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예레미야서 17:5-10
"나 주가 말한다. 나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는 황야에서 자라는 가시덤불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소금기가 많아서 사람이 살 수도 없는 땅, 메마른 사막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뿌리를 개울가로 뻗으니, 잎이 언제나 푸르므로, 무더위가 닥쳐와도 걱정이 없고, 가뭄이 심해도, 걱정이 없다. 그 나무는 언제나 열매를 맺는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심장을 감찰하며, 각 사람의 행실과 행동에 따라 보상하는 이는 바로 나 주다." 아멘.
에베소서 5:15-20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아멘.
마태복음서 19:16-26
그런데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서 물었다.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한 분은 한 분이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예수께 물었다. "어느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그 젊은이가 예수께 말하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서, 말하였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을 눈여겨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이 일을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아멘.
설교문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것으로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스포츠를 통해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우연히 인천 아시아 게임 농구 결승전을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보통은 스포츠 경기를 보면 구경꾼 처럼 시청하며 보는데 그쳤는데 그 날은 제가 마치 농구선수가 된듯이 몸과 마음이 농구 경기장에 있었습니다. 금메달이 확정되기 마지막 순간까지 숨 막히는 시간이었습니다. 경기 종료 10여초를 남겨놓은 시간이 금메달과 은메달을 결정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제 마음이 차라리 현장을 안 봤으면 좋겠다 할 정도의 조바심이었습니다. 이 경기를 보면서 느꼈읍니다. 마지막 몇 초가 경기의 승패를 결정하는 구나. 이와 같이 우리의 삶도 마지막 순간이 결정하겠구나. 그렇기에 우리는 몇 초 밖에 안 되는 순간이지만 이 시간을 아끼며 최대한 활용해야겠구나. 그냥 짧은 시간이라고 버렸다가는 큰일 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에베소서 말씀에도 세월을 아끼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세월을 선용하는 방식으로 아끼라는 뜻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시작해서 과정이 좋지 않아도 마지막만 잘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과정 처음부터 차곡차곡 잘 쌓아서 마지막 피날레를 제대로 장식합니다. 처음 시작하여 온 과정이 마지막 순간까지 제대로 와야 합니다. 우리도 마지막만 잘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온 과정을 잘 살아야 합니다. 보람되게 삽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간에 대한 축복의 진면목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시간입니다. 괜찮다고, 건강하다고 시간을 자신의 멋대로 이해관계에 따라서 허비하지 마십시오. 마지막 순간까지, 그 때까지 생명의 시간으로 살아야 합니다.
또 다른 하나의 경험입니다. 아시안 게임 폐회식 당일 날 전혀 예상치 못하게 소위 북한의 권력 3인방이 남한을 방문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방문 보도를 보면서 데자뷰, 즉 착시현상 같게 느꼈습니다. 저게 사실인가? 어제까지 죽일 듯, 살릴 듯 난리를 쳤는데 갑자기 웃으면서 남북이 서로 도우며 잘하자고 이야기 합니다. 세상에 이럴 수 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희망이 있었습니다. 이번 아시안 게임에서 북한이 종합순위에서 10위 안에 진입을 목표했었는데, 그게 성사되지 않았다면 기분이 좋지 않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북한이 잘해서 종합순위 7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렇게 성적이 오르고 그것을 기화로 초특급 대표단이 오게되었으니 잘했습니다. 여하튼 이번 방문을 통해 세상이 잠시나마 이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 남북관계에도 따뜻한 봄이 오고, 서로 싸우면서 봄을 맞지 말고, 얼음 녹듯이 "사람의 얼굴"을 가진 남북간의 접촉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남북관계는 북한이 좋을 때, 남한도 좋을 때, 서로의 상황이 좋을 때, 세월을 잘 활용해서 좋은 남북관계를 만들어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싸우지 말고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서 인내하고, 좋을 때를 놓치지 말고 서로를 위해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한반도에도 화해와 상생의 피날레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간에 있었던 일들을 토대로 느낀 것을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면서, 어떻게 때를 활용하는 것이 좋을까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축복을 어떻게 누리면 좋을까요? 이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오늘 성경말씀에도 한 이야기로 나와 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서에 보면 한 젊은이가 등장합니다. 그 젊은이는 신앙이 좋고, 사회적으로도 모범적이고, 재능도 뛰어나며 신분도 좋은 부자청년 입니다. 성서학자들 평가에 의하면 이 사람은 틀림없이 바리새파 사람일 것이랍니다. 자기들의 의를 주장하는 고집 빼고는 모든 면이 좋다고 칭찬받는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그런 젊은이가 예수께와서 하는 말입니다. "나는 다 가진 것 같습니다. 시간도, 재산도, 재능도, 신분도 다 가졌는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영생을 얻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습니까?"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반문입니다. "십계명을 다 지켰느냐?". 다 지켰다는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물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영생에는 못 들어간다"고. 자기가 믿었던 신앙의 구절을 다 설명했는데도 그것 가지고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젊은이가 묻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어라. 빈털터리가 되어서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십니다.
