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메르스) 사태가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상황이다. 6월16일(화) 현재 19명이 사망했고, 154명이 확진판정을 받았다. 격리대상자만도 5,586명에 이른다. 이쯤 되면 국가비상사태라고 해야 할 지경이다.
▲영화 <월드 워 Z>의 한 장면. ⓒ스틸컷 |
메르스의 창궐은 자연스럽게 한국이 직·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재난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먼저 브래드 피트 주연의 <월드 워 Z>를 살펴보자. 이 영화에서는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해 인류의 존립이 위태로워진다. 좀비 바이러스의 진원지는 한국 평택의 험프리 미군기지였고, 이에 UN 조사관 제리 레인(브래드 피트)은 급히 한국으로 향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공교롭게도 메르스의 진원지는 평택 성모병원이다. 보건 당국은 “역학조사 결과 평택 성모병원의 문고리와 에어컨 등에서 메르스 바이러스 유전자가 검출됐다”고 밝혔다. 이 같은 발표는 메르스 바이러스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멀리 퍼져나갔을 수도 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현재 메르스는 공기 감염은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감염학회와 대한의료관련감염관리학회는 15일(월) 보도자료를 통해 “현재까지 확인된 과학적 사실에 따르면 메르스 코로나바이러스의 전파양식은 비말(침방울) 감염”이라면서 “공기로는 감염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생물이다. 환경에 따라 변종이 생겨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볼프강 피터센이 연출하고 더스틴 호프만, 모건 프리맨이 출연한 1995년 작 <아웃 브레이크>는 이런 가능성을 경고한 작품이다. 영화는 급성 유행성 출혈열을 일으키는 모타바 바이러스가 미국에 들어와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원래 모타바 바이러스는 신체 접촉을 통해서만 감염됐다. 그러나 이 바이러스는 미국이란 새로운 환경에서 공기를 통해 감염되는 변종 바이러스로 진화하기에 이른다.
▲영화 <아웃 브레이크>의 한 장면. ⓒ스틸컷 |
영화에서 모타바 바이러스는 한국 선적의 ‘태극호’를 통해 미국에 상륙한다. 한국이 마치 미국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외부 요인 가운데 하나로 그려져 불쾌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메르스로 인해 중국·홍콩 정부당국이 항의하고, 또 한국에 대한 국제여론이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아웃 브레이크>의 설정은 한국을 일방적으로 비하한다고 볼 수만은 없게 됐다.
탄저균, 선제적 사용 용도?
한편 메르스 창궐 시점에 주한미군이 오산 공군기지에 탄저균 실험 시설을 갖추고 오랜 기간 실험해온 사실이 드러나 큰 파문이 일었다. 주한미군의 탄저균 반입은 북한에 대한 생물학전 대비태세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주한미군이 북한에 선제적으로 생물학전을 감행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일고 있다. 미국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생물학전 능력을 시험한 사실은 이 같은 의구심을 뒷받침한다.
대배우 마틴 쉰 주연의 1997년 작 <스폰>은 미국의 생화학무기 선제 사용을 소재로 했다. 미 중앙정보국(CIA) 앨 시먼즈 요원(토드 맥펄레인)은 북한에 잠입해 첩보활동을 한다. 시먼즈 요원은 이 과정에서 상관인 제이슨 윈(마틴 쉰)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이러자 제이슨 윈은 시먼즈 요원을 무참히 살해하려 한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시먼즈는 악마의 힘을 빌려 응징을 노린다.
▲영화 <감기>의 한 장면. ⓒ스틸컷 |
제이슨 윈이 꾸민 음모란 다름 아닌 북한에 대한 생화학 무기 살포다. 제이슨 윈은 시먼즈를 제거한 뒤 북한에 결핵균을 퍼트렸고, 이에 북한에서는 결핵이 창궐한다. 영화 자체는 그저 그런 영화였지만 이야기의 뼈대는 무척 개연성이 높았다. 게다가 주한미군이 치사율 95%에 이르는 탄저균을 반입한 지금에 영화를 다시 보니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낀다.
수애, 차인표 주연의 2013년 작 <감기>는 한국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전염병이 창궐하는 상황을 그린 영화다. 이 영화는 메르스 창궐로 인해 새삼 주목 받고 있기도 하다. 영화에서 정체불명의 괴질이 퍼져 분당시가 격리되기에 이른다. 이러자 미국은 전투기를 띠워 분당시를 날려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차인표)은 단호하다. “저 사람들 모두 우리 국민이야”라며 끝내 시와 시민들을 지켜낸다. 새삼 이 영화에 주목하는 관객들은 위기상황에서까지 국민을 지키려는 대통령에게 감동한다. 메르스 확산은 정부의 초동대처 소홀 때문이었다. 1년 전 벌어진 세월호 참사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관객들은 <감기> 속 대통령에게서 대리만족을 찾는 것이다. 이런 반응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나 영화적 설정이 문제는 없는지 살피는 일도 소홀히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화 <감기>의 한 장면. ⓒ스틸컷 |
이 영화의 밑그림은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 괴질을 옮기는 숙주가 동남아 출신 밀입국자여서다. 동남아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에선 약자 중의 약자고, 특히 임금 체불, 구타 등 숱한 인권침해의 표적이 돼 왔다. 이런 처지의 사람들을 괴질의 진원으로 묘사하니 그저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또 이런 구도는 앞서 든 영화 <아웃 브레이크>와 일정 수준 유사하다. <아웃 브레이크>가 미국의 시선에서 변방인 한국 선적의 선박으로 모타바 바이러스 숙주가 들어오는 상황이었다면, <감기>는 한국 사회의 언저리에 위치한 동남아 출신 밀입국자를 통해 괴질이 퍼져 나간다.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적 시각을 우리 실정(?)에 맞게 변용했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이런 이야기 구도는 위험천만하다. 위기에 맞서 국민을 지키려는 대통령에 환호하되, 동남아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왜곡하는 시도에 대해선 엄중하게 질타하는 일도 잊지 말자.
유사 이래로 인류는 자연과 사회의 도전에 응전하면서 역사를 발전시켜왔다. 치료제가 없어 보이는 것만 같았던 바이러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페니실린은 인류의 끊임없는 응전의 산물이다. 이번 메르스 사태에 대해서도 적절한 치료제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치료제 개발을 위해 메르스와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영화 <인터스텔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