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믿음의 꿈과 현실

2014년 10월 19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레위기 19:13-18 
너는 이웃을 억누르거나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네가 품꾼을 쓰면, 그가 받을 품값을 다음날 아침까지, 밤새 네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주다. 재판할 때에는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여 두둔하거나,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편들어서는 안 된다. 이웃을 재판할 때에는 오로지 공정하게 하여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남을 헐뜯는 말을 퍼뜨리고 다녀서는 안 된다. 너는 또 네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이익을 보려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다. 너는 동족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이웃이 잘못을 하면, 너는 반드시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래야만 너는 그 잘못 때문에 질 책임을 벗을 수 있다.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 아멘. 
에베소서 6:10-17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으로 굳세게 되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온몸을 덮는 갑옷을 입으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악한 날에 이 적대자들을 대항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끝낸 뒤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리의 허리띠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의 가슴막이로 가슴을 가리고 버티어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차비를 하십시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믿음의 방패를 손에 드십시오. 그것으로써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모든 불화살을 막아 꺼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십시오. 아멘. 
마태복음서 5:43-48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아멘. 
설교문
저는 찬양하고 기도할 때 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은 진실로 노래하고, 기도하고 감사드림니다. 제가 설교 할 때 특정인 이름을 잘 이야기 하지 않지만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거명합니다. 오늘 성경봉독을 했던 전성은 집사와 최성은 집사는 이름이 같은 의사부부입니다. 위암 말기로 인해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아직까지도 암치료 중입니다. 제가 성경봉독을 하는 두 분을 보면서 이렇게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회복주셔서 목소리만이라도 사용할 수 있다면 기꺼이 성경봉독을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던 분들입니다. 오후에는 탈북자 출신인 강철호 목사님의 강연을 듣습니다. 이 분이 오늘 우리에게 본인의 사선을 넘는 이야기를 해 주실 것입니다. 죽음의 그늘에 휩싸인 자기 고향 이야기를 나눠 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불러 가시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이 땅에 남아 있으면 남아 있는데로 서로 사랑하며 생명을 존중하며 삽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의 품안에 거하던 또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사회에 거하시던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생명은 그래서 이 땅에 있는 한 서로 사랑하며 살게끔 되어 있고, 하늘나라에 가더라도 하나님 사랑의 품안에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는 우리를 슬프게 하고, 가슴 아픈 생명이 죽어가는 이야기를 너무도 자주듣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언제의 일이었데, 지난 주간에는 공연 중 환풍구 덮게가 무너지면서 추락참사로 또 고귀한 20여명의 생명이 죽음을 맞았습니다. 21세기 최첨단의 선진사회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요? 저는 이러한 현상을 막을 해법이 없습니다만, 우리 사회에 편만한 고질적인 질병 이야기가 하나 있습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누구의 잘못이랄 것 없이 모두가 짊어져야 할 "안전 불감증" 이라는 질병입니다. 
안전 불감증은 이런거겠죠. 만약 세월호 선장이 그 배에 자신의 손자가 함께 동승했다고 한다면 그렇게 위험천만 하게 항해운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자신의 손녀가 수학여행을 가기위해 세월호에 탔다면 그 배가 출항하지 못하게 사전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어느 누가 되었던지 중요한 것은 이 불감증 속에 "나 자신"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회의 구석구석에 이웃들이 살고 있습니다. 모르는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월호가 있고, 학생들이 있고, 국민이 있고,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피해자들은 거의가 "남"으로 취급됩니다. 그곳에 거의 "나"는 없습니다. 예전에 고 김수환 추기경이 전개한 “내 탓이요”라는 회개운동이 기억납니다. 이 불감증 속에는 내 자신은 없고 남들만 있습니다. 
저는 판교 공연장 참사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 했습니다. 환풍구를 설계했던 건축가가 본인이 환풍구 위에 놓인 받침대 위에 올라가서 공연을 관람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라도 했다면 그렇게 허술하게 설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문과 방송을 보니 환풍구 설치에 대한 관련법규가 없다고 합니다. 이 참사를 보면서 느끼는 심정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일상에서 사람이 법만 가지고 사나요? 우리 사회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불감증이라는 병이고, 그 불감증 안에는 타자인 당신들만 있고 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타자와 그리고 타자의 이용시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기본인식입니다. 나는 아닙니다라고 하죠. 그러니 그냥 성의 없이 부실로 지으면 됩니다. 
