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초에는 늘 덕담이 오간다. 그러나 올해 정초 분위기는 음울하기 그지없다. 이런 분위기는 종교계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런 가운데 지난 1월4일(일) 한 스님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게시한 글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파문의 주인공은 혜민 스님. 그는 ‘힐링 법사’로 불리며 SNS, 강연, 저술을 통해 힐링을 설파해왔다.
이번에 파문을 일으킨 게시글 전문은 이렇다. “자기 삶의 내용이 알차고 풍요롭지 못하면 정치 이야기나 연예인 이야기밖에 할 이야기가 없게 된다. 한 번 서점에 들러서 내 마음이 공감하는 책을 한 번 사서 보라. 매일 텔레비전만 보지 말고 봉사활동이나 외국어, 운동, 악기 하나쯤 배워 보라”였다.
내용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스님이 새해를 맞아 흔히 할 수 있는 덕담이다. 그러나 이 글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지금 젊은이들이 느끼는 그런 절박함 자체를 경험 못해서 한 몰이해의 소산,” “100%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나라 서민의 삶이 얼마나 팍팍하고 그게 다 정치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했어야,” “자기 함양에 힘쓰라는 의도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이 워낙 잘못해서 많은 이들이 울분을 토하는 것”이라는 반응이 확연히 눈에 띠었다. 네티즌들은 이내 문제의 게시글을 부지런히 퍼 나르며 스님을 성토했다. 혜민 스님이 네티즌들의 공분을 산 이유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스님의 글에 담긴 인식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인들은 당장의 생계를 위해 분주하게 살아가야 하는 처지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일가족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대학을 졸업하는 젊은이들에게 졸업은 실업과 동의어일 뿐이고, 어렵게 취업을 해도 ‘갑질’ 피해에 고스란히 노출된 상황이다. 또 노동자들은 ‘일할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엄동설한에 70m 높이의 공장굴뚝에 올라 농성 중이다. 이렇게 삶이 각박해진 근본 이유는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온 나라를 슬픔에 잠기게 했던 세월호 참사는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로 인해 벌어진 전형적인 인재였다. 그래서 국민들은 살기 힘들다고, 제발 제대로 정치하라고 절규에 가까운 아우성을 쏟아내고 있다. 혜민 스님의 덕담은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 때나 의미를 가질 뿐이다.
가뜩이나 우울한 가운데 새해를 맞이했는데, 한 종교인의 부적절한 발언은 새해 벽두 분위기를 더욱 우울하게 한다. 특히 혜민 스님의 발언은 기독교, 불교 할 것 없이 종교가 사회의 아픔을 치유하기는커녕 그 아픔에 소금을 뿌리는 암적 요소라는 인식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사실 이런 인식은 지표상으로도 나타나고 있는 중이다.
제 구실 못하는 종교, 사회의 암 덩어리일 뿐
지난 해 9월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이하 연구소)는 (주)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2014년 한국의 사회·정치 및 종교에 관한 대국민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소가 3년 주기로 실시하는 조사에서 ‘우리 사회에 종교가 미치는 영향력이 증가했다’고 답한 응답자는 38.8%로 2011년 대비 9.5%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종교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3년 전 대비 불교 4.5%, 개신교 6.9%, 가톨릭 5.1%가 감소했다. 즉, 어느 종단을 막론하고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다는 의미다. ‘종교가 우리 사회에서 제구실을 못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도 가능한 대목이다.
무엇보다 기독교계가 혜민 스님이 집중포화를 맞는 광경에 쾌재를 부르지 않기 바란다. 기독교계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게 없다. 기독교계는 지난 해 여러 차례 여론의 공분을 샀다. 그 이유는 혜민 스님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모습을 노출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맡겼다. 빛은 어둠을 밝힐 때 빛으로서 가치가 있다. 소금은 맛을 낼 때야 소금이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운명에 처한다.
올해는 제발 기독교가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회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앞서 지적했듯, 개신교, 가톨릭, 불교를 막론하고 종교가 제구실을 못하고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있다. 부디 종교가 종교로서의 구실을 되찾기 바란다. 특히 개신교계가 제구실을 회복하는 데 앞장서 주었으면 좋겠다. 개신교가 다른 종단 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다. 예수께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맡겼기에, 그 사명을 다시 회복해 달라는 의미다.
아프니까 대한민국이다. 종교계, 그 가운데 기독교계가 우리 사회의 아픔을 찾아 그 원인을 제거해 나가는데 앞장서줄 것을 주문한다. 사실 이 일은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