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미래를 값없이 사라

2014년 10월 12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출애굽기 34:4-10 
모세는 주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대로, 돌판 두 개를 처음 것과 같이 깎았다.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그는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으로 올라갔다. 그 때에 주님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그와 함께 거기에 서서, 거룩한 이름 `주`를 선포하셨다. 주님께서 모세의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선포하셨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서 경배하며 아뢰었다. "주님, 주님께서 저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사실이면,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 백성이 고집이 센 백성인 것은 사실이나, 주님께서 우리의 악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주님의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너희와 언약을 세운다. 내가 너희 모든 백성 앞에서, 이 세상 어느 민족들 가운데서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놀라운 일을 하여 보일 것이다. 너희 주변에 사는 모든 백성이, 나 주가 너희에게 하여 주는 그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보게 될 것이다. 아멘. 
야고보서 5:13-16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병든 사람을 낫게 할 것이니,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9: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셔서, 바다를 건너 자기 마을에 돌아오셨다. 사람들이 중풍병 환자 한 사람을, 침상에 누인 채로, 예수께로 날라 왔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 "기운을 내라, 아이야. 네 죄가 용서받았다." 그런데 율법학자 몇이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을 품고 있느냐?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들이 알게 하겠다." 그리고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일어나서, 네 침상을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무리가 이 일을 보고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이런 권한을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아멘. 
설교문
제가 얼마 전에 읽은 글 한편을 소개함으로써 설교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글을 쓴 이는 거제도에 살고 있는 중증장애를 앓고 있는 한 아이입니다. 글의 내용은 이 아이의 기도 겸 고백입니다. "하나님, 저는 다행히 하나님이 보는 눈을 주셔서 바다도 내려다보고, 사람들이 빨리빨리 걸어 다니는 것도 봅니다. 눈이 있어 감사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제가 한 일은 아닌데 우리 아주머니들이 정성껏 밥을 지어 주셔서 제가 그 밥을 먹습니다. 저에게 먹을 수 있는 입을 주시고, 마실 수 있는 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아침마다 목사님 또는 선생님이 오셔서 예배를 인도하시는데 제가 그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 감사합니다"라고. 이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가 감사할 나름대로의 제목이 있고, 또는 불만을 터트리고 싶은 제목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 가능한 제목 중에서 이 아이는 감사의 이야기 만을 제목으로 뽑아 글을 썼습니다. 글씨체는 삐틀어져 있는데, 그 아이의 고백은 아주 반듯 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읽으면서 정말로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르겠읍니다. 또 나도 일상에서 그리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글을 통해 저보고 회개하라고 읽게해준 글이라는 느낌이 왔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여러분도 제 이야기를 듣고 있으시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는 "귀를 통해" 여러분 속에 있는 자아가 듣는 것입니다. 제가 눈을 들어서 만물을 봅니다. 그것은 제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 제 속에 있는 내 자아가 보는 것입니다. "입을 통해" 물적 영적 양식도 먹고 마십니다. 사람이 갖고 있는 모든 기관은 각기 그 자체로 귀중하지만, 그 안에서 그것을 활용하고 관할하고 있는 자아, 인간, 자기자신이 더 중요하고, 또 이 주인된 자아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서 듣고 읽고 말하고 깨닫게 합니다. 
