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로이드 존스의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겉 표지. |
믿음의 도가 훼손되는 것은 교회의 긴 역사에서 간헐적으로 발생했다. 이럴 때마다 기독교는 근본으로 돌아가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 자체를 다시 정의하고 변호해야 했다. 이러한 훼손과 왜곡은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19세기 고등비평이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지극히 사소하고 미묘한 변화를 일으키는 자가 교회에 가장 위험한 자이듯이 변화는 대개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서 발생한다. 과거에 복음주의자라고 주장했다고 해서 오늘날 복음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기독교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라며 한정된 용어를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 교리 자체를 참되게 표현하는 유일한 길임을 믿기 때문이다. 교회가 잘못된 교리를 받아들이고 선포하면 사람이 회심하는 역사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복음주의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면 그러한 정의에서 어떤 요소가 배제되고 강조되는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복음주의를 정의할 때 3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하나는 지나치게 좁고 엄격하고 세세하게 정의하여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는 것이다. 또 지나치게 넓고 개방적이고 느슨하게 정의해서 정의하려는 시도조차 무의미해지는 상태도 문제이다. 즉, 에큐메니칼 정신에 굴복하는 것이다. 게다가 성령세례를 제외한 나머지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풍조도 경계해야 한다.
그러면 복음주의는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1)전통주의로 변질되면 많은 폐단이 생기므로 특정 전통을 보존하는 데 주력해서는 안 된다. 논쟁을 위한 논쟁에 빠지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다. 더욱이 분리에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되 주의하여 복음주의의 원칙과 기준을 견지하려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 복음주의자는 진리와 화평의 일치에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복음주의 정의는 오직 성경적이어야 한다. 복음주의자는 항상 성경을 가지고 출발한다. 2)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역사를 존중하고 역사에서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되, 그릇된 의미에서 역사에 예속되어서는 안 된다. 3)부정적인 요소들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주의자이길 포기하는 첫 번째 징후의 하나는, 항상 긍정적인 점만 강조하는 것이다. 복음주의자는 “이것을 믿어서는 안 되고 저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4)빼지도 말고 더하지도 말아야 한다. 설교자가 잘못된 이야기를 하나도 하지 않았어도, 그가 복음주의자라면 반드시 말해야 할 내용들을 말하지 않는 것에 문제가 있다.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 주목해야 한다. 또한 로마가톨릭교회처럼 믿는 바에 무엇을 더하는 행위를 경계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더하거나 빼지 말라는 경고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편, 복음주의자는 어떠한 사람인가? 복음주의자는 성경에 온전히 복종하는 사람이다. 그는 ‘복음적’이라는 용어를 접두사로 사용한다. 교단이나 어떤 것보다 복음을 최우선시 한다. 그는 항상 깨어있는 사람이다(행 20:28-19, 고전 1:13-14, 엡 6:12, 딤전 6:3-4). 그는 이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특히 철학 형식을 취한 이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철학은 항상 교회가 곁길로 빗나가게 만든 원인이었다. 철학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성과 이해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도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는 사실과 정반대이다(고전 3:18). 이성과 학문은 하인일 뿐 상전이 아니다. 그는 이성과 학문을 경계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도망가거나 숨지 않으며 이성을 도구로 부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역사와 전승을 비평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복음주의자는 연속성이 아닌 불연속성의 원리를 믿는다. 그는 교회의 역사가 살아 있는 영적 교회가 제도화를 통해 생명력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자는 언제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살아 있는 영혼이며, 성령을 모신 사람이며,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행동하고 싶어 한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모든 것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사람이다. 복음이 본질적으로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는 형식주의를 싫어한다. 성령이 주시는 자유를 신봉한다. 그는 언제나 교회의 교리에 관심을 둔다. 그는 중생을 대단히 강조한다. 또한 경건을 크게 강조한다. 복음적 신조에 멈추지 않고 삶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성경강해와 기도에 지대한 관심을 쏟는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엄격하며 윤리를 항상 힘써 견지한다. 삶 전체를 교리대로 영위한다. 그는 부흥에 대한 관심이 있다. 그는 항상 설교에 우선권을 둔다. 그는 항상 전도에 관심을 가진다.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분한다. 본질적인 부분을 고수하는 일에 있어서는 분열을 초래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복음주의자는 교리가 매우 중요하며 본질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첫째는 성경에 관한 교리이다. 성경은 ‘최고의’ 권위일뿐 아니라 ‘유일한’ 권위이다. 또한 전승이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는 가르침을 배격한다. 성경이 철학의 방법으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계시(전적으로 부여됨)로 말미암았음을 강조한다(갈 1:12). 성경이 명제적 진리를 포함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인격과 그 밖에 여러 주제들에 대한 명제적 형식으로 진술된 진리가 성경에 있다. 초자연적 요소를 특별히 강조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의 문자적 진실성과 역사성을 믿는다. 성경의 가르침 뿐 아니라 성경의 역사도 믿는다. 창조는 역사적으로 사실이며 첫 사람의 타락 역시 역사적 사실이다. 마귀와 그에게 속한 영적 존재들의 사실성을 강조한다. 초자연적 영역과 영적 전쟁을 강조한다. 인간이 죄 때문에 스스로 영적인 선을 행할 능력이 조금도 없으며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임을 강조한다. 속죄의 교리에서는 속죄의 대속적 측면과 요소, 대리 형벌을 특별히 강조한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 칭의를 강조한다. 칭의는 중생의 결과가 아니며, 중생에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롬 4:5)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교회에 관한 교리에서, 성례의 순수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권징을 믿는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개념을 배격한다. 주교들이 교회에 필수적이라는 개념도 배격한다. 성례 문제에 관해서 사제중심주의를 배격한다. 성례자체의 효능을 믿지 않는다.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성찬을 제사로 바라보는 개념을 배격한다.
비본질적인 것으로서 선택과 예정에 관한 신앙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깨달음의 문제이지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의 과정에 대한 이해일 뿐 구원의 방법에 대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세례 받을 수 있는 연령과 세례를 집례 하는 방식도 비본질적인 것이다. 교회정치 문제도 그렇다. 이것으로 갈라져서는 안 된다. 성화의 방식에 대한 신조들도 비본질적인 것들의 범주에 속한다. 성령세례와 영적 은사들에 관한 문제도 비본질적인 부분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가 이 책을 집필한 의도는 복음을 수호하고 복음주의를 명확하게 규명함으로써 영혼 구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기독교 교회가 널리 퍼져 나가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참 성도라면 반드시 복음주의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복음주의 정신의 회복이 이루어져, 하루 빨리 이 땅과 세계에 참된 기독교가 선포되고 확장되기를 염원한다.
글/ 송승규 객원기자(연세대 신과대 2학년)
글/ 송승규 객원기자(연세대 신과대 2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