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서 58:6-8, 10-11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 아멘.
디모데전서 4:4-5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다 좋은 것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6:19-23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다가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간다.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지도 못한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아멘.
설교문
오늘 우리 경동교회는 민족 전통의 추석절에 추수감사주일로 함께 지킵니다. 주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며, 주님의 은혜릀 만끽하는 축제의 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릴 때 마다 제 마음 속에 두 가지 정서가 있습니다. 하나는 “참 기쁘다!” 이고, 또 다른 하나는“아쉽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문명이 발전하고 현대화의 강도가 깊어가고 높아 갈수록 사람들은 전통문화의 대한 애착이 더 깊어 가는 것을 느낍니다. 특히 추석이 그렇습니다. 추석연휴는 모두가 신납니다. 온 집안과 동네가 모여 담소를 나눕니다. 고속도로가 차들로 가득차 오랜 시간이 걸림에도 불구하고 즐겁습니다.
우리는 이 추석을 이처럼 끼쁘게 맞이하는 우리들 한국민의 마음 속 한 가운데 하나님의 복음을 심어야 합니다. 복음이 문화속에 심겨지고 열매맺게 할수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1974년 부터 우리 고유의 추석명절과 추수감사절을 묶어 함께 축제로 드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교회 뿐만 아니라 꽤 많은 교회들이 추석명절에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있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온 세계 기독교가 똑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믿는 복음은 세계적이고, 보편적입니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복음을 우리나라의 특이한 문화와 정서에 맞게 접목을 못시키고 가꾸는 것이 복음전파의 진정한 모습인 것입니다. 같은 복음이지만, 이것을 수용하고, 받는 사람은 나라마다, 지역마다 모두 다릅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심을 수 있는 추수감사의 아름다움, 아니 하늘을 향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이 추석에 심었으면 하는 바람이 지금도 강렬하게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외형적인 것은 그렇고요, 나아가 내용적으로는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놓고 한국교회가 많이 토론 중에 있습니다. 우리의 심성,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 더 깊이 받아 드릴 수 있도록 교회도 복음을 들고 그 속으로 들어 가보자는 것이지요. 추석 때만 하는 제사예전의 문제도 있고요, 장례식 때만 하는 전통 장례예식 행사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추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예식속에도 동참토록 할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해 제가 어느 잡지에서 읽은 내용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한 여자 중학생이 써 놓은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우리 모두의 고백이자, 희망을 담고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난 추석 때 우리 식구는 시골에 계시는 사랑하는 할머니께 인사드리러 갔습니다. 가서 잔치도 벌렸고, 할머니께 너무 감사와 존경의 큰 절도 했습니다. 고운 옷을 입고 감사를 표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일주일이 지난 후인데 서럽게도 우리 할머니가 돌아 가셨답니다. 그래서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일주일 전에 큰 절했던 우리 할머니가 더 이상 안계십니다. 돌아가셨데요. 이 여자 아이가 쓴 것 중에 이런 대목이 있읍디다. 할머니는 돌아 가셨는데 제 마음 속에는 아직도 살아계시거든요. 