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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범의 물에서(3)] 내 이름은 소모품

이충범·협성대 교수(역사신학)

▲이충범 협성대 신학과 교수 ⓒ베리타스 DB
아주 오래 전에 들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땅이 바다보다 낮은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한 소년이 학교에서 돌아오다 바다를 막아 놓은 댐 한 구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물이 새는 구멍을 막고 있었는데 수압에 의하여 구멍이 점점 커져가면서 소년은 자신의 팔을 집어넣어 물을 막아야만 했습니다. 늦은 저녁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소년의 부모가 그를 발견하고 보니 소년은 댐에 팔을 넣고 잠들어 있었다는 겁니다. 그 후 소년은 저체온증으로 죽었대나, 살았대나, 뭐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이 이야기가 뻥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씁쓸한 미소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재 네덜란드 그 지역엔 소년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물론 제가 직접 가본 것은 아닙니다. 여하튼 이 이야기는 한 소년의 희생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네덜란드 소년 이야기와 유사한 이야기들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성서에는 대표적으로 삼손이야기가 이와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고 우리나라엔 술 취한 주인을 구한 강아지 이야기가 이와 비슷합니다. 어찌되었건 이러한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생명을 살린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장을 조금만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이러한 이야기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됩니다. 우선 네덜란드 어린이의 부모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물론 삼손의 어머니나 강아지의 엄마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입장을 하나님까지 확장해 본다면 이야기는 조금 복잡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생명을 수공의 위협에서 구하기 위해 그 어린 소년의 희생을 묵과하셨을까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물잡이를 한창 하고 있던 중 저의 검색에 이제까지 알지 못한 단어가 포착되었습니다. 소위 “물잡이고기”라는 단어였습니다. 자연하천에서는 사실 그렇게 밀집도 높은 박테리아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작은 어항 속에는 밀집도 높은 박테리아가 필요합니다. 비유를 든다면 거대한 수영장에 물고기 5마리를 키운다면 우리는 구지 박테리아의 밀도에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 녀석들의 배설물은 박테리아가 많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정화가 될 테니까요. 그러나 작은 대야에 물고기 5마리를 키운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아주 비정상적인 박테리아의 밀집도를 확보하지 않고서는 물고기들을 건강하게 키울 수가 없습니다.
물고기의 배설물들을 분해하는 박테리아가 빨리, 그리고 대량으로 증식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물고기 배설물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물잡이를 시작할 때 매우 적은 량을 배설하는 작은 물고기를 수조에 넣어주면 박테리아 증식을 더 신속하고, 정확하고, 확실하게 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때 넣어주는 물고기를 사람들은 “물잡이고기”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럼 어떤 고기를 넣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답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하찮고, 싸고, 흔하고, 가치 없는 물고기가 그 답이었습니다.    
망설이고 망설였습니다. 왠지 실험용으로 쓰는 마루타와 같은 느낌이 전달되었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다 양판점에 가봤더니 물잡이용으로 딱인 바로 그 녀석들이 있었습니다. 양판점에서조차 한 마리에 단돈 천원에 판매하고 있는 그 녀석들 3마리를 사들고 집에 와서 어항에 넣었습니다. 흔히 쏘드테일(sword-tale)이라고 부르는 주황색의 송사리과 물고기 3마리가 아무것도 없는 휑한 어항 속에 투입되었습니다. 마음이 참으로 안좋았습니다. 다른 물고기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희생하는 그 녀석들이 안타까워 먹이는 최대한 충족히, 맛있게 챙겨주는 일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그 녀석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다하고 물위에 둥둥 뜰 때만을 기다렸습니다. 
▲민물고기들과 잘 놀고 있는 쏘드테일 3마리, 수컷 2마리와 배가 부른 오른쪽 암컷 한 마리. ⓒ사진=이충범 교수

