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실존주의 신학자, 독일계 미국인 폴 틸리히 교수는 초기 저서 <존재에의 용기>에서 인간의 실존적 불안 세 가지를 말했다. 그 첫째는 인간 존재의 무의미(無意味)함, 그 둘째는 죄책감, 그리고 셋째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有限性) 곧 죽음에 대한 불안이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실존적으로 불안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 실존은 생로병사(生老病死) 모두가 고(苦), 괴로운 것이라는 깨달음과 통하는 말이다. 한마디로 인생은 "허무하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유태교와 기독교의 성경의 <전도서> 첫머리에는 한숨 섞인 신음소리로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할까 싶다.
"헛되고 헛되도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을 보니 그 모두가 헛되어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전도서 1:1절과 14절)"
돈을 쌓아 놓고 떵떵거리며 살면서도 미국의 금리와 주식을 지켜보면서 불안해하는 재벌들과 부자들이 있는가하면, 언제 자리에서 떨어질까 보아 전전긍긍하는 권력자들과 하수인들이 있고, 대학 입시에, 각종 고시에, 그리고 취직면접에 "낙방"의 고배를 두려워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어렵사리 대출을 받아서 난생 처음 아파트를 구하려는 신혼부부들은 대출이자를 갚을 길이 불안하다. 평생직장에서 조기 "명퇴"를 한 할아버지는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아 갈 것이며 죽는 길은 평탄할 것인가 불안하다. 그러면서도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마음이 편치가 않다. "엄마에게 잘 해 드릴 걸...," "언니에게 좀 더 따뜻하게 대해 줄걸..." "나는 왜 효도하는 아들 노릇을 제대로 못했을까..." 스스로 목숨을 끊고 돌아가신 부모의 시신 앞에서 아들은 통곡한다. 불효자식의 죄책감은 불안과 분노로 치를 떤다. 결국 "나는 왜 태어났는가?" "엄마, 왜 나를 낳았어?" "나는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 철없는 십대 사춘기 소녀의 절규만이 아니다. 옛날 성인들도 신 앞에서 소리 지르며 질문했다. "왜 나를 태어나게 하셨나이까?"
아무리 소리 내어 울부짖어도 나는,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에 던짐을 당한 존재들이다.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한 말이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전 나하고 의논이나 하고 나를 나아 주었는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마디 의논도 허락도 없이 나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한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의 관계의 그물 안에 던짐을 받은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할아버지와 할머니, 언니와 동생, 형과 아우라는 가족이라는 관계의 그물 안에 던짐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어린이 집에, 유치원에 학교에 다니면서 가족 밖의 친구들을 만나고, 거기서 왕따도 당하고 대장 노릇도 하고, 공주노릇도 하게 되고, 선생님의 칭찬도 받고 야단도 맞으면서 더 넓은 세상의 관계 속에 들어간다. 그야말로 자의반(自意半) 타의반(他意半). 이 관계의 그물을 사회라고 한다. 그 사회는 정치적이어서 우리의 인간관계는 정치적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불안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위에서 말한 실존적 불안에 더하여 우리 인간들은 사회적 불안, 정치적 불안을 안고 산다. 여기에 경제적인 불안이 더해진다. 오늘날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한다. 대한민국뿐이랴. 남과 북을 합쳐서 한반도 조선반도 모두를 지옥과 같은 불안과 고통의 땅으로 말하는 것 아닌가 싶다. 우선 남과 북의 젊은이들은 분단과 갈등과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휴전선 넘어 전쟁이라는 재앙이 도사리고 있다. 핵무기를 발전시킨다면서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핵이 터져서 온 땅이 불바다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있다. 한반도의 원천적인 불안이다.
게다가 미국이 일본을 무장시켜 한반도와 중국의 정세에 따라 언제든지 우리 땅에 쳐들어 오게 된다는 동아시아의 위기가 불안하다. 우리는 100년 전에 청나라와 일본이 우리 북쪽 땅에서 치열한 전쟁을 치렀지 않았는가? 그것도 모자라 일본은 러시아의 침략을 막는다고 다시 우리 땅에서 싸우고 우리 땅을 독차지 하지 않았던가?
6.25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고 휴전상태지만, 미국과 중국은 북한과 함께 휴정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어서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어 나갈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휴전상태를 빌미로 그리고 북한의 핵 발전을 위기로 삼아 군비를 강화하고 최신 첨단 무기를 팔고 사는데 혈안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60 몇 년 동안의 휴전상태의 군대의 기강은 해이해 질대로 해이해지고 졸병들은 서로 싸우고 때리고 맞고 죽이고 도망가고 자살하고, 장성들은 방위산업과 함께 비리와 부패로 썩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군대 입대 경쟁률이 7 점 몇 대 1이라고 하지 않는가?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한 대한민국의 정치는 어떠한가?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군사 독재시대를 "그리워하게" 될 지경에 도달한 것 같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10만에 가까운 민중이 뛰쳐나와 소리 질러도 끄떡도 하지 않는 정치에 대해서 환멸을 느낀 지 오래다. "민주주의"라는 말 앞에 붙인 "자유"는 제복을 입은 사람들, 경찰과 검찰, 재벌과 국회의원 정도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권력이 된지 오래다. 신문기자들도, 대학 교수들도, 중.고등학교 역사 선생들도 말 조심하고 글 조심하면서 "자기 검열"을 해가면서도 언제 끌려갈지 모른다는 각오로 불안에 떨고 있는 형편이다. "정 그렇게 불안하면, 가만히 있어라." 진도 앞바다에 침몰한 세월호 선장의 무서운 호령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헬 조선"에도 크리스마스 트리는 반짝거리고 있다. 크리스마스 특수를 노리지만 백화점은 중국 관광객들로만 붐비고 있다. "헬 조선"에도 크리스마스 노래는 그런대로 울러 퍼지고 있다. 2천 년 전,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인 예수도, "헬 조선" 못지않은 "헬 이스라엘"에 태어났다. 민중은 로마 제국의 폭정에 시달렸고, 부패하고 무능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착취에 시달렸다. 유대 민중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안했고 절망에 빠져 있었다. 구세주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 밖에 희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세상이 불안과 절망인데도 불구하고, 예수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은 베들레헴 뜰에서 양을 치는 민중들에게 평화를 노래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오늘 우리 "헬 조선"에도 천사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는가? 평화의 노래 소리,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 소리가 우리 가슴에, 우리 마음에, 그리고 우리 땅에 들려오는가? 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