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에서 이어집니다.
3. 모든 폭력의 멸절로서의 신적 폭력: 발터 벤야민
▲이관표 박사(연세대 강사). ⓒ베리타스 DB
새로운 권력에 대한 태도를 모색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벤야민의 신적 폭력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벤야민은 그의 논문 「폭력비판에 관하여(Zur Kritik der Gewalt)」에서 폭력이 지닌 다양한 양태들을 기술하고, 그것을 통해 그 폭력이 모두 말살되는 신적 폭력을 이야기한다. 물론 벤야민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은 이 논문에서 말하고 있는 폭력에 대한 논의를 단순한 종교적 차원의 폭력예찬으로 보거나 유대성경, 즉 구약성경의 유대인 선민사상을 옹호하려는 전략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언급되는 신적 폭력에 대한 논의를 전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파악해볼 수 있음을 통찰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자기 비움의 힘(혹은 권력)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가족 안의 소소한 일상부터 시작하여 국가 간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폭력의 상황들에 직면한다. 사실상 힘 있거나 권력을 지닌 누군가가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더라도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행위가 가해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의 보편적인 존재방식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것 자체를 폭력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기준 제시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폭력에는 언제나 대상들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윤리 등의 다층적인 요인들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폭력은 보편적임과 동시에 다층적인 실로 복잡한 현상이다. 뿐만 아니라 이 폭력은 어떤 목적과 관련하여 평가됨과 동시에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과도 연관되면서 그 판단 및 규정의 어려움은 보다 심각해진다. “폭력 일반이 원칙으로서, 심지어 스스로 정당한 목적들을 위한 수단으로서, 윤리적이냐는 물음은 여전히 열린 채로 있는 셈이다.”
벤야민은 앞서 언급한 폭력의 목적과 수단이라는 기준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의 법적 평가를 이야기하는데 그 중 첫 번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연법이라고 이야기하는 법적 기준이다. 자연법 안에서는 일반적으로 폭력은 정당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왜냐하면 정당한 목적을 위해 폭력은 수단으로서 항상 사용되어왔고 또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허락될 수 있다는 자연법의 전제이다. “그것(자연법)의 관점에 따르면, [...] 폭력은 자연적 소산이다. 즉,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일반의 사람들이 폭력을 정당하지 못한 목적을 위해 오용하지 않는 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재료이다.”
물론 자연법과 달리 실정법의 경우 폭력은 수단을 통해 평가된다. 왜냐하면 폭력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인류가 역사 안에서 자의적으로 발생시켜왔던 것이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타당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폭력을 발생시키는 목적은 그것이 선하고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우선은 거부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실정법(법실증주의)은 모든 생성하는 법을 오로지 그것의 수단에 대한 비판을 통해 판단한다. [...] 자연법론은 목적의 정의를 통해 수단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며, 실정법은 수단을 정당화함으로써 목적의 정당성을 보증하려고 노력한다.”
