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흉흉하면 사람들은 쉽게 주술에 기운다. 신약성서의 <사복음서>, 특히 '마르코 복음서'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이 기록돼 전해진다. 또 예수의 치유에 힘입어 사람 몸을 떠난 악령이 돼지에게 옮겨갔다는 이야기도 눈에 띤다.
예수의 공생에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식민지였다. 로마는 모든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게도 관대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내부 사정은 더욱 참담하다. 종교권력자인 사두가이는 로마 권력과 결탁했다. 바리사이 공동체는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이스라엘 민족 정체성을 지켰으나 공동체 밖 가난한 사람들은 홀대했다. 그러다보니 힘 없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주술에 기울어졌고, 예수께 와서 구마의식을 의뢰한 것이다.
김윤석, 강동원 주연의 <검은 사제들>은 이 같은 '귀신 쫓기'가 모티브다. 그러나 스토리의 전반적인 뼈대는 신학적이기 보다 사회적이다. 무엇보다 영화를 보면서 지금 한국 사회 분위기가 상당히 흉흉하다는 걸 느낀다.
사실 헐리웃에서는 사제들의 구마 의식이나 악마주의를 단골 소재로 활용했다. 윌리엄 프리드킨의 <엑소시스트>나 키에누 리브스의 <콘스탄틴>이 대표적이다. 오로지 영화적 시선으로 <검은 사제들>의 의미를 따진다면 한국 영화에서도 구마의식이 흥행 코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데 있지 않을까? 구마의식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40분은 보는 이들의 숨마저 멎게 한다. 특히 김윤석·강동원 두 주연배우의 연기도 연기지만 악령 씌운 여고생 '영신' 역의 박소담은 두 배우를 능가할 만큼 강렬하다.
영화의 사회적 의미를 따져보자. 앞서 세상이 흉흉하면 사람들은 주술에 기울어진다고 적었다. <검은 사제들>은 갈수록 황폐해져가는 한국 사회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사회 불안 틈타 주술 창궐
김 신부(김윤석)는 영신의 몸에 똬리를 튼 악령을 꺼내주려 한다. 그러나 가톨릭의 관료 체제는 김 신부를 홀대한다. 마침 김 신부를 도울 부제 자리가 비자, 신학교 측은 최 부제(강동원)를 선택한다. 학장신부가 최 부제를 택한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최 부제에게 김 신부를 감시하라는 임무를 준 것이다. 학장신부는 최 부제를 보내면서 "가톨릭은 이성으로 대중에게 다가가는 종교"라며 임무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최 부제는 구마의식을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 아픔을 본다. 이를 통해 김 신부를 이해하고, 이내 힘을 합쳐 영신에게 파고들어간 악령을 쫓아낸다.
가장 주목할 대목은 구마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다. 두 신부는 영신의 집을 찾는다. 영신의 부모는 세탁소를 운영한다. 거처도 세탁소 한 켠에 있다. 영신은 자기 방에서 식물인간 상태로 누웠다. 이곳은 명동 뒷골목 다락방이다. 골목에서 한 걸음만 나오면 곧장 명동 거리다.
명동 거리가 어떤 거리인가? 한국에서 땅값이 제일 비싸고, 상권이 집중돼 있는 한국 자본주의의 상징 아닌가? 그러나 뒷골목 쪽으로 한 걸음만 옮기면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건물들이 즐비하다. 영신의 다락방이 물신주의가 판을 치는 한국 사회의 두 얼굴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연출자의 의도와 별개로, 한국 사회엔 구마의식이 시급하다. <검은 사제들>은 12월12일(토) 현재 534만 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573만을 동원한 <내부자들>에 이어 흥행성적 2위다. 한국 영화에서 생소한 '구마의식'을 그린 영화가 성공을 거뒀다는 건 그만큼 사회가 불안하고 이로 인해 사람들이 주술에 기운다는 의미다.
지금 우리 사회는 병증이 심각하다. 무엇보다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혐오가 횡행한다. 다름을 인정하기 보다 '종북', '좌파', '이단' 등의 못된 말로 낙인을 찍는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병증을 느끼는 구성원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 무통각증이라 했던가? 몸은 썩어 들어가고, 곳곳에 피고름이 흐르는데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다. 사회의 아픔을 어루만져야 할 종교마저 제 구실을 못한다.
왜 일까? 죄다 귀신들려서다. '개발독재', '신자유주의', '공안', '돈', '권력', '섹스'라는 이름의 귀신에 씌워 헛것을 본다. 이제 이 귀신들을 쫓아내야 할 때다.
'냉철한 이성', 그리고 '따스한 사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