군생활 시절이었습니다. 평상 시 저의 임무는 보급 행정병이었습니다. 원래 어마무시한 기계화 장비를 몰고 다니는 운전병이었던 저는 자대배치 한 달 후 괜찮은 대학에 재학 중이고 글씨를 예쁘게 쓴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운전병에서 저의 적성과 전혀 맞지 않는 장비보급업무를 담당하는 행정병이 되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저는 이렇게 저의 보직이 변경되는 순간,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한 겨울, 고참님들께 매를 맞아가며 매일 폐유로 장비를 세차하면서 하얀 제 손은 이미 기름독이 올라 매일 퉁퉁 붓고 가려움증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던 차, 따듯한 현장 사무소로 들어가 책상에 앉아 일한다는 것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자리이동을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시엔 따듯한 사무실에 앉아 보급이란 권력을 남용하며 떵떵거리던 저의 천국과 같은 임무는 전시 하에서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전시가 되면 저는 장비지원업무를 버리고 유지고 사수를 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평시엔 장비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지원하다가 전쟁과 같은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모든 업무를 버리고 총 한자루 달랑 들고 기름탱크 위에서 이를 사수하는 것이 바로 제 임무였습니다. 제가 근무했던 부대는 매달 한 번씩 실전상황을 가정하여 훈련을 하였는데 저는 훈련을 할 때마다 유지고로 달려가 총을 옆에 던져두고 기름냄새 나는 주유소 메타기 뒤에 누워서 하늘을 보며 훈련종료 사이렌이 울릴 때까지 기분 좋은 낮잠과 휴식을 즐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훈련일정도 아닌데 사이렌이 울렸습니다. 처음엔 누군가 실수로 사이렌을 울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부대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장교건, 하사관이건, 사병이건 간에 그때부터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무장을 하기 위해 내무반으로 뛰면서 저의 머릿속엔 온갖 상념이 스쳤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스치고, 여자 친구도 스치고, 친구들도 스쳤습니다. 그리고 손엔 땀이 주르르 흘렸습니다. 완전군장을 마친 후 저는 저의 임무였던 소위 기름총(주유소 기름 주유기) 밑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늘 하릴없이 누워서 훈련을 때웠던 그 기름냄새 나는 그 장소가 섬뜩하게 다가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서워서 떨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적이 폭격을 시작한다면, 그리고 수도권에 있는 우리 부대를 목표로 삼는다면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제가 거총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 어마어마한 기계화 장비를 단숨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아주 간단한 한 가지 방법은 장비들을 움직이게 하는 기름탱크만 폭파시키는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우리 부대 주위의 방공포대가 저항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 보아왔듯이 미덥지 못하고 허접한 그들이 방어에 실패하고 적이 폭격에 성공한다면 저는 발아래 있는 거대한 기름탱크의 폭발과 함께 산화해버릴 것이 분명했습니다. 
전시 상황 하에서 저의 역할은 거의, 아니 100% 완벽하게 없었습니다. 적들의 폭격에 달랑 M-16 소총하나 들고 있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냥 지급된 실탄 40발을 허공에 뿌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유지탱크를 사수하는 병사로 세웠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명료했습니다. 부대 전체의 전력을 동원하여, 그리고 방공포대를 활용하여 철저하게 방어해야만 했던 부대의 심장부를 그냥 비워둘 수 없으니 직접 장비를 운전하지 않는, 전시에 불필요한 병사 한 명을 총 한 자루 쥐어 주고 세워두었던 것입니다. 
아직도 불만이 없는 저의 역할은 그냥 핵폭탄이 터지는 그 장소에서 묵묵히 현장의 마지막을 지켜봐야 하는 수위나 경비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엄청난 폭발과 함께 사라지는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저는 민족과 국가를 위한 작은 소모품, 저의 이름은 소모품이었던 것입니다. 
허망하게도,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날의 비장함은 소련제 전투기를 몰고 귀순했던 북한공군장교의 소동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의 그 사건은 아직도 제게 생생한 감정 그래도 남아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휘관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땅에 다시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저는 지금 가슴을 쓸어내릴 뿐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않으냐?” (표준새번역, 마태복음 6장 26절) 
비록 저는 사랑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해야만 한다면 작은 소모품이 될 용의가 있습니다. 아니, 소모품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소모품과 희생양이 될지언정 영원히 저를 희생물이나 소모품이 아닌 귀하디 귀한 한 생명으로 대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저를 하늘에 나는 새나 그 어떤 동물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시는 그런 분입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저는 희생의 제물로 구입한 그 작은 생명에 대하여 견딜 수 없는 미안함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내가 키우기로 결정한 다른 생명들과 함께 건강하게 잘 커주기를 마음 깊이 염원하게 되었습니다.  
몇 달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물잡이용 희생어로 구입한 쏘드테일 3마리는 물위에 둥둥 떠오르기는커녕 새로 구입한 우리 민물고기들과 함께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습니다. 게다가 그 어떤 물고기보다 훨씬 더 강한 생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밉살머리스러우리만치 민감한 먹이반응(거의 먹보수준), 환경변화에 대한 무감각한 예민성, 다이내믹한 활동 등 그 어떤 개체들보다 강인한 생존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어항 속에서 발견된 꼬물꼬물한 물체들의 정체. ⓒ사진=이충범 교수

그러던 어느 날 어항 속에 꼬물꼬물한 물체들이 감지되었습니다. 저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고 직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뛰쳐나가 그 무언가를 사들고 들어왔습니다. 희생제물로 구입했던 그들, 죽어서 사체처리를 준비했던 그들이, 바로 그들이 뭔가 사고를 치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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