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서평] 본회퍼, 평화주의자인가 암살자인가?

지금 바로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복종하라

매튜 D. 커크패트릭, 『디트리히 본회퍼: 평화주의자와 암살자 사이에서』, 김영수 역(비아, 2014) 

『디트리히 본회퍼: 평화주의자와 암살자 사이에서』 겉 표지.
이 책은 “본회퍼의 신학과 행위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을 설명하고 그의 삶과 윤리학을 개관”(11) 하고자 한다. 저자는 본회퍼가 평화주의자와 암살자라는 서로 모순되는 면모를 지녔음을 먼저 지적한다. 그는 교회가 십자가 고난의 사랑과 평화의 정신을 따라 전쟁을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히틀러 암살 작전에 가담했다. 이러한 모순은 그의 신학과 행위 사이의 긴장을 암시하지만, 세간에 형성되어 있는 그의 성인 같은 면모를 약화시키기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철저하게 복종하고자 한 그의 신앙의 깊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그를 평화주의자 혹은 폭력의 보증인이라는 극단적 시각으로 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긴장은 “지금 바로 여기서”(48) 말씀하고 계신 하느님께 다가가려는 그의 독특한 윤리관의 산물이 다. 그는 하느님이 “모든 현실성의 원천... 아니, ... 현실 그 자체”(52)이므로 “하느님은 실제 상황에 관심을 두고 그에 관한 구체적인 요구 사항을 갖고 ... 지금 바로 여기서 말씀하시고 계신다”(48)고 믿었다. 그가 ‘지금 바로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이 직접 건네시는 목소리에 복종”(46)한 결과, 그는 누구보다 진지한 평화주의자였으며 “살인의 공범자라는 사실을 더 없이 무겁게 받아들였[던]”(39) 그리스도인일 수 있었다.  
1. 화평케 하는 자의 고민 
본회퍼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조국 독일에 가해진 연합국의 제재 때문에 유행처럼 번졌던 민족주의적 열기 속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민족에 대한 사랑이 “살인과 전쟁을 신성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20) 그는 루터가 교회와 국가는 둘 다 하나님이 설립한 왕국이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평화를 만들든 국가의 국민으로서 폭력을 행사하든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지 않다”(18)라고 주장한 대로 민족주의적 세계관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세계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히게 되었고, 특히 미국의 유니언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프랑스인 장 라세르의 평화관에 감명을 받아 잠재적으로 폭력적일지라도 국가의 요구에 복종해야 한다는 루터의 민족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일치운동에 헌신하면서 “주님의 교회는 민족, 계급, 인종을 가로질러 인류평화를 위해 전쟁의 반대편에 서 있어야”(27)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는 ‘화평케 하는 자’를 “평화를 누리려고만 하지 말고 평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폭력과 폭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9)라고 정의했다. 이후 그는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두왕국론을 폐기하고 하느님 앞에서의 정의와 부정의가 중요하며 교회가 이런 관점에서 나치에 대해 응대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1934년 덴마크 파뇌에서 열린 교회일치 대회에서 교회연합이 “광기어린 세상에 맞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28)할 유일한 대안이라고 역설했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고요한 진공상태였다면 누구든 목소리를 내고 증언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의 무력이 사람들을 조용히 짓누르고 있습니다. 교회들이 증언하고 고난에 동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그래 주기만 한다면! 하지만 그들 또한 증오에 눌려 질식해버렸습니다. 세상을 향해 말할 수 있는 것 오직 하나,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에 속한 교회일치협의회(Ecumenical Council)뿐입니다. (27-28) 
하지만, 1937년에 접어들어 점점 심해지는 나치의 발호 앞에서 교회도 실패하고 만다. 본회퍼에게는 더 이상 함께 저항을 도모할 공동체가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가 히틀러의 암살 모의에 가담하게 된 이유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이 상황에 대해 “던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몸뿐이었다. 비폭력 저항도 더는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었다”(40)라고 기술하고 있다.  
2. 하느님이 직접 건네시는 목소리에 복종하는 자의 윤리 
본회퍼가 소위 정당한 전쟁(just war)의 옹호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독특한 기독교윤리관 때문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윤리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44)라고 말했고 자신의 ‘윤리학’을 ‘윤리의 파괴’라고까지 일컬었다(49). 그는 윤리학이 추구하는 경건함 혹은 종교성으로 하느님을 찾으려는 노력은 타락한 인간의 “뒤집힌 마음이 벌이는 어리석은 시도”(46)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윤리학’은 “하느님이 직접 건네시는 목소리에 복종”(46)하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이 되어야 하고 교인들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 기독교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그에게는 조문화된 윤리가 오히려 하느님을 향한 복종과 충돌하는(47) 종교성이거나 자기위안적 체제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의 회복을 추구하는 기독교 ‘윤리’란 “다른 모든 윤리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윤리로 간주해야”(49) 한다. 
