당기는 소재다. 미국인 이혼녀와 결혼하기 위해 ‘왕노릇(Kinging)’을 포기한 에드워드 8세의 애정행각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세기의 로맨스’라는 찬사가 붙어 다닌다. 너무나 잘 알려져 식상할 정도다.
연출자인 톰 후퍼는 매력적이지만 닳고 닳은 소재보다 볼 품 없어 보이는 조지 6세의 이야기로 승부를 건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장점이라면 꽉 짜인 장면구조다.
조지 6세(콜린 퍼스)는 능력도 있고 배짱도 좋지만 마이크 울렁증 때문에 대중 앞에 서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시대상황은 그를 마이크 앞에 설 수밖에 없도록 몰아간다. 당시 독일은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호시탐탐 세계지배를 노리고 있었다. 특히 히틀러는 쉴 새 없는 연설과 대중동원으로 독일을 결집시키고 있었다. 강력한 외적에 맞서 나라를 지키려면 왕은 싫든 좋든 나라의 구심점 역할을 감당해 내야 했다.
▲마이크 공포증에 시달리는 영국 왕 조지 6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킹스 스피치>의 한 장면. ⓒ영화 스틸컷 |
이에 비해 언어 치료사인 라이오넬 로그(제프리 러시)의 처지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는 당시만 해도 변방 취급을 당했던 호주 출신이다. 그가 언어 치료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것도 아니었고 경력이라곤 고작 연극인 지망생이 전부다. 이 같은 신분격차에도 그는 왕 앞에 당당하다. 또한 남다른 관찰력으로 조지 6세가 될성부른 나무임을 일찌감치 눈치 챈다. 이에 그는 왕의 마이크 울렁증을 해소해주기로 마음먹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역전된 왕과 평민의 위계.... 대중매체 시대 정치인의 역할도 일깨워
이 영화의 장면구조는 이 대목에서 빛난다. 대개 왕은 ‘백성’을 내려다보는 위치인 반면 평민은 왕을 올려다봐야 하는 처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런 위계를 과감히 역전시킨다. 라이오넬 로그는 조지 6세를 내려다본다. 반대로 조지 6세는 라이오넬 로그를 올려다본다. 이런 구도는 말더듬이로 불안해하는 조지 6세의 내면, 그리고 왕의 열등감을 해소시켜주려는 라이오넬 로그의 강력한 의지를 동시에 드러낸다.
한편 말 더듬증 치료가 거듭될수록 왕과 리오넬 로그는 자주 서로를 응시한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할 때마다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이때 카메라는 과감한 클로즈업으로 두 사람의 감정의 동선을 파고 들어간다. 이 같은 화면 전개는 조지 6세가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정점에 이른다.
조지 6세가 전쟁을 선포하면서 영국 국민들을 독려하는 장면은 실로 감동적이다. 전쟁의 공포가 엄습하는 위기의 순간, 왕은 언제 마이크 울렁증에 시달렸냐는 듯 무척이나 결연한 어조로 국민들에게 침착하게(calm), 그러나 결연하게(firm) 국가적 위기에 대처해 줄 것을 호소한다. 리오넬 로그는 연설 내내 왕과 함께하면서 흡사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그의 연설의 강약을 조절해준다. 왕의 연설은 약 5분 정도 이어진다. 영국인들은 왕의 연설을 들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사실 이 작품의 핵심은 마지막 5분에 맞춰져 있다고 보아도 좋다.
▲마이크 공포증에 시달리는 영국 왕 조지 6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킹스 스피치>의 한 장면. ⓒ영화 스틸컷 |
조지 6세로 분한 콜린 퍼스의 연기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라이오넬 로그 역을 맡은 제프리 러쉬의 연기도 나무랄 데 없다. 두 배우가 나란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조연상을 수상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작품 <킹스 스피치>는 매력적이지 않은 소재를 가지고 아카데미의 귀족적 보수 성향을 훌륭히 만족시켜주는 동시에 보는 이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남겨준다.
이 작품은 또 대중매체 시대가 정치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안겨줬다는 점도 일깨워준다. 매스 미디어만 아니었어도 조지 6세가 구태여 마이크 앞에 설 이유는 없었다. 이제 정치 지도자들은 미디어에 익숙해져야 했고, 경우에 따라선 이를 적극 이용해 국민들의 마음을 붙잡아야 한다. 공개석상에 나와 참모들이 작성한 연설문을 그대로 읽기만 하는 국가 원수는 국민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기 십상인 시대인 것이다.
20세기 이후 등장한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연설의 달인들이었다. 물론 링컨 같이 대중매체 시대 이전에도 연설에 능한 지도자는 많았다. 그러나 만약 링컨이 지금처럼 미디어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면 그의 연설이 미칠 파장은 쉽게 가늠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아카데미의 선택은 쉽게 속물근성의 산물이라고 폄하할 수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