나아가 이러한 자연법과 실정법의 구분 안에서 벤야민은 폭력을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구분한다. 우선 첫 번째 폭력은 법-정립적(rechtsetzende) 폭력이라고 명명된다. 이러한 구분은 가장 일반적인 폭력형태임과 동시에 국가와 관련하여 법적으로 규정된 폭력, 즉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법적 질서를 설립하려는 폭력형태이다. 예를 들어 쿠데타, 사회주의 혁명, 테러 등과 같은 폭력의 형태는 분명하게 기존의 법으로 보장된 국가를 전복하고 새로운 법질서를 구성하려는 의지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그래서 법-정립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벤야민이 여기에서 기존의 폭력규정과 다른 방식으로 제시하는 또 다른 폭력의 형태, 즉 법-보존적(rechterhaltende) 폭력이다. “첫 번째 것(법-정립적 폭력)은 그것이 승리를 기준으로 입증되기를 요구받는 반면, 두 번째 것(법-보존적 폭력)은 새로운 목적을 설정하지 못한다는 제한 아래 놓여있다.” 다시 말해, 법-정립적 폭력이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목적을 가진 폭력인 반면, 법-보존적 폭력이란 기존의 질서를 지키려는 목적을 위해 행사되는 폭력이다. 흔히 우리는 이것이 폭력이 아니라든가 혹은 정당방위라는 이름으로 면죄부를 주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이 행위 역시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분명한 폭력의 형태이다. “모든 폭력은 수단으로서 법-정립을 하고 있거나 법-보존을 하고(rechtsetzend oder rechtserhaltend) 있다. 폭력이 이 두 술어 중에 어느 것에 대해서도 권리를 내세우지 않는다면 그로써 그것은 스스로 모든 타당성을 포기한 셈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은 어떤 때는 뚜렷한 구분을 가지고, 때로는 뚜렷한 구분을 가지지 못한 채 행사되고 있으며, 이것이 현대에서 폭력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도 그 처벌에 있어 기준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예를 들어, 벤야민에 따르면 경찰의 폭력은 이중적인 성격 모두를 소유한다. “경찰의 강제력은 법-정립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특징적인 기능은 법률을 공표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이 법적 권리를 갖고 반포하게 하는 모든 법령을 공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경찰의 강제력이 법-보존적인 이유는 그것이 그러한 목적을 수행하는데 이용되기 때문이다.” 어떠한 변명을 하던지 간에 폭력이란 법-정립적이던 아니면 법-보존(수호)적이던 간에 남에게 위해를 가하는 폭력이다. 왜냐하면 “폭력을 적합한 폭력과 적법하지 않은 폭력으로 구분하는 작업의 의미는 손쉽게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폭력은 어쩔 수 없는 삶의 요소로 등장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폭력의 사태 안에서 우리는 어떠한 대안도 없이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벤야민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지금까지와 전적으로 다른 차원의 폭력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모든 폭력을 잠재우는 신적 폭력이다. 즉, 모든 폭력과는 다른 종류의 폭력에 대한 물음이 필연적으로 제기되어야 하며, 이것은 곧 “다른 종류의 폭력, 그 목적들에 대해 정당화된 수단이 될 수도 없고 정당화되지 않은 수단도 될 수 없으며 전반적으로 그 목적들에 대해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든 다르게 관계를 맺는 그러한 폭력”으로서의 신적 폭력이다. 그리고 ‘신적(göttlich)’이라는 형용사가 획득될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 그 어떠한 일상적 수단과 목적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차원, 즉 신적 차원으로부터 도래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되는 신적 폭력이란 다신론 시대에 창궐했던 신화적(mythologisch)인 무자비한 폭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리스신화 안의 미친 헤라클레스의 폭력적 살인 혹은 복수에 눈이 먼 테베의 분노의 복수 등은 신들 자체의 등장을 의미하는 신화적 폭력이다. 그것은 신들의 의지가 그 안에 분명히 투영되어 폭력의 목적과 수단을 정당화하며, 그럼으로써 신들의 의지를 세상에 드러낸다. 즉, 신화적 폭력은 목적이나 수단이 그저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신들의 존재의 발현’, 즉 ‘신들의 나타남’ 그 자체에 놓여있다.
