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회신학대학교(총장서리 장영일 박사) 세계교회협력센터에서 10일 오후 제1회 한일신학자학술회의가 열렸다. 이날 학술회의에선 후카이 토모아키 교수가 오랜기간 연구한 논문을 발표하는 순서가 있었다.
후카이 교수는 ‘구미신학과 아시아신학’을 주제로 구미에서 건너 온 신학을 아시아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놓고 고민했던 자신의 연구 성과들을 여러 신학자들 앞에서 발표했다.
후카이 교수는 먼저 “신학이 예배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신학연구는 단순히 자연과학처럼 구미에서의 연구성과와 예배 방식을 그대로 서울이나 도쿄에서 시작할 수 없다”면서 “이는 교회 예배의 현실이 신학을 규정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신학의 토착화는 거부할 수 없는 자연스런 흐름이란 얘기다.
그는 조금 더 과격한 주장도 해봤다. 후카이 교수는 “구미에 존재했던 교회와 문화는 더이상 아시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구미의 신학이 아시아에 영향을 준 것이 있다면 가지에 불과하지 뿌리가 될 순 없고, 때문에 아시아의 신학 정립에는 기여하지 못한다”고 못박았다.
더 나아가 후카이 교수는 “신학의 보편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신학의 특수성을 확립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신학의 근거를 제공한 구미신학을 끌어 안으면서도 신학의 토착화를 이뤄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어 후카이 교수는 아시아 신학자들이 바라보는 구미신학을 해석학의 방법을 들어 설명했다. 그는 ▲ 사회 해석학 ▲ 민족주의 해석학 ▲ 역사 해석학 등을 들었다.
그는 특히 일본의 신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만한 민족주의 해석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구미신학이 처음 일본 땅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기독교는 민족주의와 연결돼 있었다. 또 이는 일본군부의 식민지 정책을 지지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후 일본인들, 특히 신학자들은 달리 생각했다. 이런 민족주의와 결탁한 신학을 거부한 이들은 기독교를 민족주의에서 떼어내기를 시도했고, 세계 보편적 기독교로 신학의 구심점을 이동시켰다.
후카이 교수는 마지막으로 “구미신학의 수용은 단순히 그것을 수입하거나 지점을 개설하는 것과는 달리, 구미신학을 상대화하고 그것의 좋은 전통을 선택해 주체적인 것으로 확립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논문 발표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