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설교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 성도들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다양한 주제와 설교자들의 화려한 말솜씨 등을 매주 목격한다. 기독교 방송매체나 유튜브 등 인터넷 매체를 시청하려고 하면 마치 설교의 뷔페식당에 들어온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은 설교 영상들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설교를 통해서 매주 ‘은혜가 강물처럼’ 흘러가는데 사회가 바라보는 기독교인들의 영성이 참혹하리만치 쪼그라들어 있는 것은 왜 일까? 한국교회의 현실을 진단하는 시각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본지는 설교의 문제를 조명해보기로 했다. <설교를 말하다> 기획은 설교의 내용과 방향 및 설교자의 영성 등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이번은 서울 용산구 청파동 소재 청파감리교회의 김기석 목사를 예방했다. 대담 내용은 3회에 걸쳐 연재한다.
▲김기석 목사에게 설교의 위기가 없었는지를 물었다. 김 목사는 "시시때때로 그런 일이 생긴다"며 말문을 열었다. ⓒ사진=지유석 기자
문: 그러면, 목사님께서는 교회를 이제까지 이끌어 오시면서 혹시 설교의 위기를 느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성도들과의 소통의 문제를 포함해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김: 시시때때로 그런 일이 생기지요. 가령 무기력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제가 저의 설교를 생각해보면, 제가 예수의 말씀을 전하는데, 저는 예수가 회당에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서기관의 말과 달리 권위 있는 말씀이다’라고 반응한 것처럼 영향을 주고 있는가라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말씀이 권위 있게 여겨졌다는 말은 자신들의 영혼에 어떤 타격을 가했다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내 언어가 사람들의 표피만 어루만지고 그들의 영혼의 심부를 타격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언어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저 스스로에게서 핍진성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제가 세상의 아픔에 대해 말하고 있으면서 저는 정말로 그렇게 아프지 않은 것이지요. 약자들에게 연민을 느껴야 한다고 말하는데 제 삶으로는 그 말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핍진성이 없다는 사실이 저를 매우 힘들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저는 지금도 이 일을 그만 두고 싶습니다.
문: 목사님께서는 자기반성이 있으시니까 그런 고민도 계속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일이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이라고 생각한다면 의무감으로라도 버텨나가겠지만 이 일은 영혼을 돌보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진솔한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말에 진실성을 실어서 전달해야 하는 책임감을 늘 느끼고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김: 우리가 목사로서 산다고 할 때 직업윤리적으로도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은 우리가 선택하기도 했고 또한 우리가 선택받기도 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울면서라도 이 일을 수행해야지요. 감당하기가 어려우니까 빨리 도망을 가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김기석 목사는 한국교회의 설교가 "너무 반지성적이라고 생각한다"며 게토화된 언어로는 소통 불가한 현실을 직시할 것을 주문했다. ⓒ사진=지유석 기자 |
문: 사실 자기반성이 저변을 이루고 있는 설교가 강단에서 선포된다면, 오늘날 성도들이 설교에 대해서 느끼는 무력감, 즉, ‘무슨 이야기를 할지 뻔하다’는 반응이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교계에 대한 일반시민의 신뢰도가 20% 미만인 현실에서 그와 같은 낮은 신뢰도의 원인 중에 설교의 무생명성이 자리잡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께서는 현재 설교범람의 시대에 성도들의 영혼을 살리려는 설교의 필수요소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게토화된 언어로는 소통 불가
김: 저는 한국교회의 설교가 너무 반지성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너무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말하자면, 싸구려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우리가 신앙을 말할 때 의지적인 부분과 감성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지성적인 부분에서도 탁월한 성과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목사들이 지성적인 노력을 너무 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가 싸구려가 된 데에는 신학의 부재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신학적 정보의 부재가 아니라 세상을 신학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너무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돌아가신 저의 은사님이신 변선환 교수님께서 종묘(宗廟)를 걷다가 제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기석아, 너는 종묘의 ‘종’자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풀이할 수 있겠어?” 멍하니 서 있는데, 은사님께서 “사도성이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이 왕가의 정통성을 의미하니까 신학적으로 말하면 사도성을 암시할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은사님은 일상의 모든 일들을 신학적으로 반성할 능력이 있으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은사님께서 제게 그런 질문을 하신 의도는 저도 그렇게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알려주시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우리는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게토화된 언어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 지성계와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제일 큰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그 다음에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현실 속에서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지 못하는 점입니다. 삶 따로 교회생활 따로, 이렇게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좋은 신자인데 사회 속에 들어가면 무례한 손님이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성스러움이 일상을 떠난 자리에서는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문: 그러니까 목회자들은 생활 속에서 신학적 상상력을 활용하여 일상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만 성경말씀을 자기체험적인 바탕에서 반추한 뒤에 성도들에게 권면할 수 있게 되니까요. 하지만, 신학적 상상력은 지성적인 노력만으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지요.