제가 무언가를 볼 때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끝이 아닙니다. 내속에 있는 자아가 종합적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보자마자 머리로 깨닫고, 보자마자 가슴으로 느끼고, 보자마자 손과 발로 행동에 나섭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칭찬할 줄 알고, 불쌍한 것을 보면 눈물 흘릴 줄 알고,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기며 헌신과 사랑을 베픔니다. 사람이 갖고 있는 몸의 모든 기관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유지하고 활용하는 도구이며. 수단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는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 즉 보고, 느끼고, 깨닫고, 인지하고, 우리가 어떤 용어를 포함하던지 간에, 감동받고 하는 모든 행위를 총괄하는 제 자신 속의 ‘자아’가 있습니다. 이 자아의 깊은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 자아 속에 또 다른 자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아가 있고, 또 깊은 자아가 있고, 또 깊고 깊은 자아가 있다고요. 마지막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관여할 수 없는 특별한 자아, 초자아(super-ego)라 한답니다. 그 자아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이며 특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신앙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내가 아니고, 내가 제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만드신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혼, 그리고 창조의 정신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정신을 우리 안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고, 작은 우주이며, 거대한 생명체입니다. 거대한 역사이자 거대한 흐름입니다. 인간이 우주공간안에 살지만 동시에 인간 속에 우주가 있습니다. 우주가 인간 속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는 것이 이렇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사람들이 인간 취급을 못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예수 앞에 중풍 병 환자 한명을 데리고 옵니다. 움직일 수 가 없어 침상에 뉘어 지붕을 뚫고 침상을 내립니다. 그리고 예수께 병 고침을 요청합니다. 그 당시 이 병에 걸린 환자는 원인을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읍니다. 이것이 이 환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확신이기도 합니다. 유대교 율법에 보면 모든 질병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를 지으면 병에 걸기고, 병에 걸린 사람은 죄인이고 "더럽기" 때문에 병에 안 걸린 온전한 사람과 같은 식탁에 앉아 식탁 교류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환자는 아무리 신분이 높다고 해도 건강한, 아니 소위 "정결한" 이들과 식탁에 함께 앉을 수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 중풍 병 같은 중병은 중증죄인이며,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식탁뿐만 아니라 예배 참석도 거부당했습니다. 물론 이 중풍 병 환자는 죄를 많이 지었겠지요. 그래서 중풍까지 왔겠지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사회 공동체에서 완전히 격리됩니다.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이웃들로 부터도 격리됩니다. 대화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희망을 걸고 예수께 찾아옵니다. 귀도 있고, 눈도 있고, 코도 있는데 인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하나님이 만든 창조 섭리는 아닌데 라고 하시면서 답답해 하셨을 것입니다. 후에 예수께서는 병을 다 고쳐 주시고 나서 "네 병이 다 나았으니 침상을 들고 가라"고 합니다. 또 하나 병의 원인이었던 죄, 그것이 원인이라면 "그 죄를 내가 사해주마. 죄 사함도 받았다. 그러면 질병에서 다 나았으니 침상을 갖고 가"고 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의 명령은 이러할 것입니다. "가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밥을 먹어라. 함께 사랑하면서 살아라. 왜 네가 인간 공동체에서 격리당하고 소외당하느냐! 나 예수가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서 선포한다. 너는 죄 사함 받았다. 침상을 지고 가라. 다시 아름다운 공동체에 가서 한 식구처럼 살아라"고. 인간회복, 인권회복, 인간존엄성의 회복 선언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단순히 병을 고치러 오신 게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사람은" 본래 모습대로 살아야 한다. 존경받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실현시키러 오셨읍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구원"의 실체요 목적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병자를 인간적으로 살게하기 위해서는 병도 고쳐주어야 하고, 죄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저는 신약성경을 읽을 때마다 항상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2천 년 전에 쓰여 졌습니다. 저자들인 사도들과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믿고 모든 것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으로 이어지는 구나.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구나. 이렇게 죽음을 삼킨 주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영감을 받아 기록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부활의 눈"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십자가 죽음에서 잉태한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읽으면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엄청난 축복입니다. 성경을 눈으로 읽고 글로 읽었지만 제 속에 있는 자아는 기쁨으로 성서를 읽고 깨닫고 결단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 때에야 비로소 감동적인 은혜가 됩니다. 
