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강의 노트』 겉 표지. |
이 같은 의문은 사뭇 심오한 통찰을 요하는 주제들이고, 이를 본격적으로 논하려면 거대 담론을 들먹여야 한다. 그러나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사진과 교수로 40년간 재직하면서 사진을 가르쳐온 필립 퍼키스는 어렵게만 느껴지는 주제들을 쉽고 명쾌하게 풀어 나간다. 그의 저서 『사진강의노트』(원제: Teaching Photography)는 지난 40여 년간 거리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또 학생들에게 사진을 가르치며 습득한 통찰이 스민 저작이다.
책 자체는 154쪽 분량에다 텍스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어 읽기에 부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책을 읽어 내려가기는 쉽지 않다. 행간을 읽어내기 위해선 저자의 스승이자 풍경사진의 대가인 앤젤 애덤스, 헬렌 레빗, 다이앤 아버스, 워커 에반스, 앙드레 케르테즈, 으젠느 앗제, 아구스트 잔더 등 사진사에 한 획을 그은 사진가들에 대해 사전 지식을 쌓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다. 저자는 ‘신고전주의 발레’라는, 그야말로 발레의 새 지평을 연 조지 발란신, 재즈 연주자 줄리어스 햄플, 엉뚱한 선문답으로 유명한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 명포수 요기 베라,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를 비롯한 문학가까지 다양한 예술장르의 장인들마저 끌어 들인다. 저자인 필립 퍼키스는 이 모든 논의를 통해 독자들을 보다 심오한 통찰의 세계로 이끈다. 그가 펼치는 이야기는 마치 조그만 파인더 속에서 펼쳐지는 세상의 다채로움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하다.
“보여지는 것, 그 자체, 너무 성급하게 메타포나 상징으로 건너뛰지 마라. ‘문화적 의미’를 담으려 하지 마라. 아직 이르다. 이런 것들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먼저 대상의 표면에 떨어진 빛의 실체를 느껴야 한다.... 이름을 주지도, 상표를 붙이지도, 재 보지도, 좋아하지도, 증오하지도, 기억하지도, 탐하지도 마라. 그저 바라만 보아라. 이것이 가장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저 보이는 게 찍힐 뿐이다. 카메라는 파인더 안에 보이는 사물의 표면에 반사된 빛을 기록할 뿐이다.”
“그것의 의미를 경험한다는 것, 몇 초에 불과하더라도 그것을 그저 바라만 보며 그 존재를 느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언어가 배제된 목소리, 음악의 선율, 도자기, 추상화, 그것의 현존, 그것의 무게, 그것의 존재와 나의 존재의 경이로움. 사실 그 자체의 신비.” (본문 중에서)
기술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
도심 대형 서점에 가보면 사진과 관련된 서적들은 넘쳐난다. 그런데 이들 서적 대부분은 셔터 속도 얼마, 조리개 값 얼마, 감도 얼마 등등 사진 찍는 기술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한다. 그러나 이 책 『사진강의노트』는 기술에 대한 언급은 찾아 볼 수 없다. 물론 본문 가운데 사진인화에 관한 기술을 짧게 언급한다. 그러나 이 대목은 어디까지나 사진작법의 최초 과정인 촬영단계에서 있을지 모를 기술적 실수에 대비하기 위한 조언일 뿐이다.
필립은 기술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그보다 눈으로 바라보는 것과 사진으로 경험하는 것의 관계, 사진의 주제가 되는 것끼리의 주체적 협동을 더 강조한다. 사실 사진, 그리고 사진을 아우르는 예술에서 기술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술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보고 느끼는 사진 속에서 사진의 내용이 되는 질감과 명도를 제대로 살릴 수 있도록 사진가의 섬세함을 기르는 일이다. 음악의 음색, 목소리의 어조, 감정의 느낌, 시의 가락, 떨림의 장단, 동작의 선.” (본문 중에서)
얼핏 아담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책이지만 글귀 한 줄 한 줄은 마음 속 깊숙이 내재한 그 무엇인가를 꿈틀거리게 한다. 몇몇 인상적인 대목을 인용해 본다.
“사진은 절대적인 크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상대적인 크기를 보여줄 뿐이고 미루어 짐작될 뿐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세상의 어떤 것도 자체의 크기 따윈 없으며 오직 다른 것과 비교해서 어림된다는 사실이다. 자, 주행기록계, 거리 측정기, (손을 포함하여) 그 밖의 다른 측량장치들은 모두 상대적인 크기를 표준치에 맞춰 재도록 합의된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장치들이 그저 소통에 유용할 뿐이지 절대적인 크기를 보여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조차 못한다.”
“나는 어떤 장소에 서 있다. -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 내 앞에 놓인 무언가를 바라본다. - 그것에서 어떤 주제가 튀어나올지 알 이유도, 방법도 없다. - 나와 그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빛. 그 빛을 기록하는 작은 카메라를 집어 든다. 결과는 내 한계를 초월하는 세계를 보일 수도, 고양된 내 감정을 드러낼 수도 있다. 이 모든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나는 모른다. 앞으로도 절대 알지 못하기를 희망한다.”
저자가 구사하는 언어는 너무나도 쉽다. 그러나 그 속에 스민 통찰의 깊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 책을 읽다보면 사진이라는 매체에 접근하는 저자의 태도와 통찰에 놀라고, 사진이라는 매체가 인간의 내면을 풍부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란다. 이 모든 느낌을 한정된 지면에 송두리째 옮길 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직업적으로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사진 잘 찍는 ‘요령’을 다룬 책보다 이 책을 먼저 접한 건 실로 우연이 가져다준 값진 선물이었다. 이 책이 아니었더라면, 늘 셔터 스피드와 조리개 값, 색온도 등 기술적인 문제만 씨름했을 테니까 말이다.
“겨울 하늘을 가르는, 헐벗은 나뭇가지를 스치며 날아가는 새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이 순간, 나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필립 퍼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