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새 창조의 하나님

2014년 9월 7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창세기 2:4b-9 
주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실 때에, 주 하나님이 땅 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 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땅에서 물이 솟아서, 온 땅을 적셨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주 하나님이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주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아멘. 
로마서 8:22-25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6:25-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아멘. 
설교문
오늘은 창조절 첫 주일입니다. 오늘의 환경을 생각하면서 `그린 선데이`(Green Sunday)이라고 말해도 되겠지요. 우리는 교회력상 9월부터 11월까지를 창조절로 지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과 사람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창조가 이미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경말씀에 따르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까지 하나님의 창조역사는 계속됩니다. 이 계속 되는 창조를 ‘새 창조’라고 이름 합니다. 
오늘 성가대도 창조에 관련된 찬양을 불렀습니다. 저도 노아 남성콰이어 팀과 함께 지난 8월 말주간에 천지창조의 한 현장을 경험하고 왔습니다. 우리 노아 남성합창단과 함께 캐나다 벤쿠버에 가서 특별찬양과 함께 카다다 연합교회 3곳이 함께 모여 에큐메니칼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설교를 담당했고, 노아 합창단은 예배가운데 순서를 나누어서 30여 분동안 아름다운 찬양으로 축제를 마련했었읍니다. 교인들이 감격의 박수와 격려를 해주어 예배시간에 기립박수가 터진 경우가 한번도 없었다는 증언도 들으며 감사했었읍니다. 
그 이후에 북미가 자랑하는 로키산맥을 함께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과거에 알프스 산맥을 처음으로 구경하면서 참 아름답다고 고백하고는 했습니다. 알프스 산맥이 마치 사람이 화장하는 것처럼 멋지게 꾸며놓은 산맥이라고 한다면, 로키산맥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웅장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키산맥의 나무들은 하늘을 찌를 듯이 쭋쭉 뻣어 높게 솟아올라 나무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나무들 등급을 매긴다면 아마도 특급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단 건축가의 눈으로 볼 때 그럴 것입니다. 크게 잘 자란 나무는 집을 짓는데 필요하고, 또한 건축하는데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나무는 어떤가요? 키가 작고 구불구불 하니까 하급에 속할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집안에 아름다운 나무 분재를 키운다고 한번 생각하시면 됩니다. 로키산맥의 나무는 화분에 담길 관상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크게 높히 잘 자란 나무는 분재가 안 됩니다. 관상용으로 사용할 나무는 위로 쭉쭉 뻗은 나무가 아니라 앞 뒤 옆으로 퍼져야 하고, 작으면서 아름다운 분재의 멋을 가진 나무라야 특급입니다. 
이것을 통해 제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나무와 자연의 모습을 가지고 사람의 쓸모의 관점과 필요에 따라서 등급을 매기는 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사람의 필요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또 그것도 모자라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차별까지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무의 가치를 한가지 기준으로 등급을 매길 수 없습니다. 로키산맥의 잘 자란 나무들을 보니까 이끼가 많이 끼었습디다. 이끼도 자연 생물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기엔 이끼가 별 볼일 없어 보입디다. 그런데 이끼가 없으면 벌레가 파고 들어오고, 겨울의 추위로 인해 나무가 잘 자랄 수 없다고 합니다. 이끼는 자연의 한 요소로 이러한 역할도 합니다. 
