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통하여 깨닫고, 깨달아 세운다"

2026년 5월 24일 성령강림주일 설교

han_03
(Photo : ⓒ베리타스)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욜 2:28-32, 행 2:1-13, 요 16:12-15

설교문

[교회의 생일을 맞으며]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자, 그리스도교 교회의 생일입니다. 성령강림 사건으로 첫 교회가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을 우리 향린교회의 창립 주일로 지켰다면 오늘은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생일로 지키는 참으로 뜻깊은 날입니다. 우리는 생일을 맞으면 서로 축하하지요. 그러나 나이가 한 살 두 살 먹어가면서 나잇값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교회의 생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2000년 역사를 지닌 교회가 과연 오늘날 인류와 지구 생명체들 앞에서 그 연륜에 합당한 영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뼈아프게 물어야 할 때입니다.

오늘 저는 교회의 생일을 맞아 교회를 탄생시킨 거룩한 영의 사역을 되짚어 보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모습이며, 그들이 세운 새로운 공동체는 어때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교회가 탄생하기까지 숱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예언자라 믿었던 세례요한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로 기대했던 예수님조차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몇몇은 옛 생업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절망과 무력감의 늪에서 헤매던 이들에게 부활 사건이 일어납니다.

마태와 마가는 빈 무덤을 발견한 여인들에게 천사가 "갈릴리에서 예수를 볼 것"이라 말했다고 전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실제로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손수 밥상을 차리시고 "내 양 떼를 먹이라" 분부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갈릴리가 아닌 예루살렘이 주 무대입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고, 바로 거기에서 교회가 시작됩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종합적 안목을 요구합니다. 교회 탄생에 있어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모두 고려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갈릴리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우선 그들의 고향입니다. 그러나 고향이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첫 발걸음을 뗀 자리였다는 사실입니다. 일개 어부에서 사람을 살리는 새 시대의 일꾼으로 거듭난 곳,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고,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내쫓던 곳이 바로 갈릴리입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나려면 갈릴리로 가라는 천사의 조언은, 예수님과 함께했던 그 첫 마음, 첫사랑으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있지만, 당시 성전은 뿌리부터 부패해 있었습니다. 성전 지도자들은 예수를 모함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고,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은 스승을 죽인 도시, 두려움에 떨며 스승을 배신해야 했던 부끄러움과 절망의 자리였습니다. 갈릴리에서 성공의 환호성을 울렸다면, 예루살렘에서는 치명적 실패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바로 그 아픔의 장소에서 새로운 공동체 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갈릴리에서의 이룬 성취가 아로새겨 있고, 그 기억의 힘으로 절망의 도시 예루살렘에서 희망을 길어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요엘의 희망과 다락방의 사람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제1성서는 요엘서입니다. 요엘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종들에게까지 당신의 영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예언자나 제사장이 아닌 평범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주어진다는 이 예언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은 유대 땅에 닥친 엄청난 재앙 후에 선포됩니다. 요엘서 1-2장을 읽어보면, 유대 땅은 가뭄에다 극심한 메뚜기 재앙까지 겹칩니다. 세계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적은 수의 메뚜기 떼라도 하루에 2,500명 분량의 식량을 먹어 치운다고 하는데, 유대 땅에 유례없는 대재앙이 닥친 것입니다. 그러나 재앙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재앙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영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도 평안할 때는 오히려 시들해지기 쉽습니다. 평안할 때는 내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도 그렇게 살다가 이 엄청난 재앙을 겪고 나서, 그때 다시 자신들의 삶을 근본부터 되돌아봅니다. 그리고 이제 책에 쓰인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직접 체험하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예언자들에게만 모든 것을 맡겨두고 자기들은 한 발 뒤로 빠져 있던 자세를 회개하며,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하나님의 영을 받은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실의에 빠진 제자들은 예수님의 당부에 따라 예루살렘에 머물러서 성령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행 1:4-5).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말썽꾼"이요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예수를 처형했으니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란 잠시 일었다 사라지는 작은 돌개바람 정도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습니다. 예루살렘 어느 골목 다락방에 120여 명이 한마음으로 모여,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열정으로 기도하고 있는 줄을. 예수에게서 생명의 불꽃을 만난 이들이 그 불씨를 끝끝내 살려낼 줄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도 로마의 황제도 짐작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소통의 사건, 성령은 통(通)하게 하신다]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이들에게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이 세찬 바람처럼 불어옵니다. 하늘의 불길이 예수님이 남기신 불씨에 기름을 붓듯 각 사람 마음에 쏟아져 내렸고, 사람들의 입에서는 각 지방 언어들이 터져 나옵니다. 갈릴리 시골 토박이였던 예수의 제자들이 이전에 배운 적도 없는 언어들을 쏟아냅니다.