재산을 팔아서 현금으로 갖고 있지 말고 다 나누어 주어라고 하십니다. 사회에 환원하여라. 그리고 완전히 가난한 사람이 되어서 나를 따르라. 그렇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처럼 하면 저 개인적으로도 영생을 못 얻을 것같습니다. 저는 가진 것도 없지만, 제가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 팔수가 없습니다. 조금마한 것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중에 이렇게 해서, 가진 것 다 팔아서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그 대신 영생을 얻고 싶습은 분 계싶니까? 아니면 영생을 미루더라도 이 땅에서 가진것 다 가지고 살고 싶으십니까? 예수님은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영원한 구원 받으라고 하셨을가요?
지난 2000년 교회 역사와 견해와 입장을 보면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다양합니다. 카톨릭 교회의 역사에서 나온 현실 이야기입니다. 말씀대로 살자고 결단 합니다. 그래서 재산을 갖지 않았습니다. 인간으로서 완전하게 살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재산을 포기해야 한다며 자발적 가난을 실천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가진 것을 전부 나누어 줍니다.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결혼까지도 않으며 홀 몸으로 경건하게 살아가고자 결단합니다. 이러한 결단을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까요? 실천의 장소로 생긴 곳이 수도원 입니다. 수도원이 생긴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이 성경말씀도 그 중에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곧이곧대로 급진적으로 해석해 생긴 수도원이라는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교회역사를 보면 세상이 죄악에 물들고 교회와 성직자가 타락할 때 누가 나서서 교회를 개혁했는지 아십니까? 바로 수도원이, 수도원 운동이 개혁했습니다. 수도원은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들이, 아주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고 명상만 하는 곳인 줄 알았는데, 바로 그곳에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생명력이 꽃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아니 그것이 역사의 진실입니다. 지금도 수도원은 혁명적 변화를 유도하고 유지하는 묘한 영적인 곳이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한국을 방문하셨던 프란체스코 교황님도 예수회 수도원 출신입니다. 이 본문말씀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기가 어렵죠. 그래서 이 말씀에 대한 타협적 현실적 해석이 있어왔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재산을 다 팔고, 권력도 전혀 잡지 않고, 재능도 다 내어주며, 아무 것도 갖지 않고서 세상을 살아갈 수 가 없다. 그러나 성경 본문대로 그렇게 살아야 할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바로 신부, 목사, 그리고 아주 헌신을 맹세한 교회의 직분 자들이랍니다. 예를들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거기에 속한 원조들일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말씀대로 그렇게 살아야 하는 부름받은 특수한 계층입니다. 일반 교우들은 적절히 가감해서 살지 이렇게 살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늘 최대치를 말씀하셨지 최소치를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최대치는 특수한 계층에게 실천하라고 전해준 말씀이고, 일반 교우들은 조금 가감해서 살도록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만은" 다 버리는 뜻을 품고 살게하자는 것입니다. 이 해석의 선두 주자 중의 하나가 막스 베버(Max Weber)입니다. 평신도 사회학자이며, 경제학자 그리고 신학자입니다. 이 사람에 말에 따르면 예수님은 늘 최대치를 말씀하셨고, 이 최대치는 특수 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이고, 일반 성도인 우리는 이것의 절반만이라도 갖고 살되 마음은 늘 최대치로 살아가라는 해석을 제안합니다. 특별히 사업가에게는 돈과 관련하여 , 정치인에게는 권력과 관련하여 이런 요구나 이야기를 하면 세상이 안 돌아 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막스 베버와 같은 타협적 해석도 있어왔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판단해 보건데 신학사나 해석학의 다양한 역사를 보면서 해석상 오직 하나의 정답은 없는것 같습니다. 단 예수님의 심정은 헤아리겠고, 저는 부족한 사람이라 말씀대로 실천은 못하겠습니다. 저도 이에 대한 합당한 답을 찾고 찾다가 크게 도움되는 정답하나를 제시한 분이 있습을 알게 되었읍니다. 바로 칼 바르트(Karl Barth)라는 신학자 입니다. 이 분의 이야기를 빌어 제 고백을 하고자 합니다. 이분 해석은 재산을 팔아라. 권력을 없애라. 가족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셔야 할 삶의 중심자리에 재산을 가져다 놓으면 안 된다는 뜻이랍니다. 곧 하나님이 주인이시지, 재물이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재산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다만 그 축복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라고 준 수단으로써 축복이고, 도구로써 축복일 뿐이지, 그 재산을 하나님처럼 주인으로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어떤 축복과 어떤 세상살이에서도 인간의 역사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하나님 중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며, 그 하나님이 주신 모든 축복은 선한 삶을 위해 쓰라고 주신 도구입니다. 