분명 여기서 목적과 수단이 신적인 차원으로 고양된다는 점에서 분명 신화적 폭력도 신적 폭력으로 읽힐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벤야민은 이것이 신화적 폭력일 뿐 결코 신적 폭력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신화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폭력은 여전히 법을 새롭게 제정하는 어떤 권력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목적과 수단이 신적인 차원으로 고양되고 인간의 인식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점에서는 일반적 폭력을 넘어서는 신적 차원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어떠한 모습으로든지 여전히 인간의 삶 안에 법을 정초하는 모습으로 결정된다는 점에서 법-정립적 폭력이라는 것이다. “직접적 폭력의 신화적 발현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모든 법적 폭력과 동일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와 반대로 신적 폭력은 신화적 폭력을 넘어서는 어떤 순수한 직접적 폭력이며, 그것은 법-정립적인 것과 법수호적인 것 모두를 넘어서면서 그 폭력 자체들을 멸절시키는 폭력이다. “신화적 폭력이 법-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가 없”다. 지금까지 역사 안에서 일어났던 그 어떤 폭력과 다른 그런 폭력이 이제 신화적 폭력마저 극복함으로써 제시되며, 이것을 벤야민은 신적 폭력이라 명명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반적인 벤야민 전문가들과 다르게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서 그가 이야기하는 신적 폭력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나약함의 힘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화적 폭력이 죄를 부과하면서 동시에 속죄를 시킨다면 신적 폭력은 죄를 면해준다. [...] 신의 법정은 바로 그러한 파괴 속에서 면죄를 가져다주며, 이 신적 폭력이 갖는 피를 흘리지 않는 성격과 면죄해주는 성격 사이에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하다.” 오히려 신적 폭력은 신화적 폭력까지도 종결시킨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에게 놓여있는 모든 폭력을 멸절시키지만, 이와 동시에 그 어떠한 이해타산 및 단순한 연민도 넘어선다. 또 다른 세계를 건설하겠다고 자행되는 폭력도,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 내 자신이 희생되고 말겠다고 주장하는 폭력의 수용도 그것이 폭력이라는 점에서, 결코 긍정될 수 없다. 오히려 모든 폭력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폭력의 순환 고리 자체가 끊어져야 하며, 그것을 벤야민은 신적 폭력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 번의 폭력을 통해 모든 보복이 사라지고, 오히려 그 보복의 근거로서의 죄가 면제되고, 폭력적이지 않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세계로 바꾸는 것이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벤야민의 다음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화적 폭력은 폭력 그 자체를 위해 단순한 삶에 대해 가해지는 피의 폭력인 반면, 신적인 것(폭력)은 살아 있는 자를 위해 모든 생명에 대해 가해지는 순수한 폭력이다. 첫 번째 것은 희생을 요구하고 두 번째 것은 그 희생을 받아들인다.
신적 폭력은 더 이상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폭력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희생, 자기 비움이며,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케노시스의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될 수 있다. 폭력이 더 이상 발붙이지 못하고 쫓겨나는 그 폭력이 바로 신적 폭력이다.
예를 들어, 바알세블의 힘으로는 귀신을 쫓을 수 없다는 신약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신적 폭력, 신적 능력에 대한 분명한 비유로서 언급될 수 있다. 왜냐하면 바알세블은 엄밀한 의미에서 귀신을 완전히 쫓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러는 그는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하였으며, [...]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는데 만일 사탄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가 어떻게 유지되겠느냐!”(눅 11:15-18) 오히려 신적 권능이 없이 귀신에 의해 쫓겨 나갔던 귀신은 다시 “돌아간다. [...]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흉악한 악령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자리 잡고 살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의 형편은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된다.”(눅 11:24-26) 세속적 폭력에 대해 또 다른 세속적 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그저 폭력의 끊임없는 보복만을 불러오며, 그것은 더욱 상황을 어렵게 만들뿐이다. 귀신들은 서로 내쫓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 안에서 서로 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귀신들 간의 다툼은 싸우는 것처럼 보일뿐, 오히려 자신들의 거처를 잘 유지하는 한 방편이 된다.
이러한 성서의 비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폭력에 대한 대항폭력은 끊임없는 폭력의 악순환만을 가지고 올 뿐이며, 그래서 이 악순환을 종결할 수 있는 방법은 결단코 폭력 안에는 없다. 오히려 폭력의 악순환의 종결은 폭력을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전적인 다른 차원의 것을 요구한다. 벤야민이 말한 신적 폭력이란 바로 이것을 의미하며,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폭력을 멸절시킨다는 의미에서 폭력이지만, 더 이상 폭력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적 폭력으로서의 자기희생, 자기 비움일 수밖에 없다. 폭력에 대항하여 그 어떠한 폭력도 행하지 않는 것은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버리는 진정한 힘이며 폭력을 멸절시키는 진정한 신적 힘이다. 그리고 이 자기희생과 자기 비움의 힘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사건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폭력의 시스템은 마지막 희생양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파괴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은 신화 속에서 맹위를 떨치는 [폭력의] 전염을 폭로함으로써 신화를 무력하게 만들어버렸다. [...] 예수 수난 이야기에서 예수는 자신의 무고함을 만천하에 보여주면서 (비난해야 한다는) 이 의무를 ‘무효화시키고’ ‘없애버렸다’.” 폭력의 악순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이제 예수 자신이다. 다시 말해, 폭력과 보복으로 난무한 이 세대의 순환을 신적 폭력으로 종결시킨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의 자기 비움의 폭력은 모든 폭력들을 멸절시키는 힘 자체이다. 그것이 모든 폭력과 갈등을 멸절시킨다는 점에서 이 보다 더한 폭력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 근원에서, 즉 그것이 나온 바탕으로부터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영향 모두에서 이제 폭력을 넘어선 사랑과 자기 비움으로 나타난다. 비폭력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자기 비움의 폭력이다. 이 둘은 서로 간의 대립이나 부정 등으로 규정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차원에 놓여있다. 자기 비움은 가장 강력한 폭력이면서 동시에 폭력의 영역을 넘어서는 그러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또한 폭력이라는 단어마저 넘어선다.
