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예레미아 애가 3:23-26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주님께서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참고 기다리는 것이 좋다. 아멘.
디모데후서 1:7-10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일이나 주님을 위하여 갇힌 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함께 겪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실을 따라 하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를 따라 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는 영원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타나심으로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않음을 환히 보이셨습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7:11-16
그 뒤에 곧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성읍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과 큰 무리가 그와 동행하였다.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고 있었다. 그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성의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말씀하셨다. "울지 말아라."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그래서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셨다" 하였다. 아멘.
설교문
오늘 예배가 아름다운 찬양과 기도로 풍성해 지길 기원합니다. 오늘 날씨 참 좋지요? 한낮에는 여름이지만 아침과 저녁날씨를 보면 이미 가을이 된 것 같습니다. 요즘 들어 사계절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사계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기후는 정확하고, 정직하게 사계절을 따라서 움직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인생의 역사도 사계절 것과 같이 움직입니다. 여기 앉으신 여러분 모두에게도 봄이 있고, 여름이 있고, 가을이 있고, 또 겨울이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봄이 길고, 또 어떤 분에게는 겨울이 깁니다. 어떤 분은 여름이 길고 너무 더워서 그리고 너무 잘 나가서 걱정입니다. 또 어떤 분은 가을이 길어 풍요한 추수를 많이 합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도 사계절이 있습니다. 다만, 자연환경과 인간의 환경이 똑같지 않아 사계절마다의 기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역사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와 세계 역사에도 사계절이 늘 있었습니다. 경제경기에도 사이클이 있는데 사계절과 비슷하게 흘러간다고 합니다. 한 가지 희망은 지금은 어렵지만, 항상 겨울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봄에 새롭게 피어나지만 항상 신나는 생활만 있는 것 아닙니다. 더울 때가 있고, 추울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어려울 때를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사계절은 그 자체가 고통의 모습만이 아니라 변화 속에서 느끼는 생명의 움직임을 감사하면서 살아야 할 계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가을이지만, 예컨데 우리 인생의 가을은 똑같지 않을 수 도 있습니다. 다만 세상은 변화고, 인간은 생명체니까 항상 변화하면서 새로운 삶을 추구한다고 믿습니다. 여러분도 동의하시지요?
책을 읽고 역사를 공부할 때 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존중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교과서가 오늘날의 구약성서입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거룩한 역사라 이름합니다. 이 역사는 유일무이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민족사이며, 국정교과서입니다. 첫째 저는 이스라엘 역사를 읽어 보면서 놀라운 것이 있읍을 발견 합니다. 이 교과서를 읽어보면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훌륭한 왕과 선지자와 같은 지도자들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나쁜 것은 나쁜 것대로 있는 그대로 기록으로 남겨놨습니다. 어떤 나라의 정치사가 자기들의 훌륭한 지도자들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적어 놓습니까? 어느 분의 자서전이 이렇게 스스로의 죄악사를 낱낱이 고하고 회개를 요구합니까? 이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했지만 엄청나게 정직한 자기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놀랐습니다. 21세기에 이르기 까지 모든 나라의 역사에 관한 논쟁이 끊임이 없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이스라엘 역사는 정직합니다. 이들은 이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봄이 있었다. 기나긴 여름이 있었다. 추수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혹독한 겨울이다. 그렇게 정직하게 역사의 흐름을 이야기 합니다. 이처럼 겨울에 씌어진 책들이 많지만 특히 예언서가 이 겨울에 쓴 책들입니다.
오늘 예레미야 애가서는 아주 짤막한 글 속에 이스라엘 역사가 담긴 혹독한 겨울의 모습을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애가서 1장, 2장, 그리고 4장의 문장 출발은 히브리어로 “아 슬프다”(에카) 입니다. 이 말이 곧 애가입니다. 그리고 3장과 5장은 첫마디를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라고 썼습니다. 히브리서 성서는 첫 마디가 보통 본서의 제목이 됩니다.“아 슬프다!”라는 말이 애가서의 제목인데, 슬프다는 형용사를 명사("키노드")로 바꿔서 애가라는 말로 썼습니다. 애가라는 말은 문학이나 음악적인 용어로 ‘엘리지"(elegy)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음악적으로 표현을 하면 예레미야 애가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지막 엘리지 입니다. 마지막 애가, 비탄사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써 놓았습니다.