그래서 똑같이 인사를 드리고 감사를 표하려고 큰 절을 올리려고 했더니 우리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교인은 시신 앞에서 절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우상숭배라면서요. 그래서 저는 절을 못했습니다. 제 마음 속에 할머니는 아직도 살아 계신데도 말이에요, 그리고 꼭 감사를 절하는 심정으로 표현해야 하는데요. 이런 이야기 입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문제이지만 이 여학생이 큰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 다음에 글을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섬기며 살았는데 제 할머니가 그렇게 훌륭하셨어도 할머니를 신이라고 생각해서 큰 절을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할머니가 갑자기 우상이 되는 건가요? 과거에 신이었으면 우상이 되겠지요. 나는 우상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신이라고 생각해 본적도 없습니다. 살아계신 할머니께 제 충심과 공경하는 마음으로 큰 절을 했습니다. 돌아가셨지만 제 마음 가운데 할머님은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살아 계실 때는 절을 해도 되고 돌아가신 다음에는 공경을 표현하지 않아도 되나요? 이 아이가 지혜로운지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또 한가지 우리 아버지 말씀이 왜 절을 못하게 하느냐하면 조문객들이 와서 절을 하면 상주들이 매번 절 받고 일어나기 어렵다. 간편하게 하기 위해서 목례만 하라는 것이라고 말씀도 덧붙이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의 문제의식과 해답을 찾고싶은 마음이 이 여자 아이의 좌절과 희망의 표현속에 다 들어나 있는데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반가운 인사방식이 나라마다 문화전통 마다 다양합니다. 어떤 나라에 가면 큰 절하는 나라도 있고, 단지 악수만 하는 의례도 있고, 포옹을 하는 전통도 있고, 얼굴을 마주보며 비벼대는 경우도 있읍니다. 고개만 끄덕하는 곳도 있습니다. 양태는 다양하고 다릅니다. 중요한 건 이것입니다. 어느 종교든 이점은 비슷합니다. 예배와 예배식 섬김은 하나님께만 하는 것입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만 예배하는 것입니다. 부모님과 조부모님에게는 공경하는 예를 표하는 것입니다. 같은 절이라 하더라도 예배하는 절이 있고요, 공경하는 절이 있습니다. 왜 모두를 그 뜻도 구별하지 않으면서 그저 우상숭배라고 규정해야 합니까! 저는 한국기독교가 지금까지 좋은 일도 많이 했지만 빨리 이 문제를 폭넓게 성경말씀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아름다운 축제 속에 복음을 담지 못하고, 아름다운 전통 속에 복음을 담지 못해서 교회가 세상을 잃고 사람을 잃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이럴 것입니까.
제가 오늘 이 문제에 대해서 답을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감사절 예배와 관련하여 드리는 성서의 답입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인 디모데 전서 4장 4~5절을 보십시오. 그 앞에 읽지는 않았지만 2~3절에 보면 먼저 사도바울이 살던 시대, 유대 땅에도 주변 땅에도 같은 염려와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사 때 제사상에 차려놓은 음식을 먹으면 부정이 탄 음식이기에 그것은 우상숭배 음식이고, 그러기에 신자는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세 10장에도 이 문제를 지적하면서 답을 주고 있읍니다. 옛날에 어느 사회든지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절’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음식 문제도 있었읍니다. 디모데 전서의 말씀을 보십시오. "양심에 낙인찍힌 거짓말쟁이들은 이렇게 속임수로 말할 것입니다. 다른 것은 그만 두고요,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아라"고. 디모데전서의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모든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과 진리를 아는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게 하시려고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하나님이 음식을 주셨읍니다. 하나님이 인사하는 것, 절하는 것, 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라고 믿으면 지으신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믿으면 모든 음식물은 다 유익하고, 좋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집니다"라고.
