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북 리뷰] 인종갈등, 법으로 풀 수 없을까?

존 그리샴 데뷔작, 『타임 투 킬』

▲존 그리샴 데뷔작, 『타임 투 킬』 겉 표지.
미국이 인종 간 갈등으로 마비 지경이다. 지난 8월 미주리 주 퍼거슨 시에서 열여덟 살 흑인 소년 마이클 브라운이 백인 경찰 대런 윌슨의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사건은 3개월이 지나도록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되려 현지시간으로 11월24일(월)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카운티 대배심이 대런 윌슨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려 흑인 사회를 격분시켰다. 퍼거슨 발 인종 분규는 급기야 미국 전역으로 확산될 기세다. 

무엇보다 흑인 사회가 이토록 격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마디로 법이 그들의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률가 출신의 법정 스릴러 작가 존 그리샴은 1989년 데뷔작 『타임 투 킬』(원제: A Time to Kill)을 통해 피부색에 따라 저울추가 심하게 기울어지는 미국 법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작품은 지난 1996년 영화화 됐으며, 현재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인터스텔라>로 절정의 연기를 뽐내고 있는 매튜 매커너히가 제이크 브리겐스를 연기한다. 
미국 남부 미시시피주 법정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흑인 칼 리 헤일리는 어느 날 어린 딸에게 심부름을 시킨다. 이 아이는 아빠가 부탁한 이런저런 것들을 사들고 총총걸음으로 귀가한다. 그런데 이 아이는 운 없게도 술과 마약에 찌든 백인 건달 두 명의 눈에 들게 된다. 백인 건달들은 먹잇감을 잡아채듯 이 아이를 잔인하게 성폭행한다. 
칼 리 헤일리는 백인들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그는 미리 총을 준비해 뒀다가 법정으로 출두하던 두 백인 건달을 사살했다. 그는 즉각 체포됐다. 이러자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제이크 브리겐스 변호사에게 변호를 의뢰한다. 칼의 입장은 단호했다. 법정에서는 정의를 기대할 수 없었고, 이에 아이의 아버지인 자신이 직접 정의의 수호자로 나섰다는 것이다. 
반면 검찰 측은 자신만만하다. 칼의 행위는 자력구제를 금한 형법의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담당 검사인 루퍼스 버클리는 칼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고 벼른다.
칼의 재판은 상당한 딜레마를 안고 있다. 현실적(de facto) 시각에서는 칼의 행동이, 법 원칙적인(de jure) 측면에서는 버클리 검사의 입장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딜레마를 의식한 듯 브리겐스의 은사는 조언을 듣고자 자신을 찾아온 제자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이번 사건은 참 희한한 사건이지. 자네가 이겨도, 역으로 자네가 져도 정의는 이뤄지기 때문이니 말 일세”   
칼의 항변을 이해하기 위해선 미국 남부의 현실을 들여다봐야 한다. 미주리, 미시시피, 앨라배마, 루이지애나 등 이른바 ‘극남부(Deep South)’에서는 백인 우월주의 정서가 강하다. 백인 우월주의 테러 집단인 ‘쿠 클럭스 클랜(KKK)’의 근거지도 바로 이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흑인과 백인 사이에 법적 분쟁이 벌어졌을 때 법정은 무조건 백인 편이다. 1955년 벌어진 에미트 틸(Emmett Till) 고문 치사사건이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다. 
칼 리 헤일리, 그리고 에미트 틸 
시카고 출신의 영민한 14세 흑인 소년 에미트 틸은 친척집을 찾아 미시시피주로 여행을 떠난다. 미시시피에 도착한 그는 우연히 사탕을 사기 위해 백인 여주인이 운영하던 식료품점에 들렀다. 그는 사탕을 사고 문을 나서면서 백인 여주인에게 휘파람을 불었고, 이게 화근이 됐다. 사흘 뒤 두 명의 백인이 총을 들고 틸이 머물던 친척집에 찾아와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는 1955년 8월31일 미시시피주 탈라하치 강에서 참혹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치아는 두 개만 남긴 채 다 뽑혔고, 머리엔 큼지막한 구멍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목엔 면화방직 기계에 쓰이는 프로펠러가 매달려 있었다. 틸의 주검은 그가 끔찍한 고문을 당한 뒤 머리에 총을 맞아 사망했으며, 시신은 강에 버려졌음을 말없이 증언했다. [틸의 어머니는 아들의 주검 사진을 공개했고, 이 사진은 흑인 민권운동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용의자는 백인 이복형제 로이 브라이언트와 J.W. 밀럼이었다. 이들은 즉각 살인혐의로 기소됐다. 그러나 백인들로만 구성된 배심원단은 단 67분 만에 이들에 대해 무죄평결을 내렸다. 이들은 의기양양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틸을 고문·살해했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확정판결 난 사건에 대해 두 번 이상 심리·재판하지 않는다”는 형법의 일사부재리 원칙을 악용한 것이다. 『타임 투 킬』의 주인공 칼 리 헤일리가 법에서 정의를 기대할 수 없다고 부르짖은 건 다 이런 현실 때문이었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 보자. 검찰은 승리를 자신하면서도 절차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검찰은 우선 공판을 백인 인구가 우세한 지역에서 벌이려고 치열하게 물밑 작전을 벌인다. 버클리 검사는 하급 검사들에게 “흑인이 많이 사는 지역에 가면 배심원들은 검어지게 돼!”라고 독려한다. 그 이유는 쉽게 짐작이 가능하다. 앞서 에미트 틸 사건에서 보듯 백인으로 배심원단을 꾸리면 승산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미국을 폭동전야로 몰고 간 마이클 브라운 사건도 비슷한 양상이다. 백인 경관 대런 윌슨에게 불기소 처분을 내린 세인트루이스 카운티 대배심의 인종 구성은 백인 아홉에 흑인 셋이었다. 즉, 대배심이 윌슨을 법정에 넘기지 않은 데에는 배심원단의 피부색이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한 셈이다.   
『타임 투 킬』은 미국 사법제도(배심원제)의 허점이 미국 사회의 시한폭탄과도 같은 인종갈등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법적 정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메시지는 사상 최초로 흑인이 대통령에 오른 21세기 미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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