윤리학에 대한 이러한 그의 생각을 정리하면(47-48), 첫째, 윤리학은 개인과 하느님의 직접적인 관계를 가로 막는다. 왜냐하면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의지하기보다 가시적인 윤리체계에 기대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 윤리학은 신적인 도약을 바라는 인류의 갈망을 충돌질한다.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을 개인이 판단하게 하기 때문이다. 셋째, 윤리학은 하느님의 관계적 속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직접 개인과 관계하기를 원하시는데 윤리적 규칙이 그 사이를 매개하게 하기 때문이다. 넷째, 윤리학은 하느님의 명령을 윤리적 체계의 범위 안으로 제한한다. 윤리학은 논리적으로 의외이거나 불가해한 명령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이처럼 미리 규정된 행위 체계를 따르기보다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우선할 것을 주장했다. 그가 믿는 하느님은 모든 현실성의 원천이기 때문에 윤리 규칙 속에 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하는 현실 속에 임재하는 존재로서 윤리적인 범주를 지향하면서도 그 범주를 초월하는 명령을 내릴 수도 있는 분이다. 하지만, 그렇게 윤리를 초월한 명령이라는 인식 자체가 타락한 인간의 뒤집힌 마음으로는 하느님의 온전한 뜻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하느님은 윤리적 불가능성을 유일하게 가로질러 결국 지극히 윤리적인 지향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윤리 체계 속에 한정할 수 없는 존재이며 이분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기독교 ‘윤리’의 궁극 지향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본회퍼가 평화주의자이자 암살자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가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추구한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개의 경우 하느님은 사람들이 평화주의자로 남을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 매우 놀라운, 심지어 불합리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명령을 내리실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열어 두어야 한다”(57). 
3. 하느님의 명령을 직접 듣는 방법 
기독교 윤리학은 마치 바리새인이 하듯이 자기 의로움(self-righteousness)을 형성하는 체계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인간이 타락한 존재라는 사실을 윤리학의 종교성과 경건함을 통해 망각하게 하는 것이다. 율법이 죄가 무엇인지 일러주었어도 타락한 인간의 인식 속에서 율법은 자기구원의 통로로 둔갑해버렸다. 바리새인들이 독사의 자식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율법의 조문 안에 가두고, 율법에 따라 정죄함으로써 하느님을 참칭하며, 율법의 조문으로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방해하고, 결국 율법 자체를 신격화하여 생명의 현실을 외면했다. 이러한 왜곡은 자기 의로움에 의해 발생하는데, 이미 타락한 인간의 자기 의로움으로는 타락 전의 상태를 회복할 수 없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하느님이 직접 건네시는 명령을 듣고 하느님 안에서 그 명령을 준행하며 자유와 평화를 누렸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혜 안에서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직접 건네시는 명령을 듣는 길 이외에는 그 은혜를 받아 누릴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본회퍼는 죄로 물든 세상에서 하느님의 명령에 복종하며 사는 방안을 다음처럼 제시한다. 
“내가 선해지는 길은 무엇인가?” 혹은 “선을 실천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 대신 “하느님은 무엇을 보고 계신가?” 아니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53)   
그러나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감정적인 체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차라리 우리의 모든 능력을 끌어 모아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서 드러나는 그분의 본성과 뜻을 찾는 일”(66)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능력을 끌어 모[으는]” 노력은 “성서와 기도에 관한 공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 양심에 귀 기울이는 것,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 나에게 하나의 그리스도와 같은 동료 그리스도인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과 같은” 노력을 포함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과 본성을 반영하는, 하느님이 만드신 윤리적 원칙과 질서를 따르는 것” 또한 포함한다(66-67). 
물론, 이러한 노력들이 자기 의로움을 구축하는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있어서 인간의 자기 의로움이란 개념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은 모든 능력을 다해 하느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명령하시는지를 식별하고, 그런 뒤에는 그분께 은총과 자비를 구한 채 모든 행동을 하느님께 위탁해야”(70) 할 따름이다. 그는 우리가 “의롭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을 버리며 선하고 옳은 존재가 되려는 우리의 목적을 철회하고 윤리체계가 주는 안락함을 포기할 때, 우린 비로소 하느님의 뜻을 찾[게]”(53) 된다고 믿고 있다. 
한편, 본회퍼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종교적 극단주의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게 된다. 모든 것이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살폭탄테러나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일 등도 합리화시킬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음성 듣기를 강조하기는 해도 그 음성을 정확히 들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의 은총과 자비를 바라며 그분께 가까이 가고자 노력할 뿐이다. 우리는 오직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만 그러한 행위를 감행할 수 있다”(71-72).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자살폭탄테러를 저질렀다면, 그것은 “자신의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나온 것”(72)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4. 바로 지금 여기서 울려퍼지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  
어쨌든 본회퍼는 암살에 가담했고 그 일에 전념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엄청난 불안감에 휩싸였고 마지막까지 그 불안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런 본회퍼를 붙들어 준 것이 “자신을 이끄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용서하시는 그분의 자비에 관한 이해”(72)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이 모든 상황 가운데 당신 뜻을 직접 전할 공간을 남겨두는”(57) 그리스도인적인 삶의 핵심을 실행한 사람이다. 그가 믿고 있는 하느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란 “학문적으로 파악 가능한 무시간적 메시지 같은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바로 지금, 여기에 울려퍼지는 것”(2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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