말하자면 사람이 만든 교회가, 또한 그것을 만든 사람의 결정으로 거룩하게 되지도 않고, 속되지도 않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 드린 감사의 기도로 거룩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으로 사느냐하면 인간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 삽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떤 모습으로 오시느냐 하면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으로 오십니다. 그 분이 하시는 말, 그가 베푸시는 축복, 모든 것을 우리 사람의 언어로표현하여 ‘은혜’라고 하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 사람은 그 은혜에 대해서 답을 하는 인간인데, 그것을 ‘감사’로 답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조건 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인간은 그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은혜와 감사가 만나고 만나서 만드는 것을 인간의 역사라고 하겠읍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는 입장이 역사학자 마다 관점이 다릅니다만 여러분이 잘 아시는 토인비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외부로부터의 도전(challenge)과 내부로부터의 응답(response)이다. 도전에 대한 응답이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을 역사라고 이름합니다. 그분의 관점에서 보면 종교가 쇠퇴했다는 것은 밖으로부터 도전이 왔는데 종교가 이 도전에 대해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민족도, 언어도, 그리고 역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 디모데전서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세계역사와 신앙의 역사는 두 가지로 움직인다고 표현하고 있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감사. 이 은혜와 감사가 상호 어울려져서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랍니다. 은혜만 있고 감사가 없으면 진정 인간다운 사회는 아닙니다. 감사가 있는데, 은혜가 없으면 그런 감사는 헛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여러분 무얼 감사하시렵니까. 감사주일이라고 요식으로 정해저 있기때문인가요. 아닙니다. 분명히 감사할 수 있고 그리고 감사해야 되겠다는 결단에는 반드시 감사의 시초가 있고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왜 감사하십니까. 은혜 안 받고 감사하십니까. 아니죠. 은혜 받았으니 감사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오늘까지 주신 생명에 감사합니다. 아까 여학생 이야기 했습니다만 그 하나님은 누구냐 하면 살아있는 공경하는 할머니의 주인이신 창조의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주인이신 똑같은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산자와 죽은자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육신으로 살다가 죽어도 다시 부활시켜서 새 생명 주신다고 성서가 증언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죽음의 주인이신 하나님, 그리고 부활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믿고 감사하면 우리는 항상 감사로 살아야 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감사는 항상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있으니까요. 우리는 그 은혜를 받고 감사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데 이제는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합시다. 세상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마음의 결단이 부족할 때, 힘들 때 하나님 중심으로 판단하면 옳고 또 복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 아느냐. 오늘 마태복음 말씀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말로 하면 ‘보물’ 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보물이라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마다 보물의 은혜가 달라요. 힘과 권력, 물질의 풍요, 재능, 장수, 건강, 보물의 종류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 보물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보물을 너희들에게 주겠지만 보물을 쌓아 둘 곳이 있다. 그곳은 "하늘"이랍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는 그 보물을 삼키려고 하는 세력이 많다. 벌레가 와서 좀도 먹고, 오래되면 낡아서 녹도 슬고. 밤마다 도둑이 와서 도둑질 해 갈려고 한답니다. 주님께서 보물을 주셨고, 은총을 주셨지만 은총을 자꾸 썩히고, 망가뜨리고, 도둑질 할 사람들이 세상에 가득하답니다. 이 보물의 은혜는 받으면 하늘에 쌓아두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은혜를 하늘에 쌓아 두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실대로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하나님 나라입니다. 세상에 보물을 주었지만 이 보물을 보관 할 곳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기에 세상에서 죽은 다음에도 하늘 나라로 부활합니다. 오늘이 어둡지만 내일은 밝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보물을 보관하셔야 합니다. 재능도, 물질도, 축복도, 온갖 것을 다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늘에 보관하라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받은 축복은 무엇이고 어디서 누리라는 것입니까. 보물을 보관하는 장소가 하나님 나라라고 했는데 그 나라는 어디에 있나요?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말하지 말라. 하나님 나라는 너희 마음에/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 깊은 곳은 우리의 마음속 입니다. 분명해졌지요?. 보물을 보관하는 장소는 겉에 보이는 장소가 아닙니다. 보물을 보관하는 장소는, 우리에게 준 은총의 장소는, 우리의 가장 깊은 곳, 우리의 양심, 우리의 마음이라 이름하는 곳에 있습니다. 그곳의 이름이 마음이지만,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그곳의 이름은 하늘입니다. 세상은 하늘을 품고 삽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품고 삽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합니다. 인간성의 깊은 곳에 신성이 있읍니다. 신의 "형상"이라는 이름으로 있읍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가 있고, 그 마음속에 보물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오늘 추수감사절 때 다시 깨달으셔야 합니다.