사람의 몸으로 말하면 온 산도 거대한 유기체에 속합니다. 그 안에서 나무가 할 일이 있고, 이끼가 할 일이 있고, 또한 기타의 각기 다 다른 역할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종류는 다르나 똑같이 중요합니다. 각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 가운데 편향된 판단에 따른 차별은 우리 사람들의 시각 때문에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깨달았습니다. 이제 차별은 더이상은 안 된다.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이 차이가 차별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이 광대한 숩과 나무와 자연동산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입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인 창세기 2장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에덴의 동쪽 햇볕이 비치는 곳에 동산을 일구어 나무를 가득 자라게 하시고, 그 중심에 살도록 다스릴 사람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모든 나무에게 공통의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삐뚤어진 나무, 올 곧게 뻗은 나무, 큰 나무, 작은 나무 할 것 없이 모든 나무는 하나님 앞에 평등합니다. 각자 모두가 나름의 생명의 가치를 지닙니다. 그 상징적인 표시로 에덴동산 가운데 생명나무를 심어 놓으셨습니다. 이 나무를 보고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나무의 "가치"가 기본적으로 "생명"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생김새가 달라도 생명은 똑같이 귀합니다. 생명이 가치판단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생명나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외국여행에서 비행기 타고 귀국하는 과정에 한반도 산하를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적 있으신가요?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우리나라의 산야가 거의 빨겠습니다. 나무도 없었습니다. 지금 북쪽인 북한의 산하가 그렇습니다. 지금은 남한의 숲과 자연은 너무 푸르러 선진국 중에 선진 조림국입니다. 로키산맥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산하도 그야말로 하나늬 아름다운 ‘그린 마운틴’입니다. 여기서 자라는 식물들도 하나님 앞에서 모두 동등한 생명체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자연세계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동산을 "에덴동산"이라고 하시며, 우리에게 이 동산을 가꾸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연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 한 가운데 생명나무를 심고, 동산의 중심자로 사람을 만드시고, 말씀하셨읍니다. 사람아 이 모든 자연을 즐겨라, 함께 살아라, 공존해라, 그리고 공생하라고 하셨습니다.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라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나무뿐만 아니라 같은 사람들에게도 등급을 매깁니다.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 공부를 많이 한 사람과 적게 한 사람, 돈을 많이 가진 사람과 가난한 사람, 그리고 강자와 약자 등과 같이 등급을 매겨놓고 온 세계적으로, 사회적으로 사람을 차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는 그런 자의적인 차별은 안 됩니다. 아무리 작은 자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가치를 큰자와 똑같이 지니고 삽니다. 
마침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귀국길에 비행기에서 뉴욕타임스 신문의 문화란에 실린 특집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기사의 내용은 전 세계 부모들의 근심거리인 다운증후군(Down`s Syndrome) 아이들의 절망과 희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아이들 얼마나 불쌍한지 아시지요? 이 기사를 특집으로 다룬 이유는 영국의 유명한 생물학자이며, <만들어진 신>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무신론자이며 진화론자인 리차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의 발언 때문입니다. 도킨스는 신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학문적으로 노력하고 있으며, 그것을 퍼뜨리기 위해 런던 공용버스에 “THERE`S PROBABLY NO GOD”이라는 광고지를 부착하도록 했었습니다. 이분이 최근에 학회에서 다운증후군을 입신한 사람은 아이를 낳지 말고 낙태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 했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 평생 동안 부모의 고통 그리고 본인의 고통만 가중되기 때문에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는 낙태를 해야 한다는 것이랍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교회 강단에서 몇 년 전에 탈북한 한 여성 한분이 오셔서 이런 증언을 하셨습니다. 