김: 저는 그것을 생태학적 감수성, 신학적 감수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꽃을 보라고 하셨지요? 꽃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숨결을 알아볼 눈들이 필요한데 그런 눈들이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만난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지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는 것이지요. 그것을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자리의 언어로 느끼고 상상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문: 최근 한국갤럽에서 한국의 종교실태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이제 기독교의 교세가 기울고 있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발표에 따르면 기독교는 이제 종교라기보다 점점 종파적인 성격을 띠어가고 있는 점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사회와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데, 이러한 위기상황에 대한 개선책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김기석 목사는 무엇보다 기독교가 "예언자적 음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진=지유석 기자 |
김: 저는 우리 민족사가 난국에 처해 있을 때 기독교로부터 힘을 얻었던 이유가 기독교가 예언자적 음성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언자적 음성의 뿌리를 출애굽 정신이라고 본다면, 끝없이 자유의 확대를 위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언자적 음성이 잦아든 까닭은 교회가 부유해졌기 때문입니다. 재정적으로도 부유해지고 사람도 많아진 것이지요. 내가 지금 설교를 해야 하는데 앞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부담스러운 사람이면 설교의 내용을 적절히 조절하게 되는 상황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야성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그러면 그 종교는 수명을 다한 것입니다. 물론, 늘 격앙된 어조로 말할 것은 아니지만, 예언자적 정신은 절대로 놓치지 않고 간다면 교회가 잃어버린 공신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언자가 사라졌습니다.
문: 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번영신학적인 설교가 범람하지요.
치유담론은 싸구려 종교현상
김: 번영신학에다가 치유담론도 유행합니다. 저는 치유담론도 큰 문제라고 봅니다. 치유(healing)라고 하는 용어는 어원적으로 고찰하면, 전체적인, 통전적인(holistic), 거룩한(holy) 등의 의미와 상관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치유란 욕망 때문에 조각난 자신의 삶이 통전성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치유는 상처에다 반창고를 발라주는 수준입니다. 그러고는 ‘얼마나 힘들겠어~’라고 위로의 말을 덧붙여주지요. 이것은 치유가 아니지요. 요즘 유행이 종교를 싸구려로 만든 것입니다.
문: 그러면 통전성을 회복하게 하는 통로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김: 네,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살거든요? 저는 신학생들이나 목회자들에게 책상에만 앉아있지 말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로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밤낮으로 “예수님 찬양”이라고 말만 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가 있을 만한 곳에 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전에 자신이 관념적으로만 파악했던 사람들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삶의 지평이 넓어집니다. 그 지평이 슬픔으로 다가오게 될 때 하나님의 마음과 연대하게 되는 것이지요. 통전성의 회복은 관념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현장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문: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에 골몰할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으로 가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것을 확인하고 성찰하면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김: 자신의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도 ‘참으로 아프구나’라고 공감해야 하는 것이지요. 전폭적이지는 못하더라도 그 사람을 돕고자 할 때 자기중심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향한 개방성이라고나 할까요?
문: 그러면 마지막 질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목사란 다양한 의견들을 가진 성도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데, 특히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한 반응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보수나 진보 등의 진영논리에 따라 판단하는 성도들 앞에서 예언자적 음성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성도들의 특별한 반응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항상 고민을 하실 것 같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시는지요?
▲김기석 목사는 번영신학과 치유담론 등 "싸구려 종교현상"에 현혹되지 않기를 권면했다. ⓒ사진=지유석 기자 |
김: 정치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로서는 그런 문제로 인해 크게 어려움을 겪었던 적은 없습니다. 저는 다소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견해를 갖고 있기는 한데, 결국은 말하는 방식이 문제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박근혜 퇴진!’이라고 외치면 일부는 ‘맞아! 아멘! 오늘 목사님 설교가 강력했어!’라고 반응하겠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뜨아한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보다 근본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 겉으로 드러난 사안 자체를 타격하는 방식이 필요할 때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층위에서 이런 사안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예언자적 통찰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근본의 자리, 아픔의 자리에 가서 보면 어떤 사안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성경 이야기를 했는데 성도들은 정치적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그래서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오해는 부득불 받으면서 갈 수밖에 없겠지요. 가급적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너무 정치적인 담론을 제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한 표층적 수준보다 심층적이고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면 성도들은 ‘설교가 어느 입장을 비판하는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다지 저항하지 않거든요? 근본적인 성경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요. 지향점을 파악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그것을 믿고서 설교에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합니다.
정치 문제도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연민으로 접근
문: 목사님께서는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시각으로 설교를 하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는 합니다.
김: 성도들은 저의 진심을 알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분들도 저의 진보적인 견해에 대해 신뢰를 갖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세월호참사를 위한 기도회, 성탄절에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기도회 모임 등 진보적인 단체들이 우리교회에 와서 모임을 갖는 것을 용납합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향린교회처럼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성향들이 다양하거든요.
문: 다양한 성도들 앞에서 진보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설교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특별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 아닌지요?
김: 저의 고민은 ‘겉으로 드러나는 표층적인 차이를 넘어서 어떻게 심연으로 들어갈 것인가’입니다. 예를 들며, 우물은 지상에 여기저기 있을 수 있지만 지하로 들어가면 서로 통하는 맥이 있지 않아요? 지하수맥은 인간에게는 슬픔의 지층과 같은 것인데, 연약함에 대한 연민이지요. 그 자리로 가서 사회적 사안들을 바라봅니다. 정치적 입장에서만 바라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지하수맥이 바로 성경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설교가 정치담론이어서도 곤란한 것이지요.
문: 깊은 우물에는 진보도 보수도 없지요. 거기에는 인간애,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설교자들은 그것을 찾아내서 끌어올리는 작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 네, 맞습니다. 그것이 성경이거든요.
문: 여러 가지 통찰력 있는 말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