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믿음이 살려낸다

2014년 9월 28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이사야서 49:1-6 
너희 섬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희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셔서, 나를 주님의 손 그늘에 숨기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셔서, 주님의 화살통에 감추셨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네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 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았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께서 나를 올바로 심판하여 주셨으며, 내 하나님께서 나를 정당하게 보상하여 주셨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그의 종으로 삼으셨다. 야곱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모으시려고, 나를 택하셨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귀한 종이 되었고, 주님은 내 힘이 되셨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종이 되어서,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네게 오히려 가벼운 일이다.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 아멘. 
로마서 10:9-17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주님, 우리가 전하는 소식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15:21-28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마침,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그 지방에서 나와서 외쳐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간청하였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나아와서, 예수께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아멘. 
설교문
우리는 예배 찬송을 부르며 또 성가대 찬양을 들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도 기뻐합니다. 우리는 찬송을 부르면서 그 소리를 직접 귀로 듣습니다. 그 소리를 분석해 보면, 우리가 직접 노래로 부르는 소리, 성가대가 직접 부르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소리를 함께 듣게됩니다. 우리 교회와 같이 잘 지어진 건물에서는 벽과 공간에 찬양의 소리가 부딪혀 다시 우리 귀에 들려오는 울림의 소리를 듣게됩니다. 이 두 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으면 행복하고, 두 소리를 한 공간이 함께 낼 수 있으면 이들 소리를 발하고 듣고 또 감상하는 우리는 더 행복합니다. 우리가 산에가 소리쳐 보세요. 죽은 산은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산은 우리가 말하고 소리를 내는 대로 다시 울림이 되어 되돌아옵니다. 산 울림이지요. 산 만이 아니라 음향이 좋은 공간은 우리가 하는 소리를 받아서 다시 되치는 반사음을 발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에코’(Echo)라고 합니다. 이렇게 직접 듣는 소리, 부딪혀서 다시 나오는 에코의 소리, 두 소리를 함께 듣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읍니다. 오늘 로마서를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믿음은 구원을 받게 하고, 죽은 자도 살아나게 하고, 배고픈 자가 먹을 것을 먹게 합니다. 그리고 믿으면 사건이 생깁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오늘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은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그 음성을 듣고 너무 좋아서, 너무 기뻐서, 그리고 너무 희망이 넘치기 때문에 우리 마음 속에서 다시 하늘을 향하여 감사의 음성을 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받은 우리가 축복에 대해서 감사로 다시 튕겨 내는 소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감동하여 다시 내는 소리를 신앙의 에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발하는 답변의 에코가 곧 믿음입니다. 믿음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서 하나님께 믿겠습니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은혜를 주시는데 응답이 없는 것은 우리가 믿음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든 응답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한 번도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신 적도 좋지않은 것을 은혜라고 주신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꾸짖으셔도 구원을 위해서 꾸짖으셨고, 좋은 격려의 이야기를 많이 하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에 대해 한 마디의 응답도 없나요? 산도 산울림이 있는데, 사람은 왜 울림이 없나요? 울림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서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반응이요, 반사하는 소리요, 반사하는 표정입니다. 소리만 에코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음악회나 미술전람회에 가면 그냥 무덤덤하게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보지 않으시죠? 화폭을 관람하는 여러분의 얼굴에 다 반은하는 표정이 나타납니다. 그 표정 또한 에코라 이름할 수 있읍니다. 글을 읽고, 그 글에 대한 응답을 글로 되쓸 수도 있지만 또 마음의 소리로, 얼굴표정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표정이 나오죠, 그 표정이 에코입니다. 이 표정을 화가나 음악가가,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고, 자기가 준 소리를 되받아주니 참 자신도 기쁘다며 즐거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도 기쁘다고 하는 말을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라고 표현합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이 말씀을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에 대한 믿음이라는 감사의 표시가 있으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입으로 감사하다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겠다고, 찬양하겠다고 표현하는 것이며, 그것이 믿음의 첫 단계입니다".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함께 하려면 공동의 분모가 있어야 합니다. 예를들어 사도신경을 우리가 함께 고백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틀입니다. 우리가 함께 공동으로 찬송을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찬양입니다. 성경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믿음의 핵심내용 입니다. 함께 입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함께 믿음의 에코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코를 잘 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보시고 에코의 그릇에 풍성하게 축복을 담아 주십니다. 