성령강림 사건과 성령 충만에 대해 다양한 이해가 있겠지만, 사도행전이 묘사하는 오순절 사건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소통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늘과 땅이 통합니다. 본문은 "세찬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리고, 불이 혀같이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묘사합니다. 여기에서 "바람"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 히브리어로 '루아흐', 곧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이 바람이 갑자기 세차게 왔다는 표현은, 사람으로는 예측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체험이 몇몇 개인에게만 임한 사적 체험이 아니라 모두에게 드러난 공동체적 체험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성령 체험은 너무도 자주 사적 체험으로 환원되곤 합니다.

또 '불길이 솟아 혓바닥처럼 갈라졌다'고 했는데, 불 또한 바람과 더불어 하나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모세는 불붙는 가시떨기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맞설 때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참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불은 악한 것을 태우는 동시에 열정과 담대함의 상징입니다. 성령은 제자들에게 뜨거운 열정과 담대함을 불어넣었습니다. 절망에서 일어났으나 갈 바를 몰랐던 그들에게 위로부터 임하는 지혜와 흔들림 없는 용기가 솟아올랐습니다.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는 거대한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에 맞서 싸우면서 엄청난 스트레스와 이단 정죄, 암살 위협 등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종 극심한 우울증과 영적 침체(Anfechtung)에 빠지곤 했습니다. 무척 지쳐서 집에 돌아온 어느 날, 아내 캐더린이 검은 상복을 입고 그를 맞이했습니다. "여보, 누가 죽었소? 왜 상복이오?" 아내가 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루터가 놀라 외칩니다. "누가 하나님이 죽었다고 말한단 말이오!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는 분이오!" 아내가 응수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당신은 어찌 이리 의기소침합니까?" 루터는 아내의 충고를 듣고 다시 종교개혁의 불길을 이어갑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살아 숨 쉬는 사람은 세상의 악 앞에서도 담대합니다. 첫 교회는 바로 이렇게 하늘과 통한 사람들의 담대함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소통의 사건, 사람과 사람이 통하다]

성령 임재의 두 번째 특징은 외국어 방언이 터졌다는 것입니다. 여러 나라 사람이 각자 자기네 언어로 복음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는 사실, 이것이 성령강림 사건의 두 번째 소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순절의 기적은 제자들의 입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듣는 사람들의 귀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성령은 말하게 하시는 영이시자, 동시에 듣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다른 사람의 언어를 알아듣게 하시고, 다른 사람의 처지와 아픔을 듣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은 사람은 말이 많아지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같은 한국어를 쓰면서도 통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같은 말을 쓰면서도 마음은 닿지 못하고, 정치적 입장이 다르면 같은 단어도 전혀 다른 뜻으로 들립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찬송을 부르고 같은 성경을 읽지만, 서로의 아픔을 듣지 못하면 우리는 통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은 바로 그 막힌 곳을 뚫으러 오십니다.

