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웅 교수 ⓒ베리타스 DB |
분단의 원인을 논할 때 정치학에서는 흔히 외인론과 내인론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외인론은 한반도가 지닌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외세들이 개입하여 분단되었다는 분석이다. 한반도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마주치는 요충지로서 강대국들의 세력 대립의 각축장이 되어 왔다. 조선 시대에 이미 한반도에 대한 분할 논의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중국 명(明)나라와 일본 간의 분할 논의가 있었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한반도는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열강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이었다. 연합국들은 카이로 회담(1943년: 전쟁이 끝난 후 적당한 시기에 한반도의 독립이 허용될 것이라고 결정)과 포츠담 회담(1945년: 카이로 회담의 결정 재확인) 등을 통해 한반도를 둘러싼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표출하였고, 연합국들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한다는 명분하에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주하여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국토 분단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외인론의 논리이다.
한편, 내인론은 우리 민족 내부에서 분단의 원인을 찾는 것으로 민족 내부의 응집력과 통일 역량이 부족하여 분단을 초래했다는 분석이다. 2차 대전 패전국인 오스트리아가 칼 레너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분단을 막은 사실과는 비교되는 결과를 강조한다. 분석에 따르면,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을 상실한 이후 독립 운동을 효율적으로 추진할 만한 구심점을 형성하지 못했으며, 3.1운동 이후 항일 투쟁은 중국, 미국, 소련, 국내 등 지역적으로 흩어져 전개되어 국권 회복 방법에 대한 의견 대립과 독립 운동 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을 해소할 통로가 없었다. 그리고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항일 투쟁에 대한 이념과 노선 차이 때문에 연합 전선을 형성하지 못하고 적대적 관계로 치달아 민족 내부의 응집력이 약화되었다.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일제 타도를 위한 연합 전선을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이 패망함으로 한반도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신탁통치안을 두고 찬반으로 분열됨으로써 결국 한반도 문제가 강대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처리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처럼 우리의 역량 부족이 분단의 원인이라는 논리이다.
자! 그러면 우리 분단의 원인을 보는 신앙적 관점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받아들인 한국 기독교의 죄 때문에 분단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솔로몬이 이방여인들을 아내로 받아들임으로 이방신들이 들어왔고 그 결과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단이 되었다는 성경이야기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기독교 내부에서는 이 논리를 신앙적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필자는 어느 학술회의에서 이 관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어떤 신학자는 이러한 연결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기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고, 또 어떤 목사님은 이를 확신하기도 했다.
또 다른 관점으로는, 이 분단을 우리 민족을 연단시키는 과정으로 해석하는 논리가 있다. 세계선교와 평화를 이끌 민족으로 우리 민족을 쓰시기 위해 우리 민족을 단련시키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시험으로 보는 관점이다. 함석헌은 “38선은 우리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시험문제”라고 피력한다. 우리 민족이 세계 선교를 완성할 민족이기 때문에, 세계 선교의 마지막 주자로 쓰임 받을 만한 자격을 검증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관점이다(오성훈, 『하나님의 눈으로 북한 바라보기』, 54).
신사참배로 인한 징벌로 보는 관점과 관련하여 참 묘한 것은 1938년,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안이 일제 경찰들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통과된 날이 9월 9일인데 정확하게 10년 후인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한국 장로교회 최초의 분열이 바로 이 신사참배 회개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해방 후 신사참배 회개운동이 일어났는데 회개에 참여하는 교회는 소수였고, 대부분은 미온적이거나 그럴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회개운동을 주창한 고려파가 장로회 총회로부터 축출되어 1952년 교단을 형성하였고, 그 후 1953년 기장의 분열이 있었으며, 남은 큰 교단은 1959년 백중지세의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되었다(김영재, 갓피아 뉴스, 2008.9.17). 2차 대전이후, 나치정권에 협력했던 독일교회는 고백교회운동을 일으킨 소수에 대해 정당함을 인정하고 호응함으로써 하나가 되었지만 한국교회는 다수가 소수의 제의에 불응함으로써 교회를 분열시키게 되었다. 회개에 인색하면 용서에도 인색할 수밖에 없다. 마땅히 해야 할 회개를 건너뜀으로 용서와 관용이 없는 교회가 되다보니 결국 오늘처럼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이다.
신사참배 반대투쟁은 2천여 명이 투옥되고 이중 주기철 목사 등 30여 명이 순교하는 등 일제에 끝까지 저항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해방 후 전개된 신사참배 회개 운동은 신앙적 차원에서 시도되었다. 그런데 결국 신사참배는 한국교회의 분열까지 가져왔으니 그 폐해는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교회의 분열은 오늘날 통일문제에 대한 관점이 교단마다 달라지게 만들었고 이에 대해 서로 갈등하는 모습마저 자주 연출하게 만들었다.
한편, 분단이 연단이라는 관점에 따르면, 여태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우리 민족은 아직 통일을 이룩할 준비가 부족하다는 논리가 도출된다. 사실 우리나라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세계에서 보기 드문 국가이며, 이에 대해 우리가 자부심을 가질만하지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통일은 고사하고 우리 내부의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도 벅찬 상황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관점은 이런 상황에서 통일이 된다면 수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임은 명약관화하기에 우리로 하여금 좀더 준비하도록 만드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 관점은 분단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민족을 세계사에 필요한 민족으로 쓰실 것이라는 비전을 주기도 한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비록 신사참배의 결과로 분단이 되었다는 인식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역사에 대한 반성 없이는 미래를 개척할 수 없다는 명제를 따를 때, 분열을 가져온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 없이는 한국의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신앙적 관점은 충분히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겠다. 신앙적 관점에서 볼 때, 신사참배로 말미암아 교계의 분열이 왔기 때문에 이제 한국 기독교계는 신사참배에 대한 참회를 통해 교계 분열의 뿌리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교단의 통일은 쉽지 않겠지만 통일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서로 뜻을 같이하고 하나가 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들이 조금씩 보이고 있다.
한편으로 이 분단이 연단, 시험이라는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분단의 고통을 해소하는 과정을 통해 갈등을 치유하고, 동북아, 아니 나아가 세계의 평화민족으로 우뚝 설 수 있다는 희망과 인내심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이 관점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분단을 해소하여 마침내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치열한 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가 회개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 내고, 인내를 통해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준비를 끝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고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의 소원인 통일을 허락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