그렇지만 입으로만 하는 에코가 온전한 믿음은 아닙니다. 진실로 믿으면 마음속으로부터 고백이 되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지만, 우리 안에서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바꿔주시는 우리의 성령님이십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바꾸어 주셔서 기쁘게 찬송으로, 기도로, 그리고 감사로 에코를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가슴 속에서 그리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에코를 진실 된 믿음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입으로 그리고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믿음을 고백합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에코를 찬양과 기도와 선교와 봉사로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서 본문에 나와 있는 비유 하나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가나안 출신 한 사람의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서는 가나안 출신이 아니라, 그리스 출신으로 가나안에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가나안 사람이든, 그리스 사람이든 유대 백성들 눈에는 유대 백성이 아니면 모두 이방인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의 적통이 아닌 변두리입니다. 이방 사람들입니다. 특히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가나안땅에 입성 했을 때 원주민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잡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잡신의 대표가 풍요를 상징하는 ‘바알 신’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눈에는 가나안 사람들은 가난했고, 무식했고, 천박했고, 신도 제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백성은 헬라문화가 지배했던 시절의 경험이 있읍니다. 어렵게 살았죠. 로마시민이 아닌 백성임으에는 같지만, 특별히 그 중에서 가나안 족속은 인간 이하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여성은 더 지위가 낮았으며, 남편인 없는 여성, 즉 과부는 비참함이 훨씬 더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과부 이이기가 나옵니다. 딸이 하나 있습니다. 딸은 지금 귀신들려 정신병에 걸려 집에 누어있습니다. 귀신 들린 딸을 가진 천대받는 지역출신인 가나안의 한 여성, 이 여성이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께 옵니다. 와서 입으로 고백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 호칭하며 다가옵니다. 모든 유대백성이 고백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적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을 보고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자기를 지배하시는 주인, 이 땅의 왕이신 분, 다윗 왕조에서 나오신 분이라고 고백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가나안 사람과 유대사람은 완전히 출신성분 부터 다릅니다. 이 고백은 "나도 당신들 유대인들의 믿음생활의 반열에 들어 가겠습니다"라는 신호인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이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은 물론이고, 제자들 그리고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어떻게 천박한 가나안 여성이 우리 예수님을 보고 주님이라고 할까? 
그러나 그것은 입으로 하는 고백, 믿음을 향한 첫 번째 단계에 들어선 모습입니다. "우리 딸이 귀신 들렸으니 고쳐주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머릿속에는 가나안 사람이든, 유대백성이든 누구든지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고,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 분을 구세주로 모시면 구원을 받는다는 마음 뿐입니다. 이것을 전하기 위해 오셨고, 확신이 여인이 말합니다. "살려주십시오. 저는 이방인이지만 믿음을 가질 권한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누구든지 믿음을 구하면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예수님이 또 한 단계를 밟으십니다. "나는 온 백성의 믿음을 보고 구원하러 왔지만 먼저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러 왔다"고. 가나안은 아직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대는 아직 아니다라는 뜻이죠. 그러나 여자가 간청합니다. "모든 백성에게 저도 속합니다"라고. 예수께서 테스트를 마친 다음 또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자식들이며, 그 형제자매가 받아야 할 몫의 음식이 있는데 그 음식을 어떻게 개한테 줄 수 있느냐?" 이것은 비난의 극치입니다. 가나안 사람보고 개라고 합니다. 이 여성을 개라고 지칭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개라고 표현하는 것은 상상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개에게 음식을 준다거나, 개 같은 가나안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베플어 준다는 것은 상상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성이 다시 말합니다. 그 구원을 저에게 주지 않아도 좋은데 하물며 "개도 당신의 형제자매들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라도 먹지 않습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세상의 직제나, 사회의 제도나 구조가 아닌 부스러기입니다. 