4. 포기로서의 권력: 존 하워드 요더
스스로를 포기하는, 즉 자기를 비우는 예수의 신적 폭력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해 우리는 요더의 주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요더가 통찰하고 있는 예수의 정치적 권력, 즉 포기로서의 권력에 대한 논의는 앞서 언급한 벤야민의 신적 폭력의 성격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요더가 자신의 주저 예수의 정치학에서 말하는 내용은 의외로 간단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았던 삶을 따르자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예수는 윤리를 말하며, 또한 정치를 실천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윤리나 정치란 결코 유한하여 왜곡될 수 있는, 일상적-세속적 차원에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적 윤리-정치 이해와 다르게 예수는 권력행사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세속적 권력 안에서는 언제나 폭력이 발생하며, 이것은 예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수의 뜻을 기록한 성경의 요구는 “고통당하면서도 그런 종류의 보복을 포기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 모든 종류의 폭력에 대한 거부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적 태도는 신약적 선포의 처음과 끝을 가로지르는 일관된 주제다.” 왜냐하면 폭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멈추는 것이 예수의 정치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요더는 이러한 예수의 자기 포기의 정신을 계시록으로부터 끌어온다. 우선 계시록의 관점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의 방향,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기독교의 사회윤리에 대한 관심이 각자가 선호하는 ‘손잡이(전제)’에서 비롯된 것이지 결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지 않았음을 통렬히 비판한다. 요더는 여기서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위의 전제들을 극복하고 진정한 정치적 태도로서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요한계시록으로부터 비움 혹은 연약함으로 도출된다.
요더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의 환상에서 가장 먼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메시지는 ‘죽임당한 어린 양이 권세를 받기에 합당하시다!’라는 것이다. “요한은 여기에서 말하고 있다. 역사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칼이 아니라 십자가이며, 무자비한 힘이 아니라 고난이다. [...] 의로운 자의 승리는 의로운 자들을 도우려 시도하는 무력 안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다. [...] 교회가 수용했던 이 연약함의 입장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수행하신 사역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풀어낸 것에 불과하다. 예수가 폭력적 주인됨대신 고통당하는 하인됨의 길을 선택하고, 권력으로 유지되는 정의대신에 죽음에 이르는 사랑을 선택했던 사실 자체가 바로 그의 삶의 근본적 방향성을 드러낸 것이었다. [...] 역사를 지배하는 모든 손잡이(handle, [인간들의 전제 및 수단들])를 포기하셨다.” 그리고 역사를 움직이는 자이며, 구원자인 예수가 그렇게 바라보고 행동했다면, 그것은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예수는 왕관을 거부하고 십자가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효율성을 포기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신적 사랑에 헌신한다. 그리고 신적 사랑이란 곧 하나님 자신이 케노시스를 수행하셔서 예수가 되셨다는 빌립보서 2장의 말씀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십자가를 진다. 예수가 포기하고 십자가를 졌다는 사실은 단순한 형이상학적인 신의 지위를 포기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 분명하게 제자들에게 경험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간 사회에서 우러름을 받는 주권적 권력을 포기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비우신 것은 세상에 대한 주권의 포기였으며, 모든 효율성을 포기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승리라는 빌립보서의 고백은 그 포기가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절대적 기준이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단순한 개인적 포기에 의한 실패도 아니었고, 형이상학적 신의 근엄한 번뜩임도 아니었다. 예수는 별다른 화려한 표증 없이 묵묵히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했고, 이것은 사탄과 열심당의 시험과 정반대, 즉 권력의 포기였다. 