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에서 이어집니다.
C. 그리스도교와 가난한 사람들
▲김근수 <가톨릭프레스> 편집인. ⓒ사진=지유석 기자 |
그리스도교의 핵심 가르침을 잘 나타내는 비유 하나를 보자.
그때에 예수께서 길을 떠나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저를 선하다고 합니까?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당신은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당신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시오. 그러면 당신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여러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하고 서로 말하였다. (마르코복음 10,17-27)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는 심각한 질문에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의외의 답이 예수에게 나왔다.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라거나 깨달으라는 말이 아니고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의아한 느낌이 든다. 아니 그리스도교가 쩨쩨하게 겨우 가난 같은 것을 주제로 삼다니. 가난이란 삶에서 맞이하는 무수한 모습 중 겨우 하나가 아니던가. 죄나 죽음 같은 좀 더 고상하고 품격 높은 주제가 그리스도교에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 비유는 자비 맥락에서 줄곧 해설되어 왔다. 그리스도교의 유일한 최고 주제는 자비라는 식으로 말이다. 자비를 실천하려면 정의가 필요하다. 자비 감각뿐 아니라 정의 감각이 필요하다. 가진 돈을 팔아 나누는 정도가 아니고 왜 가난이 생겼느냐 물어야만 하겠다.
가난한 사람들과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보인 프란치스코 성인에게도 모자란 것이 하나 있다. 가난한 자에 대한 자비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가난의 원인을 캐고 가난을 줄이는 방향으로 애쓰는 것이 해방신학이 생긴 이유다. 그런데 최초의 해방신학자는 예수다.
자비와 원수 사랑을 가르친 예수가 체포된 것이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 운명은 가난의 원인을 알고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어 불의한 세력에게 저항하는데서 결정되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재산을 팔아 도와주지는 못했다. 예수에게 그럴 재산도 없었던 것 같다. 재산 대신 예수는 자기가 가진 최고의 재산인 목숨을 보시하였다.
인간이 악에 저항하고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악을 이길 수 없다는 교육적 사례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다. 인간의 노력 없이 악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하느님이 인간에게 알려주는 장면 아닐까. 악을 없애는 인간의 노력 없이는 하느님이 단독으로 악을 없애지는 않겠다는 암시가 아닐까.
고통 받는 예수, 고통 받는 하느님의 모습은 그리스도교가 인류에게 남겨준 진리이자 신비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스도교에게 주어진 자유와 해방을 향한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예수처럼 악에 저항하고 투쟁하고 희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임무는 십자가를 분석하고 해설하는데 있지 않고 십자가를 따르는데 있다. 그리스도교의 무대는 도서관이 아니라 현장이다.
예수와 하느님 나라의 관계를 종교와 가난한 사람들의 관계에 비유하고 싶다. 종교 입장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가난한 사람들 입장에서 종교를 보는 것이다. 그래야 종교의 진면목이 비로소 보이고 가난한 사람들의 가치가 제대로 보일 것이다. 그러면 종교에서 자유와 해방이 얼마나 위대한 지향점인지 드러날 수 있다.
종교가 우선 상대할 대상은 정부나 부자나 권력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다. 부자나 권력자 입장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볼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입장에서 부자나 권력자를 보는 것이다. 그래야 세상이 진실이 삶이 제대로 보인다. 종교가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알고 싶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으면 된다. “세상 권력자들에게 특혜와 지지를 받는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진짜 교회가 아니다.”(로메로 대주교)
예수와 로메로 대주교의 삶을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진실을 말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며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면? 죽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자유와 해방이 가리키는 길이다. 종교는 현실을 정직하게 보고 진실을 말하라는 것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사명을 지속하며 가난한 이들을 향한 투신을 계속하여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97)
D. 자유와 해방의 길
헬조선 한국은 7포 사회를 넘어 집단 우울증에 걸린 사회 같다. 각자도생이 생존 비결로 추천되고 절망이 권유되는 사회 같다. 정치, 경제, 종교 등은 모두 엉망이다. 국민 대부분 일상에서 적당히 부패에 물들었고 죄의식은 멀리 추방된 지 오래다.
종교에는 이기주의가 만연해 있다. 구원 이기주의, 종파 이기주의, 성직자 중심주의가 퍼져 있다. 종교는 누가 먼저 망하나 서로 경쟁하는 것 같다. 종교인은 누가 먼저 망가지나 시합하는 것 같다. 종교는 희망을 주기는커녕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그 걱정의 대부분은 신자들이 아니라 종교인 탓에 생겼다. 착한 신자도 있지만 교활하고 욕심 많은 신자들이 종교를 망치는데 공헌하고 있다. 종교는 중산층의 사교모임이라는 지적이 있을 정도다.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라고 그리스도교는 요청한다. 자유와 해방은 깊은 겨울잠에 빠진 그리스도교를 깨우는 자명종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미국 방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회의 가르침을 끊임없이 설명하려 애쓰지만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균형이고 위험하고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
자유와 해방은 복잡한 주제다. 자유와 해방을 위한 싸움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모든 세대가 자유와 해방을 위한 싸움에 투신해야 한다. 이 기나긴 여정에 누가 감히 쉽게 승리를 예고할까. 이 주제에 많은 좋은 제안들이 이미 있지만 나는 몇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1. 부패에서 벗어나기: 지금 종교는 부패에 크게 물들었다. 신자들이 일상생활에서 부패에 적당히 물들었다면, 종교인들은 종교 단체를 좌우하며 부패에 물들었다. 종교가 자기 부패를 끊지 않으면, 종교에서 훌륭한 인물과 위대한 문헌이 쏟아져 나와도, 다 허무해진다.