우리 성경말씀에도 있지만 옛날부터 하는 말이 있죠. 법을 잘 지켜 법치국가가 되면 좋은 사회가 된답니다. 그러나 실제로 법만 잘 지킨다고 해서 좋은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백성들 가운데서도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의 세부적인 것 까지 잘 지켰음에도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었습니다. 판교 사건을 다시 생각해 보시지요. 관련 법 규정이 없더라도 건축가로서 튼튼하게 짓고, 공연을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이고, 사전 광고도와 경고도 충실했던들, 그리고 추후 조치도 준비가 잘되어있었어야 합니다. 우리는 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와 관련이 없고 우리가 관심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핑요할 때에는 법 조문에 완전히 매어 해석하며 피하며, 그것은 법적 정의라 자위하며 삽니다. 성경에서는 그런것을 율법주의라고 이름합니다. 
이런 법조문적 정의는 하지만 사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불감증의 구도속에 "나"가 함께 있으면 그것을 불감증이라고 이름할 수 없습니다. 법을 넘어 생명의 안전을 추구하는 뜻이 있었다면, 법규정과 상관없이 안전하게 설치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건축가의, 건물 운영자의 ‘양심’이라 이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법이 없어도 법을 넘어서 상식과 양심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상식과 양심은 성경말씀으로 표현하면 모든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혼과 마음일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외적 규정을 넘어서서 인간의 깊은 곳에 내적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을 요즘 우리는‘영성’이라는 말로 흔이들 표현 합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상식, 도덕, 윤리, 하나님이 주신 혼, 영성이 제대로 되면 법이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물론 법이 있다면 법을 출실히 지키면 또 범규정을 넘어서도 안전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안전불감증을 해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법을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혼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인간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외형적인 메카니즘을, 시스템을 바꾼다고 해도 이 땅에 사고는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고 들었겠지만, 이제는 그 틀을 완전히 바꾸어 사랑으로 원수를 이기는 단계에 까지 가야하고, 그래야 미움이 아닌 사랑이 이 땅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하십니다. 
사회 안전에 대한 불감증만 우리사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안보에 대한 불감증도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교육안보 불감증도 도처에 있습니다. 신앙의 불감증도 도처에 있습니다. 우리 깊은 곳에 있는 삶의 핵심인 영혼, 이것을 제대로 갖추어야 우리가 만든 시스템이 잘 돌아 갈 거 아닙니까! 우리가 예배드리고, 말씀 듣고, 기도하고 찬양을 하는 이유는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주신 아주 귀중한 본래의 혼, 정신, 영을 회복하고, 활성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 주님의 전에 나와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영의 능력, 영성을 충분히 받아야 합니다. 영성을 받으면 사람이 좋아지고, 보고 판별하는 눈이 뒤집어져 훌륭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성은 혼자 갖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이웃사랑과 나의 사랑이 합쳐지는 능력입니다. 이 영성을 통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의 생명, 우리의 생명, 이웃의 생명,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창조주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혼을 받아 행복할 수 있고, 축복된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영성은 자기 혼자만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함께 잘 되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우리가, 우리사회가 빨리 회복했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땅에 오셔서 영적인 주님이 되십니다. 
