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의 한 장면. ⓒ스틸컷 |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이 같은 진리가 선택적으로 작동한다. 재벌은 엄청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도 오히려 당당하다. 간혹 감옥에 가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 수감자들에겐 상상할 수 없는 특혜를 누린다. 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대중의 기억에서 잊혀 질 때쯤 정부와 정치권은 이들을 빼내려고 골몰한다.
류승완 감독이 연출하고 황정민, 유아인이 출연한 <베테랑>은 이렇게 법 위에 군림하는 재벌의 민낯을 폭로하는 영화다. 부조리를 다루게 되면 작품 전체의 분위기는 음울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르다. 시종일관 호쾌하다.
광역수사대 소속 서도철(황정민) 형사는 안하무인 재벌 3세인 신진물산 조태오(유아인) 기획조정실장을 잡기 위해 온 사방을 들쑤신다. 명동 대로에서 조태오한테 흠씬 두들겨 맞으면서도 전혀 풀죽지 않는다. 그보다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공권력마저 안중에도 없는 재벌 2세의 무례함을 까발린데 통쾌해 한다. 재벌의 ‘갑질’이라는, 우리 사회를 좀 먹는 병폐를 액션활극으로 풀어낸 감독의 솜씨는 탁월하다. 황정민의 연기는 이제 물이 오를 대로 올랐다. 멜로면 멜로, 액션이면 액션, 어떤 배역을 맡겨도 다 잘해낸다. 유아인의 연기도 소름끼칠 만큼 강렬하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의 한 장면. ⓒ스틸컷 |
사실 명동대로에서 벌어지는 조태오와 서도철의 혈투 장면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강력한 은유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최철원 전 M&M 회장의 이른바 ‘맷값 폭행’,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한화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등 재벌가의 갑질은 은밀한 곳에서 이뤄진다. 피해 당사자들이 용기를 내어 언론에 제보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억울함을 속으로 삭이기만 했다면 재벌 총수 및 2, 3세들의 일그러진 행각은 절대로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서도철 형사가 완력만 앞세워 조태오의 몸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냈다면 서 형사는 재력을 앞세운 조태오 측의 로비에 영락없이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서도철은 이런 상황을 미리 내다본 것 같다. 조태오를 쉽게 제압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되려 조태오에게 죽기 일보직전까지 얻어맞는다. 발목이 부러져도 기꺼이 감수한다.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스마트폰을 꺼내들어 이 광경을 찍는다. 재벌 3세가 형사를 두들겨 패는 장면을 온 시민이 다 지켜봤으니 신진물산으로서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어느 면에서 영화는 약간은 허황되다. 서도철은 경찰 수뇌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조태오에 대해 수사망을 좁혀 나간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은 조태오의 오른 팔 최 상무(유해진)이 담배를 꺼내 물자 기다렸다는 듯 불을 붙여주는 관할 경찰서 담당 수사관에 더 가깝다. 서도철은 이런 광경에 심사가 뒤틀린 듯, 그 수사관의 팔을 비틀며 한 마디 한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
반갑지 않은 1천 만 돌파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의 한 장면. ⓒ스틸컷 |
이 영화 <베테랑>은 개봉 25일 만인 지난 8월29일(토) 1천 만 관객을 넘어섰다. 최동훈 감독의 <암살>이 1천 만을 넘은지 2주 만에 이뤄진 쾌거다. 그러나 썩 반갑지만은 않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영화는 사회 부조리를 다뤄왔다. 정지영 감독은 <부러진 화살>(2012)을 통해 사법부의 집단 이기주의를 꼬집었고, 부지영 감독은 <카트>(2014)를 통해 소모품으로 전락한 노동자의 처지를 생생하게 그렸다. 또 송강호 주연의 <변호인>(2013)은 1980년대 공안탄압의 실체를 드러내는가 하면, <암살>(2015)은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과거사를 건드린다. <명량>(2014)은 직접적으로 부조리를 다룬 것은 아니나 “군인에게 있어서 기본은 충(忠)이고 그 충은 백성에게 향해야 한다. 백성이 있고서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느니라”는 대사로 국민에 대한 책임은 방기한 채 애국만 강요하는 현 정치권력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이 가운데 <명량>, <변호인>, <암살>은 1천 만을 넘기는데 성공했다.
사회 부조리를 고발한 영화들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몇몇 작품은 우리 국민 5명 가운데 1명이 봤어도 우리 사회엔 그 어떤 변화의 조짐도 일어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갑질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고, 최근엔 정부의 노동시장 개혁으로 아예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실정이다. 판사의 권위를 그토록 내세웠던 사법부는 권력의 시녀가 됐다는 비판여론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1980년대 공안정국의 망령은 되살아나 거리를 활보한다. 한편 과거 친일파들의 행적은 애국으로 둔갑하는가 하면, 한 걸음 더 나아가 ‘건국’을 내세워 친일의 역사를 감추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의 한 장면. ⓒ스틸컷 |
재벌의 갑질도 다르지 않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들어 재벌의 힘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막강해졌다. 사실 재벌의 갑질이 횡행하는 이유는 정부와 정치권이 ‘경제 살리기’란 명분하에 재벌들을 감싸주고 있어서다.
블로그나 소셜 네트워크(SNS)에 올라온 <베테랑> 감상평은 대부분 ‘통쾌하다’, ‘후련하다’는 반응 일색이다. 불행하게도 영화에서나 ‘갑’들을 향해 강펀치를 날릴 수 있지 현실에서는 어림도 없다. 현실을 돌아보자.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재벌 기업 입사를 위해 4년 내내 살인적인 등록금에다 역시 살인적인 비용을 들여 스펙쌓기에 몰두한다. 여기서 그치면 차라리 다행이다. 졸업이 임박한 시점에서는 고액의 취업컨설팅을 받고, 그것도 모자라 면접을 위해 성형하는 일도 벌어진다. 공권력의 사정은 어떨까? 검경이 법 위에 군림하는 재벌에 공권력을 들이대기는커녕 재벌의 방패막이 노릇을 자처하며 제2의 인생을 위한 준비를 한다. 이런 현실이기에 후련하다는 반응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영화 한 편 보고 그간 억눌린 감정을 해소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자. 그보다 사회 부조리를 더욱 철저하게 인식하고 그래서 부조리를 타파하는데 힘을 모으자. 감정의 배설은 현실에 대한 무지 보다 더 해로우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