창세기 바벨탑 이야기에서는 언어가 갈라져 의사소통이 끊어짐으로써 인류가 분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의 임재로 분열된 인류는 화해의 길을 엽니다. 바벨이 분열의 사건이라면, 오순절은 회복의 사건입니다. 바벨탑과 같은 획일적 언어가 아니라, 다양성을 품으면서도 소통하는 회복의 언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비그리스도인을 만나 한국교회에 대해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기독교의 배타성을 비판합니다. 타인의 사정과 아픔에는 귀 닫은 채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독선적인 태도로 세상을 가르치려 든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대화가 단절되었기에 사람들은 더 이상 교인들과 마음을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칼 바르트는 거의 100년 전에 "그리스도인은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회의 문제를 신앙의 관점에서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 상당수는 성경도 잘 모르고, 세상도 잘 모릅니다. 사탄은 하나님 말씀, 시편 91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도 자기 욕망을 위해 말씀을 인용하면서, 제멋대로 살고 세상의 기본적 상식조차 어깁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도리어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가기 싫다"는 사람이 늘어났고, 교인들 때문에 도리어 하나님 말씀을 멀리하게 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우리는 싸우려고 드는 논쟁이 아니라 진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진정한 대화는 사랑의 마음으로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며,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상대에게 배우겠다는 의지입니다. 성령께서 사람과 사람을 통하게 하셨다는 것은, 곧 우리 안에 진정한 대화의 능력이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언어, 다른 처지, 다른 입장의 사람을 사랑으로 이해하려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성령의 마음입니다.

[통하여 깨닫는다 - 진리의 영]

이제 우리는 오늘 함께 읽은 요한복음 16장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신 후 보내실 또 다른 보혜사, 진리의 영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요 16:13)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파라클레토스"라 부르십니다. 파라클레토스는 법정에서 변호사로, 때로는 검사로 활약하는 조력자를 뜻합니다. 즉 성령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예수를 변호하시는 한편, 예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고발하시는 분입니다. 예수의 빈자리에서 예수의 말을 대신 전해주는 대변자이자, 박해 가운데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분이며, 삶의 구석구석에 개입하여 예수의 가르침대로 일일이 권면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성령은 한편 "진리의 영"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 진리는 예수이시고, 그래서 성령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사역에 관련해서만 일러주십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인은 다양한 종교 체험을 합니다. 병이 낫고, 신적 음성을 듣고, 예언도 하고, 모르던 언어가 갑자기 터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체험을 곧바로 성령 체험과 동일시하는 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첫 이단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고, 광신자들이 이런 신비 체험에 매몰되어 상식을 파괴하고 비합리적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성령 체험은 오늘 요한복음서가 분명히 보여 주듯 나사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 십자가와 부활,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정의에 부합하는 체험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체험이 성령의 체험인지는 그 체험이 사람을 더 사랑하게 하는지, 더 진실하게 하는지, 더 겸손히 듣게 하는지, 더 정의롭게 살게 하는지를 통해 분별해야 합니다. 한신대 류장현 교수는 한국교회가 한편으로는 광신적 성령 운동으로 "성령 중독증"에 걸려 있고, 그 반대편으로는 제대로 된 성령을 잊어버린 "성령 망각증"에 걸려 있다고 진단합니다. 정확한 진단입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서의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요 16:8). 성령은 개인 내면의 문제를 넘어 세상을 깨우치는 일과 연결됩니다. 많은 교회가 교회의 존재 목적을 개개인의 영혼 구원이라고만 강조하지만, 개개인의 영혼 구원이 필요한 까닭도 바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깨달아 세운다 - 에클레시아와 아가페]

깨달음은 단순히 깨닫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늘과 사람과 통(通)하여 깨닫게 된 사람은 이제 무엇을 합니까? 깨달은 사람은 새 세상을 세웁니다. 자기 자신을 세우고, 옆의 형제자매를 세우고, 마침내 사랑의 공동체를 세웁니다. 깨달음이 깨달음으로 끝나면 그것은 절반의 깨달음일 뿐입니다. 깨달은 자는 반드시 세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세워야 할까요? 먼저 무너진 마음을 세워야 합니다. 낙심한 교우의 손을 잡아 주고, 홀로 눈물 흘리는 이의 곁에 앉아 주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무너진 관계를 세워야 합니다. 오래된 오해와 상처 때문에 멀어진 형제자매에게 먼저 말을 건네야 합니다. 또한 무너진 삶의 자리를 세워야 합니다. 가난과 차별과 외로움 속에 밀려난 이웃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나누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남보다 높은 자리에 서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무너진 사람 곁에 있게 하십니다. 그리고 함께 다시 일어서게 하십니다.