그네들의 고백적 비탄사입니다. 우리의 혹독한 겨울의 역사를 주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 이 겨울철을 그냥 지나게 하시렵니까? 우리에게 봄은 없습니까? 상황은 이러합니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침략으로 인해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어 예배 할 곳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도 도둑을 맞았습니다. 제사장은 예배를 들이다가 바벨론 군인들의 총칼에 죽습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얼마나 핍박을 받았느냐하면 어린 젖먹이가 엄마 젖을 빨다가 젖이 없어서 혓바닥이 입천장에 닿을 정도로 말랐답니다. 길거리에 유아들이 득실득실 하는데, 사람들이 먹을 것을 주지 않습니다. 차라리 너무 배고파서 굶어 죽느니 한 칼에 맞아 단번에 죽는게 나을 거랍니다. 아나오는 젓을 빠는 젖먹이가 너무도 불쌍합니다. 본인도 배고프다 보니 젖먹이는 어머니가 자기가 낳은 아이를 잡아먹습니다. 어디에선가 들어 본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 역사를 읽어보면 옛날 임진왜란때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제시대 혹독할 때 우리 할머니들이 정시대란 이름으로 억지로 끌려가 이런 험악한 일을 경험했습니다.
6.25 전쟁으로 우리가 먹을 것이 없이 피난 다닐 때에도 이와 비슷한 굶어 죽는 아기들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굶어 죽는 것 보다 차라리 한 칼에 죽임을 당했으면 좋겠다고 고백한 경험도 있습니다. 오늘 애가서에 기록된 애가, 엘리지, 비탄가의 모습이 속국이었던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 지금은 세월이 바뀌어 거꾸로 강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서 범죄자가 되어 이와 똑같은 잔혹한 행위를 저지릅니다. 팔레스타인 어머니들이 울부짖는 애가가 오늘 애가입니다. 우리는 평안하게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온 땅에 가난으로, 힘이 없어, 잘못 태어나,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당하고 입에 풀칠도 못하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전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한 문학가가 이 사람들을 방문해 실사한 내용을 오늘날의 애가로 쓴다고 하면 뭐라고 표현할까요? 수많은 비슷한 이야기를 쓸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그냥 구약성경 기자가 하나님과 온 세인 앞에 내어 놓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고통 받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이런 지경에서 지금 뭐하십니까? 이런 절규일 것입니다. 애가서 5장 마지막 절에 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5장 마지막 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습니다. 우리에게서 진노를 아직도 풀지 않으시렵니까?". 애가서 끝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너무 고통스러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당신의 아들인 나를 버리십니까!" 라고 절규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서에서 읽는 예수님의 마지막 애가의 말씀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애가와 예레미야의 애가, 끝이 똑같아요. 단 예수님의 애가에서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답이 없으시니까. "저를 받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마무리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침묵 속에 예수의 죽음을 받아서 부활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예레미야 애가서는 "주님 우리를 정녕 떠나시는 것입니까? 도대체 언제 오시렵니까?"라며 탄원하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레미야 애가가 답으로 받은 것은 그 뒤로 약 500년이 지나서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을 빌어 표현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약속된 메시아, 곧 구세주로 온 것이 그 뒤 500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은 혹독한 겨울을 지나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숨지기 않고, 모두 세상에 보였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꾸미지 맙시다. 잘한 역사, 잘못한 역사 모두를 낱낱이 보여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평가하게 합시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닌 이러한 민족의 담대함, 정직함은 우리가 본 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또 하나 제가 이스라엘 백성과 역사에 대해서 아쉬우면서 경의를 표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유대백성이 아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람 때문에, 유대 땅에 오신 그 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그 분, 유대민족을 넘어 온 세상을 구하시겠다고 오신 예수 때문에, 민족이 전혀 다른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인 구약성경을 기독교신앙의 국정 교과서로 받아들이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도 그 분 메시아가 안 왔다고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 정도면 메시아가 오신 역사아는 새로운 구약 후편을 받아 들일만 하는데, 후편은 여전히 기다림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유대 백성이 해결 할 일이고, 우리는 오늘 예레미야 애가서가 이야기 했던 것처럼 "나의 하나님, 왜 우리를 버리십니까?" 라는 한탄에 대해 예수께서 하신 대답을 찾아 위로를 받읍시다. 그 분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들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러 왔다"고.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바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이 답변하고 설명하십니다. 