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기자는 최근 안산 화정감리교회 박인환 목사를 만났다. ⓒ사진=지유석 기자 |
“오늘 이 나라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묻고 싶다. ‘그러면 과연 오늘 한국교회에 구원이 있는가?’하고 말이다. ... 세월호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며, 쓰러져 울고 있는 유족들을 품어주지 않으며, 오히려 사실을 왜곡하고 유족들을 폄훼하면서 자기들의 사악한 목적을 이루려는 이 사회의 못된 기득권 세력의 편을 드는 교회가, ‘진상조사를 위한 특별법 서명’조차도 제대로 해주지 않은 교회가,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못 본 채 지나가버린 제사장, 레위인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묻고 싶다.”
부활절이던 지난 4월5일(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2015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안산 화정감리교회 박인환 목사가 한국교회에 제기한 날선 질문이다. 박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엔 유경근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 가족이 출석한다. 유 위원장의 부인인 박은희 씨는 이 교회 전도사다. 교회 곳곳엔 참사로 희생된 고 유예은 양의 흔적이 묻어 있다. 유 씨는 참사 이후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신앙에 대한 회의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교회에 묻어나는 딸의 흔적이 그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박 목사는 이런 광경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가는 곳 마다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 용지를 들고 다녔다. 박 목사가 나서서 받아온 서명자만 2만 명에 이른다. 손수 팻말을 만들어 광화문 광장에 나가 시위도 벌였다. 박 목사가 그동안 걸어온 길은 자연스럽게 그를 행동으로 이끌었다.
▲박인환 목사는 세월호 사건을 전후해 ‘못된 기득권’을 편드는 한국교회의 세태를 비판하며, 그 원인으로 한국교회에 팽배한 ‘맘몬주의’를 들었다. ⓒ사진=지유석 기자 |
“난 강원도 출신이다. 그래서인지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다. 그러다가 군목 생활하면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첫 임지는 제주도였다. 그때 한 후배가 몇 권의 책을 가져다줘서 읽었다. 장준하의 『돌베게』, 김구의 『백범일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 등이었다. 시인 고은의 시집 『제주도』도 있었다. 당시 이 책들은 금서였었다. 고은의 시집을 읽으며 제주 4.3 사건에 눈떴고, 『옥중서신』을 보면서 김 전 대통령이 이른바 ‘빨갱이’가 아님을 알게 됐다. 『백범일지』를 통해선 명분과 실리에 따라 사람의 인생이 나뉨을 깨달았고, 장준하라는 이름은 처음 접해봤다. 사실 김구를 제외하곤 고등학교 시절까지 접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또 군목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들도 영향을 미쳤다. 강원도 전방에서 복무할 때 교회에 다니던 병사가 휴가 가서 자랑삼아 보여주려고 북한에서 뿌린 안전보장증을 숨겼다가 발각됐다. 이 일은 사단을 거쳐 육군본부까지 보고됐다. 결국 이 병사는 월북기도자로 헌병대에 체포됐다. 속사정을 들어보니 강압적인 수사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보안대 장교와 연대장에게 항의했다. 그랬더니 연대장이 노발대발했다. 그 연대장은 내가 목회하던 교회 집사였었다. 또 군에서 상부의 부당한 지시로 억울하게 병사들이 죽어간 광경도 수차례 목격했다. 원래 난 군목 생활을 오래한 뒤 국비유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겪으니 군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군 의문사는 억울한 죽음일 가능성이 높다. 그뿐만이 아니다. 최근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이 24년 만에 무죄로 확정됐다. 너무나도 뻔한 일을 밝히는데 무려 24년의 시간이 걸렸다. 삼성장군인 김척 장군의 아들 김훈 중위의 죽음은 여전히 의문사로 남아 있다. 이런 경험이 있다 보니 세월호 참사는 너무 익숙하다. 물론 예은이 때문에 발 벗고 나선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꼭 예은이가 아니어도 광화문 광장으로 뛰쳐나갔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발생한지 벌써 1년 넘게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시간 말고는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다. 언론은 지속적으로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유가족들을 폄훼했고, 한국교회는 여전히 유가족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박 목사는 특히 거짓이 난무하는데 분통을 터뜨렸다. 군목 시절 거짓이 진실 행세를 하는 광경을 목격했기에 그 분노는 더했다.