다만 그 속에 담긴 부스러기라도 먹으면 배를 채울 수가 있습니다라고 항변하죠. 마지막 예수께서 하신 답변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고. 입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진심으로 나를 믿었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리라고 하셨더니, 그 과부의 집에 누어있던 귀신 들린 딸아이가 나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예수께서 행하신 수많은 병 고친 이야기가 있는데 왜 성경 말씀에 하필 가나안 출신 귀신 들린 딸을 가진 여성, 천박한 여성, 개 취급 받은 여자를 주인공으로 등장 시켜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임을 알게되었읍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받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단,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을 신뢰하고 고백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울림(에코), 곧 믿음을 보고 구원하십니다. 특별히 가나안 인을 등장시킨 이유는 유대백성 말고 "모든 백성"에게 구원이 임하심을 힘주어서 전하려고 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빛으로 택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온 세계 만백성을 구원하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이스라엘아 들어라, 그대들은 빛이기 때문에 가나안 여성보다 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제가 빛 이야기를 하나 더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믿음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모든 민족의 빛은 이스라엘 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한 신앙의 빛이 하나 있었는데, 그 동방의 등불은 바로‘한반도’입니다. 특별히 그 빛은 서울이 아니라 평양에서 시작한다는 것이었읍니다. 평양이 우리 기독교 초기 선교의 핵심기지 이었습니다. 평양이 우리 기독교의 출발 지점입니다. 제가 실화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950년 6월 18일, 6.25 전쟁이 발발하기 일주일 전입니다. 평양에서 목회하셨던 대표 목사 열 네 사람이 공산당에 체포되었습니다. 이유는 공산당의 공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6.25 새벽 남친 직전인 새벽에 열두 명이 총살을 당했습니다. 한 사람은 정신병에 걸려 교회로 돌아왔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온전한 상태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열 두 명은 총살당했습니다. 교인들이 말합니다. 열두 명의 목사들은 예수 믿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고, 한 사람은 너무 심한 고문으로 인해 정신이 돌아버렸고, 마지막 한 사람은 예수를 부인하고 돌아왔구나 하고. 그 마지막 한 사람에게 배신자요, 배교자라고 딱지를 붙입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도 함께 끌려갔지만 다른 열두의 목사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총살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냥 살아 돌아왔습니다라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남쪽에서 육군 특무대가 평양에 도착했고, 이 순교 사건을 알고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 사건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마침 그 때에 이 열 두 명의 목사들을 직접 처형했던 공산군 장교인 소좌가 체포됩니다. 이 사람이 고백합니다. “내가 어떻게 열 두 명의 목사를 죽였는지 설명하겠습니다. 당신의 위대한 순교자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나요. 꼭 개새끼들처럼 훌쩍거리고, 낑낑거리고, 엉엉 울면서 죽어갔습니다. 살려달라고 아우성치고, 자신들이 믿는 신이 없다고 부정하고, 동료들을 헐뜯는 꼬락서니가 목사 같지 않아 분통이 나서 총살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은 나한테 대항을 하던 군요. 당당하게 싸우자고 하면서 용기를 내어서 하는 말이 나는 하나님을 배신할 수 없다면서 얼굴을 침을 뱄더군요. 열 네 명 중에 당당했던 그 한 사람은 총으로 쏠 수가 없어 살려 주었습니다.” 공산당 소좌가 고백한 이야기입니다. 어안이 벙벙했지요. 이 살아남 게 된 신 목사가 다시 말을 바꿉니다. "공산당 소좌가 거짓말을 한 것이고, 진실은 열 두 명의 목사는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고, 나는 배교해서 살아남았습니다. 열 두 명의 목사는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하얀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는 동료들을 살렸습니다. 내용은 그 동안 이 분들이 했던 설교, 신앙 간증이 있는데 이 분들이 배교했다고 하면 그 동안 예수 믿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는가라는 것과 동료들은 이미 죽었고 나는 살았는데 어떻게 동료들을 배신 할 수 있겠는가? " 이상한 휴머니즘이 발동됩니다. 비록 거짓말이도 죽은 열 두 명의 목사들은 잘했고, 자기는 잘못했다고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 있는 목사가 있습니까? 진실은 이것입니다. 이 배교했다고 한 목사는 너무도 당당하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공산당 소좌가 총을 못 쏠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이것이 실화의 한 부분입니다. 이후에는 신목사를 포함한 모든 분이 다 결국엔 총살당해 죽었습니다. 