오늘의 누가복음서 본문을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이 비참하게 집단적으로 죽는 모습이 아니라 어느 한 동네에서 과부인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과 단 둘이 살다가 그 아들이 죽은 비극의 이야기입니다. 이로 인해 과부는 더 이상 살길이 없어 눈물을 쏟아냅니다. 이 과부가 사는 동네는 나인성이라 이름하는 동네입니다. 그 동네 사람들 모두는 슬픈 모습으로 상여 하나를 메고 나옵니다. 그 안에는 죽은 독자 아이가 있습니다. 이 죽은 아이의 어머니는 뒤 따라 오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도 슬퍼합니다. 아마 이 여성은 과부인데 동네에서 칭찬 받았던 착한 규수 이었던 것 같습니다. 독자인 아이가 없으면 엄마가 생계를 못이어가니 굶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로마제국 치하에서 아주 어려운 식민지 백성의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는 불쌍히 여기시고, 상여를 멈춘 다음 죽은 아이에게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젊은이가 살아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보고, 하나님께 호소겸 감사를 드림니다. 당신이 우리를 떠난 줄 알았더니 당신이 보낸 예수라는 사람이 오늘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군요. 참 오래만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그래서 모든 동네가 놀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점이 하나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눈물 흘리며 구원을 청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구원의 생명을 주셨을까요? 예수님은 병을 고칠 때 마다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말씀이 곧 치유의 역사였습니다. 자기 아버지인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사람이 있으라!" 했더니 빛이 있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 예수도 죽은자에게 "일어나라!"고 했더니 죽은 자가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이름은 요한일서에 의하면 ‘사랑’(요한일서 4 :8, 16)이십니다. 그럼 사랑이신 아버지의 아들인 예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자기 백성을 구하신다. 그건 문자적 뜻이고요, 신앙으로 본 예수의 이름은 사랑이십니다. 아버지가 사랑이면, 아들도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사랑으로 창조하신 분이고, 그 아들 예수는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사랑으로 살려내는 분 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사랑입니다. 무슨 사랑이냐면 일어나라고 말씀하신 예수가 아니라 일어나라고 그랬을 때 예수님 자신이 품은 본성 곧 "구원하는 사랑"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으로 전하셨지만 예수님 부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 다 알고 계시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씀의 뜻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하시는데 그냥 말씀으로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을 하늘에 놔두고 땅을 향해서 사랑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신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다 보니 직접 세상에 내려와서 세상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에서 말씀하신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은 땅에 와서 사람의 몸이 되신 사건으로서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사랑의 화신이 되신 예수께서 오늘 환자를 향해서 말합니다. 죽은 자를 향해서 "일어나라"고. 달리 말하면, "내가 오늘 너희 안에서 잉태할 것이다. 하나님의 살리는 생명의 사랑이 오늘 네 죽임 속에 들어와서 죽음을 몰아내고 너를 살린다"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그 뜻이 바로 "일어나라!"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생명의 하나님이 죽은자 속에서 새생명으로 잉태하신다 말입니다. 예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 말씀 전체로 보면 이제부터 항상 새롭게 잉태하는 사랑, 몸이 되는 사랑, 새 세상이 되게하는 사랑,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의 환자분을 찾아가서 기도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 하노니 이 환자가 낫게 해주십시오"라고. 그럴 때 진정한 뜻은 지금 내가 기도로 간구드리니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든 고쳐주십시오!" 라는 뜻이 아닙니다. "당신이 오늘 사람의몸을 입고 이 환자에게 오셔서 환자가 앓고 있는 질병을 스스로 앓으시고 이 질병을 몰아내서 이 환자로 하여금 병에서 낫게 해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성탄절은 기독교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니까요. 이 출발에서 우리 기독교 신앙이 시작됩니다. 성탄이 없는 기독교 신앙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이제 하늘에 계시지 않고 땅으로 오셨습니다. 사람 속에 오셨습니다. 앓고 있는 사람, 과부, 죽은 자, 병든 자, 가난 한 자, 눈먼 자, 배고픈 자 모두에게 오셔서 함께 배고프시고, 함께 죽으시고, 함께 아파하시고. 그러면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로만 머믈지 않으시고, 아파하는 것 대신에 병 고침을 주십니다. 배고픈 것 대신에 먹을 것을 주시고, 죽음 대신에 부활생명을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 온전하게 해 주십니다. 그런 사랑을 "생명을 주시는 사랑"이라 이름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사랑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직접 몸이 되신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감사합니다"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삼아, 서로간에 사랑을 고백하고 싶을 때, 이웃의 몸이 되어주는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자기 자신 만이 아니라 이웃과 가족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땅이 없는 하늘, 그건 사랑하며 살곳이 아닙니다. 