지금 종교는 자유와 해방을 감히 가르칠 형편이 못된다. 종교는 먼저 자기 부패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회는 쇄신을 위하여, 곧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 성찰을 통하여 교회의 지체들로 말미암은 결함을 지적하고 단죄함으로써 결함을 바로잡고자 과감하고 열정적으로 싸워나가야 합니다.” (교황 바오로6세, 주님의 교회 11항)
종교가 자기 가르침을 현대 학문과 시대의 질문에 어떻게 합리적으로 응답하느냐만 사람들이 보고 있지는 않다. 종교와 종교인이 부자와 권력자와 어떻게 지내는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는지 보고 있다. 종교와 종교인의 부패를 없애지 않은 채 붓다 예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은 일이다.
종교가 부패와 손 끊는데 좋은 방법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종교의 회개를 요구하고 또 도와준다. 가난한 사람들을 가까이 해서 회개하지 못한 종교인은 거의 없다. 부자와 권력자와 가까이 지내가다 부패하지 않은 종교인은 거의 없다. 가난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면 회개하기 쉽고, 부자와 권력자와 가까이 지내면 부패하기 쉽다.
불의와 손을 끊으려 노력해도 자기도 모르게 불의에 가담하는 결과가 있을 수 있다. 선을 행하려 했는데 결과적으로 악을 행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불의에서 손을 끊도록 애쓰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을 향해 삿대질하기 전에 자신의 손을 씻어야 한다. 빌라도 총독은 예수를 죽이라 명령하고서 곧 자기 손을 씻었다. 빌라도 총독처럼 손을 씻는 것은 나쁘다.
2. 희생자를 기억하기: 자유와 해방을 위해 기억이 필요하다. “신앙인은 기억하는 사람이다(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22항). 자유와 해방을 위해 지금 싸워야 하지만, 지난날의 싸움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과거의 투쟁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지금 저항할 수 없다.
자유와 해방의 역사에는 희생자와 증거자의 얼굴, 이름, 이야기가 있다. 자유와 해방을 위해 애쓴 사람들의 이름과 삶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종교는 그것을 기억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 종교에는 종교사 공부뿐 아니라 역사교육이 중요하다.
그리스도교가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해방 이후에 정치적으로 부끄러운 일에 가담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 과거를 학술적으로 정리하고 사과해야 한다. 사과문 하나로 과거의 악행이 사라질 리 없지만, 친일의 역사와 친일파 처리 문제는 잊으면 안 된다.
3. 희생자들 곁에 있기: 희생자 곁에 있는 것은 역사의 맥락과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당대를 해석하는 것이 곧 예언자의 임무였다. 현재를 정직하게 해석하는 것이 종교의 큰 임무 중 하나다.
“변방으로 가라”(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20항). “설교자는 백성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154항). 우리가 희생자 곁에 있는다고 해서 그 희생자가 다시 살아나지는 않는다. 희생자의 삶을 추앙한다고 해서 희생자의 억울한 삶이 보상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희생자 곁에 있는 것이 그렇지 않는 것보다 훨씬 좋다.
특히, 그리스도교는 부활의 눈으로 현재를 보는 것이다. 부활은 죽은 사람의 시신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변하는지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악이 선을 이기지 못하며 역사의 최종 승자는 선이라는 진리를 알려준다.
4. 종교간 대화: 자유와 해방을 위한 노력에서 각 종교의 특징이 나타날 수 있다. 종교가 서로 진리를 강요하지 말고 자유에 호소하면 어떨까. 불교가 반드시 프란치스코 교황을 모범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가톨릭이 성철스님의 사례를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다.
종교가 서로 진리를 강요하지 말고 자유에 호소하면 어떨까. 각 종교 모델에서 서로 배우면 되지 않을까. 자유와 해방으로 가는 단 하나의 길은 없으니 말이다. 어느 그릇에 담겨 있든지 진리의 물을 마시면 된다. 여기서 종교간 협조가 요청된다. “다른 이의 거룩한 땅에서 우리의 신발을 벗어야 한다”(탈출기 3,5).
여기서 이웃종교에 대한 내 좁은 소견을 밝히고 싶다. 1. 종교는 그 장점은 장점끼리 단점은 단점끼리 비교하는 것이 적절하다. 2. 이웃 종교의 아픔은 내 아픔이요 이웃 종교의 기쁨은 내 기쁨이다. 3. 이웃 종교를 모르면 내 종교도 제대로 알기 어렵다. 내 종교를 잘 알아야 이웃 종교도 알 수 있다.
제대로 이해된 종교는 인간에게 가벼운 짐 아닐까. 우리가 종교를 어깨에 짊어질수록 종교가 우리 짐을 가볍게 해 주니 말이다. 종교는 여전히 희망을 줄 수 있다.
맺음말
작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천주교회에 두 가지를 요청했다. 가난한 교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만들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천주교회는 교황의 이 부탁에 시큰둥하며 못 들은 척 하고 있다. 돈과 권력에 의지하여 교회를 세우려는 생각은 헛된 욕심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깨우치고 일치시키는 일이 어느 종교에서든 가장 어려운 문제 아닐까.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 분열되어 있지 않은가.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고 부자나 권력자들에게 희롱당하며 오히려 그들을 지지하고 있지 않은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개인이나 단체가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지는 않는가.
종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깨우쳐야지 속이거나 우민화해서는 안 된다. 아니, 종교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배울 자세가 부족한 것이 보다 더 기초적인 문제 아닐까. 종교가 가난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급한 것이 아니라 종교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배우는 것이 우선할 일 아닐까.
그래서 깨어 있는 신자들과 의로운 학자들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한편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종교학자들이 한가하게 커피를 마시며 학술 토론을 계속 할 수도 없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러나 학술 토론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