오늘 구약, 서신서, 그리고 복음서 본문의 말씀은 모두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웃과 함께 사랑을 나누어야 그 사람이, 그 사회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불안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 행복을 나누며 살 수 있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이웃사랑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마음속에 그리신 이웃사랑의 방법 중에 조금 소극적이며 부정적이지만 그래도 괜찮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논어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겠습니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가 갖고 싶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주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웃사랑의 소극적인 방법입니다. 논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에도 네가 싫어하는 것을 이웃에게 범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웃을 사랑으로 감싸야 합니다. 논어나 구약성경 모두 같은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 의 레위기 본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 당시 포도농사는 이스라엘의 주 산업이었습니다. 그 포도를 추수할 때 포도알 모두 추수하지 말라고 합니다. 포도를 추수할 때 땅에 흘린 포도를 모두 주어서 바구니에 담아 가져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가난한 사람과 이방인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남들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주어라. 내가 싫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저도 개인적으로 많이 회개하게 됩니다. 제는 개인적으로 싫은 것을 신학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그리고 직책의 이름으로 남에게 많이 시켜오곤 했습니다. 그것은 이웃사랑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 평화롭게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무엇입니까? 방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려면 내가 받고 싶은 사랑을 이웃에게 똑같이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싫은 것, 나에게 쓰다가 남아 있는 것을 주었다고 이웃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 땅은 행복이 넘치는 나라가 됩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이웃사랑 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내 것을 채우기 조차도 어렵습니다. 성경말씀 그대로 우리의 일상에서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정치하는 분들 그리고 사업하시는 분들 참 힘들 것 같습니다. 
역사와 정치에 대해 한 마디만 하려고 합니다. 독일이라는 나라는 본래 연방국가로서 지방분권국가였습니다. 그러니까 지역별 분단국가라고 할수 있겠죠. 한 나라로 통일을 경험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본래 하나의 신성로마제국(962-1806)이 게르만 민족의 제국이었음을 제외하고는, 근대에 와서 이런 민족의 통일을 이룩한 분이 비스마르크 재상이었습니다. 이분은 19세기 말(1871-1918)에 독일을 통일했습니다. 당시 독일을 하고나서 모든 것은 기독교적이어야 한다며 성경말씀대로 사회, 정치, 그리고 기업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 당시 얼마나 기독교가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혔는지는 이 나라의 사회와 정신의 틀을 기독교문화국가(Kulturprotestantismus)라고 규정할 만큼 기독교 뿌리가 깊이 내렸던 것입니다. 기독교 문화가 뿌리박힌 나라입니다. 그런데 후에 비스마르크 재상은 고백합니다. 성경말씀대로 통치를 해 보보려고 했으나 안 되는 것이 많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5-7장의 말씀이랍니다. 미 산상수훈을 따라 정치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들으면 아주 기분 좋은 이야기 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 이야기가 오늘 날에도 성경말씀과 역사현실의 접목에 있어서 고려해야할 중요한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며칠 전에 이명박 전 대통령의 식사 초대로 다른 목사님 몇 분과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도 대통령을 할 때 기도하면서 성경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었답니다. 매일 주기도문을 외우는데 “우리 죄를 사해 주십시오.”부분이 정치에서 제일 어려웠답니다. 보복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뜻인데 대통령으로써 제일 어려웠답니다. 차라리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았더라면 좋았겠었답니다. 주기도문 외우는 것 때문에 현실정치의 많은 부분을 실행하지 못했었답니다. 정치적 평가는 여기서 제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본인의 고백은 그렇했읍니다. 이제 우리 한번 크게 질문을 던져 봅시다. 하나님 말씀이 이 땅에서 실현 불가능한가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상향으로만 갖고 현실에는 적용이 안 되는 말인가요? 우리가 읽는 성경말씀은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하늘 만의 말씀인가요? 
2차 대전 당시 일어난 사건으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전해주는 이야기입니다. 러시아 군인들이 전쟁 막바지에 독일의 나치 포로를 잡아 압송하는 과정에 있었입니다. 압송 중에 한 동네를 지났는데 그 동네의 여성들이 독일 포로들에게 빵을 나눠 주었습니다. 그 여성들은 원수에게도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병사들이 그 여성들을 향해 원수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안 된다고 혼을 냈답니다. 그 말을 듣고 여성들이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난 번 독일병사들이 우리 러시아 군사들을 포로로 끌고 우리 동네를 지날 때 배고파하는 우리 군인들에게 먹을 빵과 마실 물을 주었습니다. 세상이 바뀌어서 독일 병사들이 끌려왔는데 배고픈 자들에게 빵과 물을 주는 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일 뿐입니다. 앞으로 독일 나치가 와서 여러분들을 다시 끌고 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빵과 먹을 것을 줄것입니다. 이웃 사랑해야 하니까요.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니까요. 이러더랍니다. 러시아 정교회가 전하는 아름다운 이웃사랑의 예화입니다. 