요더에 따르면, 공관복음서 안에서 예수의 십자가형이 정치적 역학구도 안에서 선고된 이유도 이처럼 예수의 존재 자체가 보여줬던 새로운 정치 형태, 곧 ‘반폭력적 정치’의 형태에 대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반폭력적 정치란 결코 단순한 평화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의 핵심은, 정당한 방법을 통한 목적 달성이 불가능할 때 우리의 정당한 목적을 기꺼이 포기하고자 하는 태도 자체가 어린 양의 승리에 찬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가 기독교의 메시아이자 인간의 삶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계시이기 때문에 타당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요더가 직접적으로 통찰했던 예수의 진정한 권력이란 자기를 포기하고 고난에 동참하는 자기희생이자 자기 비움의 힘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정한 권력이란 세속적 정치권력에 대한 순종이나 획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된 세속 정치권력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면서도, 세속권력을 획득할 수 있을 때는 스스로 포기할 수 있는 힘, 즉 예수의 자기희생, 자기 비움의 힘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5. 예수의 자기 비움의 힘: 현실의 고난에 참여하되, 기득권으로부터는 떠나라!
앞서 벤야민과 요더의 논의 안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가 분명하게 수용해야 할 정치적 태도는 언제나 ‘신적 폭력’이자 ‘포기로서의 권력’,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의 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자기 비움의 힘이란 바로 모든 폭력을 종식시키는 폭력 및 그 폭력에 대항하는 저항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 힘, 그리고 모든 정치적 권력행사를 포기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요더의 통찰을 통해 이야기해본다면, 이것은 고통을 당하면서라도 같은 방식의 보복을 삼가는 것이면서 동시에 “어떤 종류의 폭력이든 거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폭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순환을 멈추는 것이 예수의 케노시스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폭력순환을 멈춤을 통해 “사람들 간의 적개심이 해소되고 이웃 사랑이 원수에게까지 확장되며, [...] 나의 적과 내가 하나가 되어 더 이상 내손으로 상대의 목숨을 취할 수 없는 하나의 새 인류 안에 있게 되는 것이 바로 복음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복음이 실현될 수 있는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승리로부터 찾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자기를 낮추신 그리스도가 지극히 높은 이름이 되었다’는 빌립보서의 말씀, 그리고 ‘죽임당한 어린 양이 권세를 받기에 합당하다’는 요한계시록의 말씀 등에 철저히 일치하는 사항이다. 칼이 아니라 십자가이며, 무자비한 힘이 아니라 고난이다. 예수를 따르는 삶이란 세상의 부정의를 비판함으로 나타날 수 있는 고난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세속에서 획득할 수도 있는 모든 권력은 포기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의 힘은 그 희생을 받아들이며, 바로 이 희생이 우리의 세계를 하나님 나라로 움직여 간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예수의 ‘고난의 수용’과 ‘권력의 포기’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기준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두 가지 사항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고난의 수용’과 ‘권력의 포기’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이다.
첫째,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고난의 수용이란 곧 고난을 감내하면서도 끝까지 기득권과 권력에 비판을 가해야함을 의미한다. 정치적 고난은 언제나 기존의 질서에 반대할 때 발생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민중신학자들이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기존의 세속 기득권 세력의 부정의에 (비폭력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비록 민중신학이 신학적 정당성의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공감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적극적 저항에 놓여 있다. 또한, 이 부정의한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저항은 지금 우리에게도 요구되고 있는 바이다. 보수 기독교 세력들이 예수를 따르기 보다는 기득권에 동조하면서 정치적 권력만을 탐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진정한 기독교인들이 아닐 수 있다는 서글픈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고난의 수용만이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적 고난의 수용은 언제나 정치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로 되돌아오곤 했기 때문이다.