축복의 도구를 원조와 혼돈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계실 자리에 재산을 가져다 놓으면 그 재산은 인간이 만든 신이 되고, 그 신을 우리는‘우상’이라고 이름합니다. 오늘 예수의 말씀은 우상화 시킴 아니 우상화 됨, 그것을 없애라는 뜻입니다. 저는 여기서 질곡에서 완전히 해방을 받는 느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돈 좀 가졌다고 시기질투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권력을 좀 가졌다고, 재능을 좀 가졌다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시기질투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선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이 땅을 하나님나라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 부자 청년의 경우에는 이 말씀의 뜻은 이러할 것입니다. 너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네 중심에는 재산이 있고, 재산을 빙자하여 구원을 받으려고 하였다. 그런 구원은 없다. 따라서 선한 사람을 위해서 재산을 팔고, 그리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런 취지의 말씀일 곳입니다. 허나 그 청년은 근심이 되어서 떠나 갔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그가 재산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고 또 완전한 사람이 되기가 불가능 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영생"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진 지혜의 최고를 발휘하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기 때문에 과거에도 계셨습니다. 우리 조상 때에도 하나님, 지금도 하나님, 우리가 죽은 이후에도 똑같은 하나님 이십니다. 그 분의 영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영역과 다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든 시간을 창조하시고 마감하시는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의 시간을 뭐라고 표현하면 될까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우리가 만든 시간 개념입니다. 이것으로는 하나님의 시간을 표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통시적으로 한통으로 되어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영원한 시간"이라고 하며, 그 공간을 "영원한 나라"라고 표현할 뿐입니다. 이 영원이라는 말은 시간의 길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영원"이라고 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살려고 하면 그 바탕인 하나님 시간과 공간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삶의 바탕을 하나님 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 안에 살자면, 현재 가지고 있는 재산이 영원한 재산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이 가진 것이 어떻게 완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안에 산다는 말은, 아니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에 사신다는 말은, 우리가 완전하신 하나님의 품성을 갖고 살아간다는 뜻이고 또 완전하신 하나님이 불완전한 우리의 삶을 완전으로 이끄신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셔야 합니다.
지금은 서기 2014년, 단기 4347년입니다. 4347년 전에 저는 이 역사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단기 9999년이 되더라도 저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계실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느 때든지, 하나님의 시간대에 속한 사람은 누구든지 회개하고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이 계신 공간과 시간을 영원한 시간과 영원한 나라라고 하며, 거기에 계신 하나님은 온전하며 완전한 분이라고 표현 할 수밖에 달리 표현 할 방법이 없습니다. 다시 부자 청년이 묻습니다. "저는 영생을 얻고 싶습니다"라고.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 싶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하나님을 주인 삼아 살면 됩니다. 그 나머지는 그것이 재산이든 재능이든, 수단이요, 방법입니다. 우리 모두 온전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 살아야 됩니다. 그러면 재산을 팔아야 합니다. 재산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중요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주신 수단이요, 방법이고, 선물입니다. 그것을 주인이신 하나님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이런 착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어느 공간과 시간에서든 똑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맞지 않나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로 그거 아닌가요?
