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무엇인가』 겉 표지. |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가? 가치 있는 삶을 구성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우리는 살면서 삶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을 마주하게 된다. 대학교 동기들에게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해 물어본다면 누구는 자신이 읽은 철학책의 한 구절을 읊을 것이고, 누구는 성경을 펼 것이며, 누구는 이 질문을 듣고 한참을 웃을지도 모른다. 울프 교수의 책은 이 어려운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1부 강의
1강에서 울프 교수는 가치있는 삶을 구성하는 두 개의 큰 요소로 주관성과 객관성을 들었다. 더불어 삶의 의미는 주관적 요소와 객관적 요소의 조화를 통해 어떤 목표를 성취했을 때 얻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요소들을 바탕으로 두 개의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가치 있는 삶을 이루는 구성요소로서 주관적 요소를 강조한 것이 성취관점이다. 성취관점은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지향]을 바탕으로 생성된 열정을 통해 성취를 얻었을 때,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객관성이 결여된 성취관점은 자칫 쾌락주의 등 부정적 모습으로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한다. 성취하는 것의 질, 그리고 긍정적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객관적 요소의 도입이 필요하다.
가치 있는 삶을 이루는 구성요소로서 객관적 요소를 강조한 것은 연립관점이다. 큰 존재에 대해 어떤 기여를 하는 것이 곧 가치 있는 삶을 만들어 가게 한다는 태도이다.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더 큰 존재(크기가 아닌 가치)에 얼마나 큰 기여와 관여를 할 수 있는가가 곧 우리 삶의 의미와 직접적으로 연관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연립관점은 성취관점의 단점을 보완하여 나타나는 개념으로 볼 수 있으며, 울프 교수는 이 연립관점이 보다 나은 삶의 의미를 양산해 낼 수 있다고 기대한다.
2강으로 넘어오면서 수전 울프는 객관적 가치에 대해 보다 심도 있는 논의를 하고자 한다. 객관적 가치가 무엇인가? 어떤 성질을 가져야 하는가? 자기이익과 도덕성과는 어떻게 다른가? 등을 설명하는데 한 강의를 투자했다. 그녀는 객관적 가치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객관성과 가치라는 두 개의 개념이 서로 분리되어 존재할 때와 객관적 가치로 합쳐져 있을 때, 그 의미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는 정의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면서도 정작 스스로 정의를 내리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
다만 울프 교수는 가치에 대해 우리가 정의내릴 때 경계해야 할 두 가지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는 엘리트주의이고, 하나는 객관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엘리트주의는 가치의 기준을 정할 때 절대화되어 다양한 삶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을 파괴하는 태도이다. 즉, 가치 위에 군림하며 가치의 기준을 설정하는 세력들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경계점인 객관적 가치의 존립에 대한 의심은 그녀가 세운 핵심사상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일이기 때문에 경계하고 있는 듯하다.
“주관적 이끌림이 객관적 매력을 만나서 가치 있는 일에 대한 적극적인 관여를 이끌어 내는 것이 삶의 의미이다.” 울프 교수가 1부에서 내린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책의 1부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우리는 주관적 요소와 객관적 요소의 조화를 만들어내야 하며 이러한 조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수정된 성취관점, 즉, 연립관점이 우리가 표방해야 할 삶의 태도라고 그녀는 이야기하고 있다.
2부 논평
첫 논평은 수전 울프의 큰 주제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그 한계점과 부족한 부분을 짚어주고 있다. 수전 울프가 말하는 삶의 의미의 조건 중 하나는 열정을 통해 가치를 찾고 성취해야 한다는 것인데, 논평가인 괴테는 열정이 성취를 방해할 수 있다는 점을 예술가의 사례를 통해 이야기했다. 개인이 열정을 가지고 어떤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성취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종래에는 성공하지 못한 삶(큰 존재에 대해 기여하지 못하고, 가치를 추구하지 못한 삶)도 나름의 의미(개인이 느낄 성취와 만족)가 있기에 그녀가 제시한 연립관점의 한계점을 제시했다.
두 번째 논평도 첫 논평처럼 그녀의 핵심 아이디어에 동의하고 있다. 삶을 회고한다고 할 때 의미 있다고 느껴야만 의미 있는 삶이라고 말하는 울프 교수의 말은 삶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그녀의 또 다른 말과 모순되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제시한 추상적 개념인 ‘좋은 느낌’이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수반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도 정면으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부정적 느낌이나 감정도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혹은, 그런 감정이 없더라도 충분히 삶의 의미를 담지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세 번째 논평은 그녀의 사상에서 가장 핵심이 되지만, 정작 그녀는 제대로 설명하기를 꺼려한 객관적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과연 객관적 가치가 꼭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수전 울프의 우려 중 하나였는데, 노미 아르팔리는 금붕어 키우기를 통해 이 부분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다. 울프 교수는 금붕어를 키우며 만족을 얻는 일에는 객관적인 가치가 지극히 작으며, 이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기 힘듦을 이야기하며 금붕어 키우기로 만족을 얻는 삶은 의미 있는 삶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르팔리는 울프 교수의 말은 어른들에게는 적용이 가능하지만 어린아이에게 금붕어를 키우는 일은 큰 만족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이를 반박했다.
네 번째 논평은 그녀의 사상에 동의하고 있지 않다. 다만 수전 울프 사상에서 부족한 부분이나, 자신의 연구와 비슷한 부분을 논평으로 전하고 있다. 조너선 하이트는 자신의 아이디어인 중대한 관여와 벌집심리학을 소개하고 있다. 중대한 관여는 큰 존재에 대한 기여라는 울프 교수의 개념과 비슷한 것으로 보고 있다. 관여를 통해 객관적 가치를 얻을 수 있고, 이것이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며 울프 교수의 개념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벌집심리학은 울프 교수가 계속해서 맞이하고 있는 문제, 즉, 가치규범들 간의 충돌이 발생했을 때, 개인이 알아서 문제를 타개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분적인 변명을 제공해 주고 있다. 만일 우리를 개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존재의 일부분으로 본다면, 우리가 도덕성과 삶의 의미의 충돌이 발생하여 도덕성을 택하더라도 그것이 곧 삶의 의미의 범주 안에 들어올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사회적인 존재는 소속감과 사회라는 큰 존재에 대한 기여를 바탕으로 희열(주관적 만족)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도덕성을 지키면서 또한 만족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주관적 만족과 객관적 가치의 조화로 이어지기 때문에 의미 있는 삶을 향유할 수 있게 한다고 논평은 전한다.
3부 대답
울프 교수는 2부에서 전하는 논평의 내용을 요약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반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녀는 위의 논평에서 지적한 자신의 한계점을 총괄적인 관점에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1,2번 논평에 대해서는 ‘매우 생산적인 논평이지만,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논쟁의 우려가 많으므로 따로 더 깊은 서술을 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일축하고, 3,4번 논평은 그 논의점이 성취관점에 대한 비판이지 수정된 성취관점에 대한 비판이 아니므로 굳이 반론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대답을 하고 있어 논평에 대한 대답을 그녀가 다소 회피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글/ 김성재(객원기자/연세대 신과대 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