그녀는 북한에서 청진의대를 졸업한 외과 의사 출신으로 일하다가, 탈북해서는 연세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간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자신이 청진에서 의사로 있는 동안 장애아이 출산은 절대 안 된다는 당의 명령에 따라서 만일 정신 또는 신체지체아가 나면 무조건 아이를 숨을 못쉬게 얼굴을 엎어놓아 죽게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은 리차드 도킨스의 말이나, 이 여성 의사의 고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뉴욕타임스 기자는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도킨스는 생물학자인데, 그 사람의 발언이 도덕적 뿐만 아니라 생명의 대한 이해 자체도 부족한 것 같다고요. 그래서 무슨 예를 이야기 했냐면 자폐아를 가진 부모의 행복도와 다운증후군 아이를 가진 부모의 행복도를 비교했습니다. 두 아이의 부모를 비교해보니 다운증후군 아이를 책임지는 부모의 행복도가 훨씬 높았다고 합니다. 다운 증후군의 아이들의 자체 지능지수가 많이 떨어집니다. 평균 아이큐가 45~55정도라고 합니다. 일찍 수술을 해야하고, 평균적으로 나이가 40이 되었을 때 알츠하이머병에 걸리기도 쉽고, 키도 작고, 손 발 코 입도 작은게 특징이라고 합니다. 얼굴이 평평하고 납작해 몽골 사람 얼굴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 증산을 몽골리안 신드롬(mongolism)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병을 처음 발견한 사람도 영국인 의사 존 다운(John L. H. Down)이며, 이 분의 이름을 따라 다운증후군(Down‘s Syndrome)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아이들을 어떻게 길러야 할까요? 사람에게 등급을 매긴다면 다운증후군 아이는 하급에 분류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건강한 우리에게도 생명을 주셨고 이 아이들에게도 생명을 주셨는데, 생명을 주신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인간의 생명은 평등합니다. 그리고 모든 질병은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보면서 자책의 마음이 생겨났읍니다. 자연세계에도 등급을 매기는 차별이 있는데, 인간 세상에는 얼마나 더 많은 차별이 있는가! 다운증후군 아이들은 우리가 키워야 할 자식들입니다. 이 병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유전병의 일종이고, 보통은 22개의 엽색채가 각기 한쌍식 44개의 상동염색체가 있고 여기에 남(xy)과 여(xx)라는 성별 염색체로 구성되는데, 다운 증후군 아이는 21번째 에 3개의 비정상 비균형 염색체가 있는 경우라고 합니다. 생물학적 전문성이 모자라 이 정도의 설묭으로 대신하겠읍니다. 어쨌던 이 아이들이 지능이 낮고 생각도 덜 깊게 하겠지만 대신에 그만큼 심적 고통도 덜 받겠지요. 만약 이 아이가 우리가 몸으로 낳게될 아이라면 과연 우리는 낙태를 손쉽게 시킬 수 있을까요? 아 아이를 뒤집어 뉘어서 숨막혀 죽일 수 있을까요? 생명은 어떤 의미이고, 그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매우 심각한 문제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보면 이 아이에게도 똑같이 귀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신문지상에 늘 보도되는 모든 사건들 속에 선천적 다운증후군은 그렇다고 치고, 이 땅에서 벌어지는 후천적 다운증후군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뭐가 후천적입니까?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은 다운증후군을 정치화했습니다. 잘난 사람, 배운 사람, 돈이 있는 사람, 그리고 지주계급을 몽땅 모아 보니 300만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정권을 잡았습니다. 정치적 다운증후군으로 대량살육의 킬링필드를 만들었습니다. 우리교회는 올해도 캄보디아로 의료봉사를 은혜가운데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만. 아마 수십 년 동안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여력의 사람은 이미 모두 다 학살했기 때문입니다. 게르만 민족도 자기들이 최고의 종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보다 못하면서도 경제적 문화적 치적이 높은 유대인들을 말살했습니다. 인종주의적 다운증후군 현상입니다. 600만의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대량으로 죽였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악몽입니다. 일본은 동북아 재패를 위해 침략적 사고를 가지고 다운증후군 질병을 군국주의화하여 전쟁을 일으켰읍니다. 우리나라와 아시아의 여성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징용하고 성적노예로 삼았으나, 아직도 그런 사실조차 부인하고 있습니다. 침략적 전쟁적 다운증후군이 틀림없습니다. 근래에 와서 중동의 가자지구에서도, 이라크에서도, 또 멀리 아프리카에서도 수 많은 곳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이슬람과 유대교가 종교차별로 겪화된 다운증후군도 있습니다. 수많은 생명이 부질없이 종교와 신앙의 허황된 이름으로 죽어갑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생명권을 갖고 계시는데 무슨 권리로 인간사회가 후천적으로 강압해서 다운증후군을 만듭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사회의 창조질서의 왜곡이라는 현상입니다. 