둘째, 따라서 참다운 기독교인은 정치적 비판행위를 통해 주어질 수도 있는 그 어떤 정치적 권력도 포기해야만 한다.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고 십자가를 졌으며, 이것은 그가 “인간의 모든 갈등 안에 있는 폭력사용의 정당화와 그 외 다른 종류의 힘의 사용”을 거절했음을 의미한다. 즉, 그가 비우신 것은 세상에 대한 무조권적 권력의 포기였다. 그리고 바로 이 포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이면서 결국 하나님의 승리로 고백된다. 예수는 당시의 기득권층이 당연하게 여겼던 권력의 획득과 유지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며, 오히려 군림하고 억압하려는 일상적 욕망을 비판하고 그것에 대해 전적으로 저항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힘의 획득은, 즉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의 이런 부름이 가리키는 바는, 권력의 내려놓음이다. 그리고 기득권층이 되려는, 그래서 권력을 획득하여 세속적 정치권력을 발휘하겠다는 욕심의 포기이다. 세속의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 그리고 가지게 될 자들은 이미 자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폭력을 정당화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본질상 결코 예수를 따를 수 없다. 왜냐하면 “권세자는 마음의 욕심을 말하”(미가 7:3)기 쉬운 자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권력을 통해 세속정치를 직접 바꾸겠다는 욕심보다는, 권력의 잘못을 비판하되 그 권력을 스스로 소유하여서 행사하겠다는 욕심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혹시 권력을 버리고 나서 그것을 누가 행사할 것인지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은 아니다. 정치권력의 행사는 기독교란 이름으로 행해질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기독교의 비판을 견지할 자격이 있는 민생의 투표로 선출된 대표들이 짊어질 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인정하고 과감하게 모든 세속적 권력을 비워낼 수 있는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 칭해질 수 있을 뿐이다.
5.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 기독교의 정치참여의 몇 가지 패러다임과 그 한계를 살펴보고, 그것들의 대안을 벤야민의 신적 폭력과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의 힘으로 제시해보았다.
우선 우리가 살펴본 것은 세속권력의 도덕성과 상관없이 무조건 정당성을 부여하고, 보다 적극적으로는 그 세속권력을 직접 획득했던 극우파 기독교의 모습이었다. 6.25 전쟁 당시 북한의 살육을 경험한 이후 미국에 충성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어떤 권력적 욕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한계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파 기독교가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서 생각했다면, 그들이 보여줬던 욕심과 부정의에 대한 침묵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사실이 되고 만다.
물론 한국 기독교는 단지 정치적으로 우파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민중신학은 소위 말하는 좌파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세속권력 및 기득권 세력의 부정의에 저항했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신학적인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항상 좋은 모습만을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특별히 민중신학이 상황신학으로서의 한계 때문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쇠퇴의 길은 민중신학의 주역들을 정치세력으로 탈바꿈시켰으며, 결국 그들을 권력획득의 욕망이 가득한 정계로 진출시켰다. 최소한 민중과 함께 고난을 당하겠다고 자임했던 세력들이 다시금 민중 위에 군림하는 기득권 정치세력이 되어 호의호식하는 모습은 결단코 신학과 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목적일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따라야 하는 것은 신적 폭력이자 신적 권력으로서의 자기 비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비움(포기, 순종 등)일 뿐이다. 이것은 모든 형이상학적-이데올로기적인 정치와 윤리를 넘어선다. 왜냐하면 세상의 정치와 윤리는 절대화될 경우 항상 폭력의 순환 및 억압-피억압의 관계를 발생시키는 반면, 세상의 정치와 윤리의 절대화를 거절하고 비우기를 요구하는 예수는 상황적 한계를 넘어, 모든 폭력의 순환을 멈추고 모든 자들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만이 반-절대화를 위한 절대화로 기능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예수의 비움은 세상의 부정의에 대해 결코 침묵하지 않고 저항하며, 혹시라도 거기로부터 파생되는 그 어떤 고난도 직접 수용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또한 예수의 비움은 정치적 저항활동을 통해 획득될 수도 있는 그 어떤 정치적 권력도 포기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이러한 비움의 요구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예수쟁이들의 의무이다.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라! 여기에는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오직 야훼 하나님만이 섬겨져야만 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은 바로 정의롭지 못한 세속권력에 침묵하기를 원치 않으시는 분이시며, 또한 그 세속권력의 획득도 미워하시는 분이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