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치유제』 겉 표지. |
이 책은 4세기의 탁월한 영성가였던 에바그리우스가 쓴 『안티레티코스』를 토대본으로 삼고 있다. 그것으로부터 독일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의 수도승 안셀름 그륀이 64개 상황을 선별하여 현대적 상황에 맞게 개작한 것이 『내 영혼의 치유제』인 것이다. 원래 『안티레티코스』가 수도승들을 대상으로 쓴 글이기 때문에 현대의 일반 신도들에게는 과도한 처방을 담고 있을 수도 있겠거니 염려할 수 있지만, ‘악한 생각’의 유혹은 수도승에게만 집중되는 공격이 아니기 때문에 영성의 심천으로 독자를 구별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륀의 개작이 이 책의 보편적 사용을 돕고 있다.
『내 영혼의 치유제』에서 ‘악한 생각’의 유혹에 빠진 영혼에게 처방하는 ‘영혼의 치유제’는 성경말씀이다. 마치 예수께서 사탄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듯이, ‘악한 생각’이 닥쳐올 때, 처방된 성경 말씀을 상기하고 선포하면 그러한 생각들을 물리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악한 생각’의 실체를 목도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책이 원용하듯이 예수께서 보여준 모범을 따를 일이다. 한편,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이는 “더 많은 ‘용량’을 ‘복용’해야겠거든 에바그리우스의 『안티레티코스』를 곁들여 읽으시라”고 권한다.
책 속의 「음욕」 편에는 이런 상황과 처방이 나온다:
『안티레티코스』 2,35
어떤 기혼 여성이 우리를 여러 번 방문함으로써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그녀와의 대화를 오래 끌도록 우리를 부추기는 생각에 맞서: 다른 사람의 아내와 너무 오래 대화하지 마라. 잠언 5,20...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그녀를 도우려는 마음 뒤에는 그녀와 친해지고 싶고 연애하고 싶은 욕망이 무의식 중에 도사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43쪽)
「슬픔」 편의 한 상황에 대해서 “어찌하여 제 고통은 끝이 없고 제 상처는 치유를 마다하고 깊어만 갑니까? 당신께서는 저에게 가짜 시냇물처럼, 믿을 수 없는 물처럼 되었습니다”(예레미야 15:18)는 말씀을 처방하고는 “에바그리우스[…]는 내 슬픔의 종점을 알려 주지 않고, 슬픔을 슬픔으로 내버려 둡니다. 다만 하느님께 오롯이 의탁하라 권합니다. 슬픔이 잦아들게 해 주십사 기도하지 말고, 슬픔이 어찌 이리도 날카로운지, 어찌 이리도 헤어날 길 없는지, 주님께 여쭈어 보라 이릅니다. 슬픔의 무게를 스스로 저울질하지 말고, 주님께 오직 나의 물음을 던질 수 있어야 내 슬픔은 겨우 조금씩 변모해 갈 것입니다”(79쪽)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기도의 힘으로 더는 탐식의 노예가 아닐뿐더러 분노도 극복했다고 자기를 칭송하는 교만한 생각에 맞서” 고린도전서 15장10절의 말씀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를 처방한다. 이에 대한 권면은 아래와 같다.
영성생활에 어느 정도 진척이 있다 싶자, 세속적 욕구에는 벌써 초연해진 듯합니다. 먹는 일에도 마음 쓸 일 없고, 울화도 분노도 저만치 사라져 갔다네요. 그걸 자랑하는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탐식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가 진짜로 분노를 이겨 냈는지는 누군가 그를 신랄하게 비판할 때 드러납니다. 뭔가를 이루었다고 절대 자랑하지 마십시오. 다 극복한 줄 알았던 것들이 금세 우리를 다시 덮칩니다. 먹는 일에 마음 쓸 일 없고 이 순간 분노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지켜볼 일입니다. (1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