땅, 하늘, 바다의 자연세계만 오염된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도 완전히 오염되어 썩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에덴동산을 만든 창조주이지만 온 땅을 다시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 생명의 가치를 지켜라. 나는 이 온 세상을 주고, 훌륭하다고 생각한 너희 인간들을 에덴동산 가운데 만들어 놓았는데 너희들이 무슨 권리를 온 인간사회를 다 망가뜨리느냐. 나는 구원의 역사를 다시 이루어야겠다. 새 창조를 이룩하여야겠다".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생명나무를 심은 것은 모든 생물은 생명이 중심이라는 뜻이라고. 사람도 생명체이며, 그 가치 또한 생명의 가치입니다. 자연의 가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은 살아야 하고, 즐겨야하고, 존중해야 되며 기쁘게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도 살 수 있는 생명이 자연 속에서 그리고 인간사회에서 무수히 파괴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창조절 첫 주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창조를 회복해라. 생명존중을 회복해라. 그래야 생명이 사느니라"고. 
로마서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몸이 아프신 분, 힘드신 분, 괴로우신 분, 정신적으로 힘드신 분, 여기 다 계십니다.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지금 힘드시지요? 아프시지요? 눈물 나시지요? 그런데 우리의 미래는 이런 식으로는, 이대로의 모습대로는 지속되지 않습니다. 오늘은 괴롭지만 내일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병도 나을 것입니다. 세계도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혹시 우리 가운데 글쎄요. 지금 내가 이 꼴인데 내일이 밝아지겠습니까라고 의문과 절망의 투덜거림을 발하는 분들이 있을줄 압니다. 그런데, 실제로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다운증후군 아이들에게 이와 똑같은 선언을 한다면 그 반응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믿습니다. 그네들의 답은 이럴 것이라구요. "내일은 아이큐 40~50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100을 넘어 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면 그곳에는 다운증후군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괴롭지만 내일은 밝을 것입니다"라고. 다운증후군 아이들은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지능도 감성도 높고 잘났다고 믿는 우리들의 반응과 태도는 어떨가요?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는 어린 아이처럼 순박한 사람이 사는 곳이지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못 간다고 하셨읍니다. 저는 믿습니다. 생명 있는 사람이 주어진 생명을 찬양할 수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 말씀을 보세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라. 그러면서 오늘의 고통은 오늘로 족하다. 내일의 희망은 인간이 만드는 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다"고. 그렇게 믿으면 오늘의 생명이 매우 귀합니다. 나무도, 사람도, 환자도, 건강한 사람도, 권력자도, 힘없는 자도 오늘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고통은 한 날로 족합니다. 내일은 하나님이 주신 영광스런 생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고통을 가지고 내일까지 확대하여 생명을 평가하지 마십기오. 오늘의 질병을 가지고 내일의 건강을 미리 평가하지 마십시오. 오늘의 아이큐를 가지고 다운증후군 아이들의 미래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내일은 훨씬 높습니다. 왜 어린아이들의 미래를 오늘의 시대인들의 고통으로 재단하십니까. 내일을 오늘 속에 쳐밖아 놓고 학대하고 죽이지 마십시오. 내일을 해방시키고 살리세요. 내일의 희망은 오늘의 우리 삶 속에서 생명을 시작하고 힘차게 살아갑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오늘의 우리에게 내일의 생명을 약속 하시면서 오늘 고통 속에서 내일의 희망을 일구어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괴로움 속에서 내일의 희망이 잉태되고 자라납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그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사역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오늘의 십자가 고난에서 내일의 생명인 부활생명이 잉태되고 죽음을 삼키고 승리한것 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분의 축복을 여러분 모두 풍성하게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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