▲박인환 목사는 세월호 사건을 둘러싸고 거짓이 난무하는데 분통을 터뜨렸다. 군목 시절 의문사 문제를 둘러싼 유사한 광경을 목격한 그로써는 분노가 더욱 가중될 만했다. ⓒ사진=지유석 기자 |
“안산 시민들은 이상하리만치 세월호에 무관심하다. 말하자면 옆집 일이라고 슬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많은 이들이 순진한 생각으로 ‘안산 시민들이 가슴 아파할 텐데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온다. 전혀 그렇지 않다. 슬퍼하는 시민들은 찾아볼 수 없다. 안산합동분향소를 찾은 안산 시민은 전체 인구의 13%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안산 지역경제가 세월호 참사로 인해 침체됐다고 한다. 이건 순 거짓말이다. 이 지역 경제는 2013년 11월부터 침체에 빠졌다. 이때 삼성전자는 하청업체를 전격적으로 동남아 등지로 이전했다. 안산 공단 가운데 60% 이상이 삼성전자 하청업체였다. 그런 삼성이 동남아로 하청을 돌리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우리 교회 권사님 한 분도 직원 규모를 50명에서 20명으로 줄였다. 즉, 세월호 참사 6개월 전부터 지역경제는 죽어 있었던 셈이다. 유가족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진상규명 요구를 중단하지 않고 있어서다.”
이웃의 아픔보다 보상금에 시기하는 사회
박 목사의 문제의식은 자연스럽게 교회로 옮겨갔다. 박 목사는 4월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못된 기득권’을 편드는 교회를 질타했다. 그럼에도 교회는 꿈적도 하지 않는 모습이다. 박 목사는 그 원인을 ‘맘몬’이라고 진단했다.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강남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강남 부자인줄 안다. 또 영남지역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새누리당 당원인줄 안다. 안산 지역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다. 즉, 목사들 수준이 안산 시민들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목사들은 알아서 신도들 수준에 맞춰간다. 한 마디로 배가 아픈 거다. 천박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웃집 아이가 죽음을 당했어도 안쓰러움보다 보상금 액수에만 관심을 두고 배 아파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돈을 하나님처럼 숭배하게 됐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따지고 보면 다 돈 문제나 다름없다.”
▲박인환 목사는 맘몬주의에 병든 목회자의 실상을 낱낱이 고발하며, 안산에서 조차 세월호 참사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목회자는 10명 중 2~3명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사진=지유석 기자 |
박 목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동안 품어왔던 의문은 쉽게 풀렸다. 그 의문이란 “안산 지역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났고, 이 지역 교회에서도 꽃다운 아이들을 잃었음에도 안산의 기독교계가 참사 1주년을 맞아 유가족을 위로하고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왜 내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었다. 이어지는 박 목사의 이야기는 듣는 이의 마음을 더욱 먹먹하게 했다.
“세월호 1주년을 맞아 안산 지역교회가 참여하는 추모예배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지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들은 미온적이었다. 어느 교회의 경우는 담임목사와 연락하기가 대통령 만나는 것처럼 어렵기도 했다. 겨우 내가 속해 있는 감리교단 산하 안산 지방연합회 주관으로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하는 기도회’ 자리를 마련하고 현수막도 내걸었다. 그랬더니 안산시기독교연합회 총무가 와서는 ‘기독교가 분열된 것처럼 보이지 않느냐’고 따졌다.
사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목사는 10명 가운데 2~3명에 불과하다. 그보다 ‘이젠 그만하자, 할 만큼 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목사가 더 많다. 서명 받으러 다니면서 목사와 장로가 ‘왜 국가에 반대하는 이야기를 하냐’고 말하는 걸 들었다. 이런 생각은 전체주의적 발상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섬뜩한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만약 강남 지역의 이른바 고관대작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사고를 당했다면 세월호 때처럼 수수방관했을까? 난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나는 우리 사회가 강자의 편에 서서 약자를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