행실이 없는 입방아 속의 사랑 그것 또한 사랑의 말이 아닙니다. 당신을 사랑하면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당신 속에 들어갑니다. 당신의 삶 속에 들어가겠습니다라고.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사랑때문에 인간이 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들어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의 몸이 되게 하십니다. 그것을 성경 말씀에는 영광이라고 이름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랑을 "화육의 사랑"이라한다면, 사랑받아 구원에 이른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케 되는 사랑을 "영광속의 사랑"이라 합니다.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만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우리 인간을 사랑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땅을 살아가면서도하나님의 품을 닮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믿고 감사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고, 대신에 사랑을 억지로 만들고, 이기적 욕망의 도구로 만든 사건이 있습니다. 아까 구약의 이야기, 우리나라 역사 이야기, 지금 우리 주변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고 싶은데 너무 비참한 현실로 인해 진정으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아주 비근한 이야기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아프리카 서북부에 서 사하라 지역에 조그만 나라가 있습니다. 이름은 모리타니아(Mauritania) 입니다. 이 나라 상층부에는 모르코가 있고요, 사하라 사막 지방의 땅입니다. 남한의 열배, 한반도의 5배 정도 되며, 인구는 350만 되는 흑인과 백인이 섞인 나라입니다. 프랑스의 식민지였습니다. 이 나라의 사랑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국가 국민의 99.8가 모슬렘입니다. 이곳은 부계 사회가 아니라 모계 사회입니다. 어릴 때 부터 결혼 할 때는 사촌간, 육촌간 등의 근친결혼 만을 고집 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 집안의 재산과 자존심이 다른 곳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근친결혼을 하는 전통이 있어왔습니다. 근친결혼의 주체자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최고입니다. 어머니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첫 번째 결혼은 의무이고, 두 번째, 세 번째부터는 자유 결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당사자와는 무조건 이혼해도 된다고 합니다. 단 남자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원하면 가능합니다. 철저히 모계사회입니다. 그런데 남자들이 사회전통으로 보복을 합니다. 남자들이 원하는 것은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그 사회가 만든 여성의 미인상은 살이 많이 찐 비만의 몸에 있다고 합니다. 여성은 비만 할수록 아름다운 여성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식욕 촉진제도 복용하고, 많이 먹어서 몸이 불어나게 합니다. 여성으로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살이 뜅겨 나온 곳을 성적 매력 넘버원이라고 남자들이 규정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당뇨, 심근경색, 중풍 등으로 단명합니다. 이것이 미인의 진정한 모습입니까? 자기들의 나라에서는 미인 일지 모르겠지만, 전 세계적으로 보면 그것은 여성 차별이며, 속박입니다. 아까 여성이 남성을 결혼 제도로 속박했듯이 여성은 이런 남성의 성적 속박 속에 살아갑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민족적, 토속적 관례라고 설명하지만 우리 눈에서 보면 그런 아름다움과 사랑은 진정한 아름다움도 사랑도 아닐 것입니다.
제가 진심으로 사랑하면 저는 헌신적으로 제 목숨을 다해서 제가 사랑하는 사람 속에 몸이되어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처럼 운명을 같이 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인 상대방과 함께 살려고요, 그것이야 말로 진실 된 사랑일 것입니다. 욕망에 따라 사고 버리는 사랑, 관상용으로 즐기고 놀림의 대상으로 삼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함께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랑, 그것이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랑입니다. 그 분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사랑하셔서 죽지 않고 생명을 얻게 하신다구요.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을 받았으니 우리도 사랑하고 싶은 사람 안에 들어가서 육화, 성육신 하면서 사랑하십시다. 마음도, 뜻도 함께 들어가서요. 그러면 그런 사랑은 살립니다. 자신도 살리고, 상대방도 살립니다. 죽은 자도 살아납니다. 이런 사랑 어렵겠지요? 이 사랑이 실천되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설령 꼭 그렇지 못 하더라도 그 나라 근처에 라도 갈 수 있는 사랑을 한번 실천해 봅시다. 온 땅에 사는 사랑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 이웃사랑을 듬뿍 받고 싶은 사람들, 우리도 그런 사랑 받고 주며 살고싶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살림’의 사랑입니다. 그 분은 사랑하는 자와 운명을 함께 하십니다. 죽음을 넘어서 부활생명의 길로 함께 인도하십니다. 그분이 그래서 구세주가 되십니다. 한 템포라도, 한 발자국이라도 이런 사랑을 서로 주고받으며, 기쁘게 맛보며 사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늘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진실 된 사랑에 감사합시다. 구원을 베풀어 주신 사랑 감사합시다. 이 사랑 풍성히 받아서 서로 진실로 사랑하며 살게 축복하여 주십시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사랑하며 삽시다. 하나님이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십시다. 그 길로 인도하시는 우리 주님께 감사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