성경말씀 자체가 단순히 "글"로써는 거룩한 게 아닙니다. 글로 쓰여지고 계시된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그분의 말씀이 거룩한 것입니다. 문자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거룩하시니까 그 글을 거룩하다고, 그래서 그 책을 "성경", "성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서두에도 말씀드렸지만 귀가 중요한 이유는 귀를 통해서 듣는 우리 인간의 가장 중심의 자아가 듣고 깨닫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을 기록 할 때는 그 당시의 문화적인 언어로 기록하지만 문화가 바뀌고 상황이 바뀌면 당연히 재해석을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만든 어떤 언어도, 시대가 바뀌어 새롭게 등장하는 그 어떤 언어를 가지고도 하나님의 섭리를 다 풍족하게 표현할 수 가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을 우리 "언어"가 다 표출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면 성경말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의 "최소한"을 글자화 한 것입니다. 최대치는 영을 받아서 더 해석하고, 받은 감격을 더해야 조금씩 더 나오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 속에는 믿음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복음은 "병자에게도 똑같이 적용 된다"고 하십니다. 어떤 인간적 교리적 이유로도 하나님의 인간 회복 의지를 막을 수 가 없습니다. 그런 진실된 하나님의 형상을 재현하는 인간회복 입니다. 그것은 인간구원의 다른 말입니다. 만약 인간의 몸이 깨졌다고 하면, 이 중풍 병 환자는 중풍 때문에 온전한 인간의 몸이 깨진 것입니다. 병으로 깨진 것은 치유로 회복시켜야 합니다. 죄 때문에 깨졌으면 죄를 사하면 됩니다. 세상에서 따돌렸으면 사회 공동체를 회복하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섭리대로 온전한 인간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 속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서 인간을 새롭게 인도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의 몸과 정신이라는 그릇은 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과 정신에 담긴 하늘의 뜻은, 하나님의 형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똑같습니다. 
무대를 옮겨서 구약본문으로 가보겠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들고 백성 앞에 나옵니다. 맨처음 십계명을 돌판에 기록하여 가지고 산 밑으로 내려왔더니 하나님이 싫어하는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화가 나서 십계명 돌 판을 바위에 던져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십계명 돌 판이 없어졌습니다. 그럼 돌 판이 깨지면 그 알맹이인 십계명은 부재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돌 판을 다시 만들라고 하십니다. 똑같은 십계명을 써서 줍니다. 이것이 복음의 전달방식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은 과거, 현재, 미래 모두 똑같습니다. 일점일획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 돌 판에 쓰여 진 십계명은 돌 판이 깨지면 돌 판을 회복하면 됩니다. 그 돌 판이 역사라면 역사를 바꾸면 되지요. 그 돌 판이 사람이라면 사람을 변화시키면 되지요. 그 돌판이 우리 삶의 시스템이라면 시스템 바꾸면 되지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진실 된 말씀을 담는 그릇은 바뀌어도 그 핵심 내용인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똑같습니다. 그 하나님을 저희들이 믿습니다. 
모세는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이라 이름하는 말씀은 어느 시대, 어디에서도 다 지켜져야 한다고요.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임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당시 생각할수록 답답했을 거예요. 구약시대에만 해도 하나님이 늘 하나님 나라를 가져올 메시야의 도래를 "약속"만 하셨지. 약속이 실현된 증거는 없습니다. 여기 보면 율법을 지키면 수천 대까지 이르러 복을 받고, 안 지키고 하나님을 배반하면 삼대에 이르러 벌을 내릴 것이라고 했읍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을 주시겠다고 이렇게 말씀 하셨는데, 여기에 대해서 구약에서는 언제가 되어야 종국에 메시야가 복을 주러 오시는지, 감감 무소식입니다. 그 당시의 구약 사람들은 참 굉장한 인내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맞지요! 지금도 유효하지요?", 유효하다는 약속, 그 약속 하나만 믿고 구약시대 점시대을 살아왔습니다. 