거기에 담긴 메시지는 바로 이런것이 아닐가요? 이웃사랑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배고플 때 주는 빵입니다. 원수 사랑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목마를 때 주는 한 모금 물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독일인 이든, 러시아 인이든 인간의 욕심 때문에 전쟁하지 마세요. 빵한쪽 드세요! 물 한잔 마시세요! 그리고 같이 삽시다. 서로 죽고 죽이지 말고. 이런 삶속의 외침이 가지는 가치는 여러분 스스로가 평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이 선한 것이 아니지만,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생명은 어떤 일이 있어도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요. 생명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지 사람의 죽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나의 생명도, 적의 생명도, 어느 누구의 생명도 결국에는 하나님이 회개시켜서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분노와 적대감으로 미리 죽이거나 내동댕이치지 말아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의 생명도 종국에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뜻이 담겨있읍니다. 모든 막힌 담, 원수가 된 철조망, 냉전적 적대제도, 그리고 시스템을 다 바꾸어야 합니다. 북한이 원수라면 분단이 원수니까, 분단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 땅에 종교 전쟁이 많습니다만 종교 간의 갈등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든 특정종교의 세속적 우월성 주장, 종교 폭력을 제거해야지요.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확고 부동한 믿음이 있으면 됩니다. 사람들이 그동안 수많이 물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고. 세상에 이렇게 죽음이 많은데, 세상에 이렇게도 폭력이 난무 하는데, 생명이 귀하게 취급도 못 받는데 생명의 주인임을 자부하는 창조주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당신은 도대체 존재하시는 것입니까? 무신론이 왜 나왔습니까? 세상이 힘들고, 죽음이 넘치니까 창조와 생명이신 신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정당당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답변이 없으셨습니다. 한참 있다가 하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내가 사람이 되어, 신이 있음을 증명하겠다라고. 성탄절,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과 역사에 오신 사건, 곧 신의 존재증명 사건입니다. 구차한 이야기 하지 않고요, 신은 "차라리 내가 사람이 되어서 너희들과 함께 살겠다. 신이 어디에 있다고 묻지말아라. 신은 사람이다. 죽음도 당하고, 고통도 당하마. 너희들의 죽음을 내가 대신 지마"라고 몸으로 신의 존재를 입증하셨읍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주님의 답은 이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사람이 되어서 그대들과 함께 십자가에서 함께 죽임을 당하고 함께 죽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함께 하마. 너희 인간의 생명이 되어 나도 너희의 죽어가는 생명이 되마"고.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나를 찾는 사람은 "나를 죽은 하나님 이라고 해라"고 하실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하나님의 응답의 절반입니다. 
그 다음의 절반 답변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생명은 죽음으로 끝날 수 가 없읍니다. 폭력에 희생당함으로 생명이 완결될 수 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이 만든 생명은 아직도 구원을 베프는 사랑을 해야 함으로 세상이 말하는 죽음을 이기고, 죽음을 뚫고 넘어서 부활해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어 죽으시고, 하나님의 특권을 살려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부활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신 증명 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하나님, 그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하고 같이 이 생명을 살자"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서만 이루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으니까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니까요. 그 하나님을 우리가 몰아내지 않으면 됩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만든 물품과 제도 속에 담겨 있는 혼이고, 인간의 깊은 곳에 있는 영,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속에 초청하여 담아 두시고, 그 분과 함께 토론해 보세요.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 해보세요. 그 분과 함께 걸어 보세요. 그래도 인기척이 없거나 못느끼시겠으면, 그 때에 도대체 신이 어디에 있냐고 항변해 보십시오.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간이 되어 그대들과 사랑하며 살고 싶다. 이 사랑을 서로 나누자"고. 우리는 지금 찬송으로, 기도로, 간구로, 행동으로, 서로간의 사랑으로 이 삶을 나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함께하는 생명사랑을 풍족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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