이 작품속의 신 목사가 바로 실제인물인 평양의 남문밖교회 담임 목사인 이학봉 목사입니다. 이분의 아들이 60년 말~70년 대 초까지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성악가 중에 한 사람이라고 했던 이인범 교수입니다. 이 목사님의 따님 중에 한 분이 남쪽으로 내려와 가족을 이루었습니다. 이 분이 이옥현이라는 분입니다. 이 분과 결혼한 사람이 김찬도라는 분입니다. 이 분은 일제시대 서울대 농대에서 교육을 받고,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에서 용정 중학교 교사를 하셨습니다. 이 분의 딸이 한양대학교 음대 교수로 은퇴하신 김은경 교수입니다. 이 분의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가 평소에 하시는 말씀이 용정에서 독립 운동을 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아주 똑똑한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강원용과 문익환 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김은경 이라는 분의 오빠가 재미교포 작가 리차드 김이라고 하는 김은국입니다. 이 분이 바로 <순교자(원제 The Martyred)> 의 작가입니다. 이 작품은 미국 아이오와대 문예창작 석사학위 과정 졸업 작품으로 제출 한 것입니다. 그 당시 이 소설이 발표되자 미국 평단과 언론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20주 동안 베스트셀러 위치를 기록했고, 그 당시 문학평론가 펄벅이 이 책이 너무 좋아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했다고 합니다. 뉴욕타임스 기사를 보면 “도스토옙스키의 유신론과 와 카뮈의 무신론의위대한 전통을 함께 이어받고 논리를 소설속에 전개한 훌륭한 작품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서평을 실었습니다. 
김은국 작가는 순교자라는 작품을 통해 질문합니다. 과연 순교자는 누구입니까, 우리 외할아버지 입니까, 아니면 열 두 명의 목사들입니까? 누가 진심으로 신앙을 고백했습니까? 신 목사라는 이학봉 목사님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배교자이고, 죽은 사람들은 진실로 믿음의 목사님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달리 진실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과 사람 앞에서의 휴머니즘이 갈등을 일으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저자도 답이 없습니다. 진실로 믿음을 고백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살아 있는 믿음의 소유자는 누구입니까? 어떻게 믿어야 하나님 앞에서 진실 한 것입니까? 사람 앞에서 믿음과 하나님 앞에서 믿음은 무엇입니까? 누가 순교자 입니까? 아까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의 축복을 받았지만 가나안 동료들로부터는 배신자입니다. "우리를 개 취급하고, 짓밟는 다윗의 자속이라는 사람에게 가서 귀신들린 은총을 받았다고 네가 동네에 와서 축복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느냐!"면서 말이죠. 이 여인이 뭐라고 답변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의 딸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했다는 것입니다. 성가의 제목으로 자주 사용되기도 하는 "하나님 앞에서"라는 라틴어는“코람 데오(Coram Deo)”입니다. 그렇다면 "사람 앞에서"라는 그 말은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 말을 만들어 보면 “코람 호모(Coram Homo)”가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인데, 그 은총에 대해서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만은 진정으로 마음으로 고백해라. 하나님 앞에서 원하는 것은 자기 가장 중심인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하나님의 관한 답변을 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실로 답변하는 사람을 순교자라 이름 할 것입니다. 누가 순교자입니까? 누가 믿음의 확신을 주는 자입니까?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해서 사람 앞에서, 세상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여러 가지 에코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받은 은혜가 옆에 있거나, 뒤에 있거나, 앞에 있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주신 하나님이, 그 분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들 "마음 속"에 들어와 계셔야 합니다. 이 분이 우리 안에 계셔야 우리가 그 분의 은총으로 “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 분이 밖에 있는데도 우리 인간의 힘으로만 어떻게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믿음을 갖는 사람은 입으로 고백하지만 동시에 진실로 고백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를 가슴에 붙들고 사셔야 합니다. 우리가슴에 모시고 살면 그 다음에 나오는 "에코" 는 그 분과 함께 "은혜와 아멘"으로 묻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어려우시지만 힘내세요. 살아가는 상황이 어렵더라도 믿음을 고백합시다. 간구하십시다. 그리고 믿읍시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여, 제 마음 속에 오시옵소서. 저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어떤 환경에서라도 생명의 주를 모시고 살겠습니다"라고. 이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에게 축복으로 다가오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본회퍼의 성찰적 신앙은 '사회성 신학'으로부터"

독일 나치 정권에 저항하며 행동하는 신앙의 전형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본회퍼의 삶을 다룬 영화가 상영 중인 가운데 신학계에서 본회퍼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의롭다 함을 얻은 백성은 이웃사랑에 인색해서는 안돼"

한국신학아카데미 2025년 봄학기 '혜암 이장식 교수 기념 학술세미나'가 11일 오후 서울 안암동 소재 세미나실에서 '구약 율법과 신약 복음의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니체는 인간은 똑같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신학아카데미 김균진 원장이 10일 새해 칼럼을 발표했습니다. 김 원장은 이 글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정국을 바라보는 한 신학자로서의 자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