은혜와 축복을 받았는데 그 축복은 마음속 깊은 곳에 들어와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깊고, 높고, 깨끗하고, 진실한 곳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감사를 해야 합니까. 바리새파 사람처럼 외형으로 감사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부탁입니다. 감사는 마음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마음속으로 부터 감사하는 것이지. 겉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하면 축복을 주실까요. 마음속으로 얼마 만큼이면 되겠읍니까요. 감사하되 마음껏 하십시오. 세지 말고 마음껏, 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 하늘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은혜가 보관 되어 있으니까요. 감사할 수 있는 언어, 감사의 행동, 감사의 예물, 모든 것은 진정 마음으로부터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감사요. 찬양입니다. 오늘 찬양도 그렇게 불렀지요. 우리 기도도 그렇게 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만이 세계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지 않습니까. 가슴의 눔으로 볼때도 세계가 보입니까. 영을 떠난 육으로 보이는 세계 뿐입니까. 세상의 정치만 보입니까. 우리의 양심의 문으로 볼때 세계가 보입니까. 이 세계에도 양심과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세계정신 이라고 흔히들 이름합니다. 하늘을 담는 마음이 세계에도 있습니다. 바로 이 곳에서 세계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곳에서 부터 감사의 표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가 마음속 깊은 곳으로, 세계정신 싶은 곳으로 들어옵니다.
세상과 하늘을 마음과 육으로 구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마다, 세계마다, 가정마다 가장 깊은 곳과 아름다운 곳, 거룩한 곳이 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아무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부당하게 묶이는 법이 없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열심히 일했는데도 불구하고 굶는 자가 없다. 그런 것은 세상이 있는 거지요. 억울하게 목 마른 사람도 없다. 억울하게 압제 받는 사람도 없다. 억울하게 헐벗은 자도 없다. 하늘나라에서는 없다는데요.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의 세계에는 내가 배부르고 이웃 사람이 배고픈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정의와 하나님이 말씀하신 사랑을 마음 속으로 받아 일용할 양식으로 먹어야 합니다. 억울하게 묶이면 안 됩니다. 결박당하면 안 됩니다. 굶주린 자도 먹여야 합니다. 떠도는 사람에게는 잘 곳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헐벗은 사람에게는 입을 옷을 주어야 합니다. 수량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양심껏, 양심의 깊은 곳에서부터 주는 생명의 양식 말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처럼 이 땅에서도 압제 받은 자 놓아주고, 굶주린 자 먹여주어야 합니다. 떠도는 사람 맞아 주어야 합니다. 헐벗은 자 입혀주어야 합니다.
오늘 이사야서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마음으로부터의 감사입니다. 오늘 감사예배를 드립시다. 마음속 깊이에서 드리는 감사 예배로 드립시다. 그냥 입으로 드리는 것 말고요, 은혜를 진정 마음속으로 받고, 마음속으로 찬양하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감사하십시다. 그렇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사야를 통한 약속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물이 끊이지 않게 항상 물댄 동산 같고, 물이 항상 솟구치는 동산 같이 내가 은혜를 줄 것이다. 그 속에서 감사해라. 은혜와 감사가 만나게 하여라"고. 예배에서 삶의 현장에서 직장 생활에서 감사는 항상 해야 합니다.
이처럼 감사드리는 삶을 "행복"이라고 이름합니다. 은혜와 감사가 힘쓰고 진정으로 땀흘리며 만나니까요. 은혜가 없거나, 감사가 없으면 그것은 단지 우년으로 맞이하는 "행운"의 삶에 불과할 입니다. 우리는 행운의 크리스쳔이 아닙니다. 감사와 은혜가 만나는 행복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오늘 이렇게 감사합시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가 특별히 감사위해서 차릴 곳과 가릴 시간이 따로 없다고 합니다. 항상 어디서나 감사하라십니다. 복되고, 아름답고,진지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은혜와 감사가 만나는 이런 축복 속에 여러분 감사절을 풍성히 맞이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