재산을 가지고, 권력을 가지고, 재능을 가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는 구원을 못 받는 말이 너무도 당연하지만 받아드리기 어려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는 비유 하나를 들려주십니다.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듯이 그만큼 돈 가지고, 재산 가지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요. 낙타가 어떻게 바늘귀에 들어가나요! 그 당시 중동에서 제일 큰 동물이 낙타였습니다. 성경에는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이슬람 경전인 쿠란에서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 갈 때까지 천국의 문은 악인들에게 닫혀있다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낙타는 그 당시 가장 큰 동물이었읍니다. 그 동물이 들어아야 할 문은 가장 작은 문인 바늘 귀입니다. 곧 천국으로 이끄는 문은 좁은 문입니다. 멸망으로 가는 길은 넓으나 천국 가는 길은 좁다고 했지요. 좁은 공간 중에 가장 작은 것이 바늘귀입니다. 낙타와 바늘귀의 조합이 조금 안 맞아요. 왜 낙타와 바늘귀입니까. 성서학자들이 연구 한 것을 보니 낙타의 헬라어는 카멜로스(kamelos)입니다. 그런데 낙타가 아니라 배에서 쓰는 동아줄을 헬라어로 카밀로스(kamilos)라고 합니다. 그래서 낙타의‘e` 와 줄의 `i` 차이입니다. 바늘귀에 동아줄이 못 들어가는 것이 논리적인데 그것을 안 쓰고 낙타로 썼습니다. 아마 잘못 사용한 것일지도 모르죠. 어디까지나 성서원어학적 연구입니다. 허나 낙타든 동아줄이든 어느 경우에도 바늘귀에 못 들어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중심인 나라에서 살고 싶으면 그 바탕은 하나님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시간에서 살고 싶으면 시간의 중심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어느 것도 중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곳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생명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기쁨도 아닙니다. 바로 이 사실을 예수께서 말씀하시려고 했습니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살면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재능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 대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피조물인 재능을 중심에 놓으면 그것은 인간에게 축복으로 주신 능력의 역할을 못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에베소서는 재미있는 우화로 설명합니다.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술에 취하면 악행에 빠지게 된답니다". 사실 마시면 취해야 지요. 그런데 취하면 악행에 빠진답니다. 차라리 취하려면 성령에 취하십시오. "성령에 취하면 입에서 노래가 나옵니다. 찬양이 나옵니다. 감사가 나옵니다". 무엇으로 취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릅니다. 부자청년에게 이 말씀을 대비해보면 이러할 것입니다. 재산에 취하면 망합니다. 하나님께 취하면 재산이 불어나 선한 일을 더 할 수 있습니다라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활용해서 살아야 합니다. 기량을 마음껏 발휘해야 합니다. 재능도, 재물도 아끼면 안 됩니다. 많이 활용하시고 크게 베푸십시오. 단,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속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관자요, 중심이요, 바탕이며 목적입니다. 그것만 확인하시면 모든 것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비극은 도대체가 무엇입니까. 내가 가지 것이, 내가 목표한 것이 ‘신’ 이기를 바라기 때문에 싸움이 벌어집니다. 세상의 전쟁은 인간 욕망의 신과 신들의 전쟁입니다. 각 나라, 각 사람이 만든 우상인 "우상 신"이고 싶어서, 신격화 시키는 절대 권력을 위해서 벌리는 것이 전쟁입니다,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생명, 그 생명은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완성하십니다. 내일의 생명을 내가 만들 수가 없습니다. 어제의 생명은 내가 스스로 창출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시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같은 분입니다.
그 분이 구약시대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바탕 하지 않는 삶은 황야에 있는 가시덤불 같다. 하나님이 주인인 생명은 마치 나무가 샘물가에 있어서 뿌리를 물 속에 담고 항상 잎은 푸르고, 더위와 추위도 걱정 없고 좋은 열매가 맺는 나무와 같다"고.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아름답게 길러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생명이 열매맺는 나라가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이 다음 시대에나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요, 과거부터 이니 이루어 졌고, 미래에도 이루어지고, 지금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영생은 바로 지금 누리는 하나님 중심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지금의 삶이 바로 영생이요 영생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지금도 온전한 시간이요 공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지금은 바로 "영원한 지금"(the eternal now)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이 나라를 선물로 받으십시오, 차지하십시오. 하나님의 분부요 초청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