이 약속은 예수님께 와서야 비로서 성취되었습니다. 그 분이 오셔서 "내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다"고 선포하셨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그 약속이 이루어 졌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한분이신데 구약의 하나님은‘약속의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말을 줄이면 구약의 요점은‘약속’이고, 신약의 요점은 ‘성취’ 입니다. 아직까지 약속 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구약의 백성과 비교하면 신약을 믿는 우리는 마음이 훨씬 편합니다. 약속의 성취를 알고 믿고있는 우리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깨닫고 믿고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과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죄가 죄를 낳습니까. 그럼 죄를 없애면 됩니다. 누가 없애면 됩니까? 죄는 사람이 못 없애고, 하나님이 없애야 합니다. 그럼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잘못한 것이 죄지요. 그럼 잘못을 범하면 어떻게 됩니까?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회일반에서 사법부가 있습니다. 물증에 따라서 판결을 통해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물증이 없으면 죗값은 안 치르지만 그러나 죄인 본인은 알고있음니다. 죄지은 사람은 사실을 압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스스로가 알고요, 또 누가 압니까. 이웃도 모르고요, 다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자기 양심이 알고 자아가 압니다. 그러면 그 죗값은 실제로 누가 치르나요. 하나님은 단순 소박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치루게 할 수 있는 죗값은 세상보고 치르라고 하고, 세상이 모르는 자신만 아는, 그러나 감춰진 죄는 나 하나님과 해결하자고. 하나님의 말씁입니다. "내가 죗값을 대신 치러주마. 내가 치러주는 방식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인데 내 아들 예수를 통해서 대신 치르게 하마. 이 예수만 믿고, 이 예수 이름으로 죄사함 받고 새롭게 살라"고.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고백할게 있읍니다. 저도 죄많은 죄인인데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만이라도 고백할 수 있어야지요. 이웃 앞에서 고백 못하는 죄, 공개하지 못하는 죄, 물증이 없어서 처벌하지 못하는 죄가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할 수 밖에 없는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자아가 있읍니다. 이 자아의 고백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사죄의 은총을 축복으로 주십니다. 그럴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라고 찬양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믿음의 행위라고 이름합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이런 믿음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세상의 모든 것은 할 수 있지만 단 못하는 것, 자기가 ㅈ자기 죄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받아야 하는데, 우리 죄를 용서할 분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것입니다. "나는 그대들이 하는 일을 간섭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그대들의 자유의지에 맡기고 그대들의 결단에 맡긴다. 그러나 그대들의 가장 중심에 나 하나님이 있어야 되겠다. 그대들의 생명을 위해서, 삶의 진실을 위해서 나 하나님이 있어야 하겠노라"고. 저는 신앙이 필요한 곳은 바로 그런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살이가 힘들고, 해법이 보이지 않지요. 그러나 단 하나의 해법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삶의 중심에 바로 이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그것이 양심이라고 하던, 신심이라고 표현하던, 하나님만 중심에 계시면 해결됩니다. 스스로 회개할 수 있고, 병도 나을 수 있고, 새 인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가 깨질 수 있지만 다시 복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복구되어 새롭게 살 수 있습니다. 
중풍 병 환자는 지금 중풍을 앓은 기간은 과거부터 앓았으니까 과거도 질병, 지금도 질병의 삶이었읍니다. 그런데 그 분의 미래 희망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병에서 병 고침을 받는 것, 죄에서 해방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미래를 주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고 느낀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옛날이 있고, 지금이 있죠. 미래도 있읍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는 미래는 먼 장래의 미래가 아닙니다. 미래는 지금 임합니다. 삶의 ‘새로운 양식’ , 그것이 바로 지금 맛보는 미래입니다. 라이프 스탈일이 바뀐 것이 미래입니다. 시간만 가는 미래가 무슨 미래입니까. 우리가 병자로 살다가 건강을 회복하여 살면 그것이 미래입니다. 그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그 희망은 "지금 여기에"(hic et nunc)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내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우리의 산술적 시간으로만 재지 말고 우리의 계산되는 공간으로만 재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의 질"로 우리의 미래를, 희망을 생각합시다. 그 미래 희망은 지금 바로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의 삶의 스타일이요 믿음의 결단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값진 미래를 그냥 은혜라는 이름으로 줄테니 "값을 지불하지 말고 살아라"고. 그가 바라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은혜로 준 초청장을 받아라", 그리고 "초청에 응해주라"고. 이렇게 응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초청장을 발부합니다. 하지만 받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자유로, 자유의지로 하십시오. 자유하는 인간은 결단을 자유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초청장을 발부하십니다. 응답하는 것은 우리자신들의 자유의지고, 자발적인 믿음의 결단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미래를 값없이 그리고 자율적 믿음의 결단으로 가져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삶이 아름답게 이루어집니다. 그 축복이 여러분 삶 가운데 풍성하게 이루어 지기를 주님의 으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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