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사도는 로마서 9장에 이어 10장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선택을 거부하고 ‘율법’과 ‘행위’에 의지하여 /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이스라엘(유대민족)에 대해 계속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지만 1) 핍박자였던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고, 2) 동족을 향하여 고통하는 귀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 유대민족을 향해 <바른 교훈>을 전하는 것은 결코 동족을 배척하려는 마음에서 전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려는 의도입니다. 전도하고 선교할 때에 꼭 준비해야 할 마음입니다. 바른 교훈을 전하기 위해서는 바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바른 동기를 가져야 합니다.
본문 1절입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이제, 바울은 바른 동기에서 동족, 이스라엘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 시대에 신앙하는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 온전한 구원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기 의’를 내세워서는 않됩니다.
본문 2-3절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열성만은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바른 지식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을 깨닫지 못하고 제나름의 방법을 세우려고 하면서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공동번역)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릇된 열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이 교훈을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입니다. 바로 유대인들이 빠져있는 함정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6절 에서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릇된 열심과 잘못된 의입니다. 왜 입니까? 바른 지식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른 지식은 세상지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요즈음 아침마다 묵상하는 호세아 선지자의 외침입니다. 호세아서 4:6절,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참 기쁨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에는 끝이 없습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새록 새록 더하는 기쁨입니다. 성도들이 끊임없이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에 집중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호세아 6: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세아 6:6절, “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을 바로 아는 열심히 중요한 것은’ 이 열심이 있어야 자기 의를 앞세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할 때에 우리는 말도 못하는 고집쟁이가 됩니다. ‘자기 의’가 충만해 집니다. 여기에 열심히 붙으면 무섭습니다. 바로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후 바울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자기의 모든 의가 사라집니다. 고린도전서 15:10절,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3:6-9절,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부터 나오는 <바른 열심>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기를 바랍니다.(말씀 사모, 은혜사모, 기도..)
(이를 위해서)
@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말씀을 마음에 두고 입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8절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믿음의 말씀’은 헬라어 원어로 보면 ‘테스 피스테오스’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믿음과 직결된’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본문은 잘 아시는데로 구약 신명기서 30:11-14절 말씀의 인용입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가까이 할 때에 믿음이 생깁니다. 사도행전 17:11절,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말씀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은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믿음은 뿌리가 약한 나무와도 같습니다. 결국 은혜는 말씀의 은혜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이 믿음의 말씀을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본문 9-10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음에 말씀을 담는 것과 더불어 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 11-13절입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를 주로 믿을 때에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할 때에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은 우리 믿음의 모든 삶가운데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마음으로 믿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입으로 시인할 때에 그 말씀이 실제화됩니다. 시인할 때에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믿고 선포하여 그 말씀이 이루어 짐을 체험한 성도는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본문 14-15절입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좋은 소식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말씀을 통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발걸음이 세상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발걸음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복음을 전하는 열심히 가장 유익하고 보람된 열심입니다. 저와 예배자들의 발걸음이 열심히 아름다운 발걸음, 유익한 열심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