나도 서고 남도 세우려면 신앙이 있어야 하고, 또 그 신앙을 성숙시켜 줄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처음 교회는 바로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고 빵을 떼며, 기도에 힘쓰며, 유무상통(有無相通)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그 삶은 주위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심지어 두려움까지 줄 정도였습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가 자기들 모임을 가리켜 쓴 말이 바로 "에클레시아"입니다. 에클레시아는 "불러 모으다"라는 뜻으로, 본디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에서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총회(民會)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자유민으로 구성된 도시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행정관을 선출하고, 재판을 진행하고, 법률을 제정하던 그 모임이 에클레시아였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면서 이 에클레시아의 전통은 점점 사라졌습니다. 옥타비아누스 황제는 거의 절대 권력을 잡고,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 자기를 '제1의 시민(프린켑스)'이라 부르며 공화정을 가장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평화의 시대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의 이면에는 잔혹함이 있었습니다. 검투사 약 1만 명이 경기장에서 싸웠습니다. 아프리카 맹수 약 3,500마리가 사냥 쇼에서 죽었습니다. 인공호수에서는 전함 30척이 동원된 해상 전투가 벌어졌고, 약 3,000명이 싸웠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누군가의 피와 죽음 위에 세워진 평화였습니다. 데카폴리스를 비롯한 제국의 변방 지역 백성들은 로마 군대와 행정망을 유지하기 위한 살인적인 세금과 부역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사회를 지탱하던 핵심 원리는 부유하고 힘 있는 자가 가난한 자에게 시혜를 베풀며 지배력을 행사하는 철저한 수직적 위계, 이른바 '후견인과 고객(Patron-Client)' 제도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생존을 위해 부호들에게 빚을 지고 그들의 호의에 기대어 철저히 종속될 수밖에 없는 억압적인 경제·정치 구조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임재로 탄생한 첫 그리스도인들의 '에클레시아'는 이 거대한 제국의 질서를 근본부터 뒤집는 파격적인 대안 공동체였습니다. 사도행전이 증언하는 '유무상통(有無相通)'은 결코 권력자가 빈자에게 던져주는 적선이나 시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 한 동지가 된 이들이, 신분과 재산의 장벽을 스스로 허물고 서로의 경제적 짐을 기꺼이 나누어지는 '동등한 환대'요 '급진적인 나눔'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칼과 창, 그리고 경제적 예속을 통해 억압적인 평화를 강요했다면, 에클레시아는 비폭력적인 사랑과 자발적인 돌봄을 통해 갈등을 넘어선 진정한 평화를 삶으로 살아내는 현장이었습니다.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 빚진 자와 억눌린 자가 한 상에 둘러앉아 동등하게 떡을 떼었습니다. 이 사랑의 연대야말로 제국의 심장부에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심는 가장 강력한 생명 운동이었습니다. 진정한 에클레시아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 에클레시아의 회원들은 함께 둘러앉은 그 식탁을 사랑의 잔치, 애찬(유다서 12절)이라 불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 13:35)라고 하신 말씀대로 자신들을 사랑하는 이들의 모임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마 오늘날 이 모임을 부른다면 '사랑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의 모임으로서 이들은 정말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2세기 초 기독교 철학자 아리스티데스가 교인들에 대해 쓴 글이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친절하고 겸손하게 삽니다. ... 과부를 업신여기지 않으며 고아들을 박대하지 않습니다. 가진 자들은 갖지 못한 자들에게 풍성하게 나누어줍니다. 객들이 오면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며 마치 자기 형제처럼 함께 즐깁니다. ... 그들 중 누군가 가난하고 궁핍한데 도울 여력이 없으면 그를 돕기 위한 금식기도회를 2-3일간 했습니다."(아리스티데스의 『변증서』) 로마 제국 백성들 사이에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며 유행어처럼 떠돌던 한 마디가 있었습니다. "보라, 저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가!"(터툴리아누스의 『변증론』 39장)

