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미국 성공회의 일원이자 역사적 예수를 연구해온 저명한 성서신학자 마커스 J. 보그가 지난 1월21일(수) 별세했다. 향년 72세. 그는 인류학자가 되고 싶어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가 후에 정치학과 철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그는 대학시절 종교적 의문으로 열병을 치렀고, 이에 대학 졸업 후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는 1979년부터 오레곤 주립대학(Oregon State University, OSU) 종교와 문화 연구 분야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2007년 은퇴했다. 이후 2009년 5월부터 그의 아내이자 성공회 여성사제인 마리안네 웰스 보그가 일하고 있는 트리니티 대성당의 첫 번째 신학 전문위원으로 위촉돼 활동해 왔다. 그는 신학적 경향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영국 성공회 주교이며 성서학자인 톰 라이트와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그의 저작 가운데 『미팅 지저스』, 『예수 새로 보기』, 『예수의 의미』(톰 라이트 공저), 『새로 만난 하느님』, 『기독교의 심장』,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등은 한국에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마커스 보그의 영면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그의 책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비아 刊) 서평을 싣는다. 그가 성공회의 일원이었음을 감안해 본문과 기사에서는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표기한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겉 표지. |
기독교, 특히 한국 기독교 하면 얼른 떠오르는 낱말이다. 또 있다. 구원, 천국, 휴거, 재림, 십자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이런 낱말들은 교회는 물론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널리 통용된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 낱말들의 의미가 제대로 전해져 유통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목회자조차 기독교 언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언어들이 목회자 개인의 야심추구를 위한 도구로 변질되거나 성도들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저명한 신학자인 마커스 보그는 자신의 책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에서 지금 유통되고 있는 낱말들의 사전적 정의와 함께 성서에서 어떤 맥락에서 이런 낱말들이 의미를 갖게 됐는지 안내해준다. 여기서 ‘안내해준다’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신앙의 언어들이 사용됐던 당시 상황으로 독자들을 안내해준다는 말이다.
기독교가 빠질 수 있는 함정…‘문자주의’ ‘천국과 지옥 틀’
저자는 왜 스스로 안내자의 역할을 맡았을까? 기독교가 빠질 수 있는 두 가지 함정 때문이다. 하나는 ‘문자주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천국과 지옥 틀’이다.
문자주의란 성서에 적힌 글귀에 함몰되는 일을 말한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언어가 잘못 이해되는 일이 잦은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그리스도교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가 낳은 해석 틀을 통해 성서와 그리스도교 언어가 받아들여지는 일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천당과 지옥 해석 틀’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교 언어를 잘못 이해하는 둘째 이유는 성서와 그리스도교 언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문자주의’이다. 문자주의는 그리스도교 언어를 하느님의 무오한 계시가 문자 그대로 완벽하게 재현된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교 언어를 이해하는 가장 신실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본문 13쪽)
언어는 사회적-역사적 맥락에서 의미를 얻는다. 따라서 성서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선 성서가 씌어졌던 당대의 사회와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문자에 천착하다보면 언어의 사회-역사적 의미가 싹둑 잘려 나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문자주의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는 일은 중요하다.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미덕은 이런 문자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역사적 접근을 통해 성서적 언어의 올바른 이해를 돕는다는 점이다.
“역사적 접근은 이해를 크게 돕는다. 언어는 그 상황과 맥락 속에서 생기를 띤다. 또한 역사적 접근은 현대의 의미나 곧잘 오해를 일으키는 의미를 과거에 투사하는 것을 막아준다. 역사적 접근을 통해 현재의 편협한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중략) 이처럼 역사적 접근은 그리스도교 언어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상대화한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에 이는 매우 위협적이다. 그들에게 ‘상대적’이라는 말은 부정적으로만 들릴 뿐이다. (중략)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언어가 상대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 언어가 우리 시대에는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질문은 바뀐다. 더 이상 성서가 모든 걸 결정한다는 듯이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라고 물을 게 아니다. 이제는 ‘그 말이 [그때 거기]에서 그들에게 의미했던 바를 생각했을 때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본문 34-35쪽)
‘천국과 지옥 분석틀’에 대한 경고도 눈여겨봐야 할 지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 분석틀이란 흔히 근본주의 기독교 분파가 설파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분석틀이 갖는 위험성은 하느님의 존재를 징벌자로 좁히는 데 있다. 즉 하느님은 오로지 인간의 죄악에 대해 벌을 내리는 심판자의 역할을 하는데서만 존재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편협한 분이 아니다. 악인에게도 따사로운 햇살과 맑은 공기를 허락하시고 모든 인간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동안 축복을 누리며 살기 원하는 분이다.
징벌적 존재로서 하느님을 이해한다면 절대자 하느님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의 존재가 징벌적인 역할로 이해되고 있을까? 바로 성서의 언어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폐단이다. 마커스 보그는 아주 쉬운 언어로 징벌적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전복시켜 나간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집트의 속박에서 해방되기를, 바빌론의 포로 생활에서 되돌아오기를,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어울려 살기를, 위험에서 구출되기를, 우리의 눈이 뜨이기를, 치유되고 건장해지기를, 예전의 삶을 떠나 새 삶을 살기를, 근심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한다. 하느님은 우리와 모든 피조물의 안녕을 갈망한다.” (본문 113쪽)
이 책이 특히 한국교회의 상황에 제기하는 함의는 상당할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교회만큼 성서의 문자적 의미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고, 구원의 신비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단순명제로 난도질당하는 곳도 없기 때문이다.
신학적 입장에 따라선 이 책 가운데 쉽사리 동의하지 못하는 대목도 있을 것이다.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부활을 기점으로 나눈다든지, 아니면 다른 종교에서도 구원의 길이 있으리라는 저자의 생각 등이 특히 그렇다. 그러나 눈에 거슬리는 대목이 눈에 띈다고 섣부른 이단규정은 금물이다. 무엇보다 부활 이전 예수에게서 인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신성이 근본적으로 부정되지 않으며, 성서 기자들이 지금처럼 종교가 다원화된 상황에 살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