진리의 영을 받아 깨닫게 된 사람들이 세운 공동체는 바로 이런 공동체였습니다.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고, 서로의 탄식에 동참하고, 서로의 고통을 나누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사시는 자리이며, 거기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의 첫걸음입니다.

[소통 - 깨달음 - 세움]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펴본 거룩한 영의 사역은 한 흐름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먼저 소통입니다. 거룩한 영은 우리를 하나님과 통하게 하시고, 사람과 사람을 통하게 하시며, 우리 안의 깊은 곳을 바깥 세상과 통하게 하십니다. 막혀 있던 길이 뚫리고, 끊어졌던 관계가 이어집니다. 이 소통 속에서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진리의 영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죄와 의와 심판에 관해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십니다. 통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고, 깨닫지 못하면 다음 걸음을 뗄 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세움으로 이어집니다. 깨달은 사람은 자기를 세우고, 형제자매를 세우고, 사랑의 공동체를 세웁니다. 깨달음이 깨달음으로 그치지 않고 세움의 행위로 이어질 때, 비로소 그것이 참된 깨달음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서로 통하여 깨닫고, 깨달아 세우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임하시는 거룩한 영의 사역입니다. 그리고 이 사역의 처음과 끝은 결국 "사랑"입니다. 통함도 사랑이고, 깨달음도 사랑이며, 세움도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그 한 가지 계명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 향린교회가 당당하게 진정한 의미의 에클레시아라고,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에클레시아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우리 스스로를 "사랑 모임"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하기에 달렸습니다. 우리 안에 거룩한 영을 모시느냐 아니냐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거룩한 영을 모셔야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희망을 보여주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향린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 안에서 서로 통하고, 진리 안에서 깨닫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우는 교회. 그런 향린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거룩한 영을 받으십시오.

서로 소통하고 깨달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향기 나는 이웃으로

예수의 복음을 전하십시오.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성전론적 전쟁관에 치우쳐져 있는 한국 개신교인들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 이스라엘과 미국의 이란에 대한 군사행동 등 바야흐로 전쟁의 시대다. 이러한 전쟁의 흐름이나 양상을 보고 향후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하나님 나라의 정치색은 좌도 우도 아니다"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가 설교와 정치의 관계를 성찰하는 글을 공개해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최 목사는 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AI의 가장 큰 위험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죄"

옥스퍼드대 수학자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존 레녹스(John Lennox) 박사가 최근 기독교 변증가 션 맥도웰(Sean McDowell)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신간「God, AI, and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여성들, 막달라 마리아 제자도 계승해야"

이병학 전 한신대 교수가 「한국여성신학」 2025 여름호(제101호)에 발표한 연구논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서방교회와는 다르게 동방교회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극단적 수구 진영에 대한 엄격한 심판 있어야"

창간 68년을 맞은 「기독교사상」(이하 기상)이 지난달 지령 800호를 맞은 가운데 다양한 특집글이 실렸습니다. 특히 이번 호에는 1945년 해방 후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김경재 교수는 '사이-너머'의 신학자였다"

장공기념사업회가 최근 고 숨밭 김경재 선생을 기리며 '장공과 숨밭'이란 제목으로 2025 콜로키움을 갖고 유튜브를 통해 녹화된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경직된 반공 담론, 이분법적 인식 통해 기득권 유지 기여"

2017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 연합단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반공 관련 담론을 여성신학적으로 비판한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영성적 차원이 있음을 탐구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인수 교수(감신대, 교부신학/조직신학)는 「신학과 실천」 최신호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