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호 목사
성경본문
빌 2:1-11
설교문
옛날 동양의 선조들은 도를 닦았습니다. 저들은 사람답게 사는 길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들은 그 길을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라면 사람의 도리를 알고 그 도리를 다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었습니다.
옛날에 비해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경제적으로, 과학적으로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옛날 같으면 꿈도 꿀 수 없는 삶입니다. 그냥 생활만으로만 이야기한다면 요즘 우리들 대부분은 옛날 임금보다 더 풍요롭고 편리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우리들의 삶이 더 행복해지고 아름다워진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반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그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우리들이 '도리'를 잊고 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옛날 서양의 선조들은 철학을 하였습니다. 철학의 궁극적인 관심은 '진리'였습니다. 요즘 우리들의 궁극적인 관심은 진리가 아닙니다. 이익입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사고방식과 철학이 세상에 팽배합니다. 진리를 이야기하면 바보가 됩니다. 모자라는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진리가 밥먹여 주냐?'는 말 한마디에 진리는 설 곳이 없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공자 논어에 군자유어의 소인유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매사를 생각할 때 의를 생각하지만 소인은 매사를 생각할 때 이익을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밥먹여 주냐?'며 약삭 빠르게 움직이는 소인배들이 판치는 세상은 사람이 살만한 세상이 되지 못합니다.
아이들에게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고, 진리를 가르치고,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가르치는 세상이 다시 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처럼 풍요롭지 못해도, 편리하지 못해도, 사람답게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오손도손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도는 무엇이고 진리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양의 선조들이 찾던 도가 바로 자기 자신이며, 서양의 선조들이 찾던 진리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말씀은 곧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데 요한은 그 말씀이 곧 예수님이시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도요, 진리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동양과 서양의 선조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통하여 세상의 이치와 삶의 도리를 찾고 배울 수 없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통하여 그 세상의 이치와 삶의 도리를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 하신 분이시고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스스로를 우리들에게 드러내 보여 주시기 전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 분의 말씀 곧 도와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런에 우리 하나님은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 드러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에는 두 종류의 계시가 있습니다. 하나는 특별계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반계시입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 곧 계시입니다. 아주 특별한 계시입니다. 아무리 말씀하셔도 사람들이 잘 알아 듣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답답하셔서 아에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고백하고 영접한다면 우리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은 아니지만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이 곧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영접한 사람은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형태를 보이게 됩니다. 전에는 자신의 생각과 뜻과 철학에 따라 살았지만 예수를 믿고 영접한 이후에는 자신의 뜻과 생각과 철학을 버리고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과 뜻과 철학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것을 통하여 세상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새롭게 배우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우리의 조상들은 도와 진리를 전혀 알 수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 중에도 세상에는 세상의 이치가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답게 사는 사람의 도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찾고, 찾을 뿐 아니라 그렇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동양에는 공자, 맹자, 노자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퇴계, 다산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서양에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서도 그와 같은 세상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알 수 있었을까요? 찾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일반계시 때문이었습니다. 일반계시는 다른 말로 자연계시라고도 합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보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도를 찾는 구도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도, 보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 둘 씩 찾아내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그렇게 찾은 세상의 이치와 삶의 도리를 지키려고 하였고, 자신만 지킬 뿐 아니라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가르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배우려고 하였습니다.
저는 공자의 논어와 노자의 도덕경을 참 좋아합니다. 특히 도덕경을 좋아합니다. 신학생 때에는 도덕경에 제법 깊이 빠지기도 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느끼시는 것이지만 논어와 맹자 그리고 도덕경와 대학과 같은 책들을 보면 마치 성경을 읽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책들을 읽으면서 그 진리와 도에 놀라기도 하지만 도와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마치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지팡이로 더듬어 길을 찾듯 그 진리와 도를 찾아내었던 사실에 더 놀라고 감동을 받습니다.
저는 요즘 오른 쪽 눈에 백내장이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조금 더 진전이 되면 수술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직 백내장이 완전히 진행이 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주 안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뿌옇게 보입니다. 아주 안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기는 보입니다. 그러나 오른 쪽 눈만으로 책을 읽거나 글을 보려고 한다면 많이 애를 써야만 할 것입니다.
공자와 노자는 그 희미한 눈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보면서 세상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찾아 읽으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결국은 찾아내고, 그렇게 찾아낸 도와 진리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살아내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계시와 자연계시는 특별계시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특별계시는 완전하고 완벽하지만, 일반계시는 불완전하고 부분적입니다.
우리는 특별계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도와 진리이신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신 성경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아주 분명히 똑똑하게 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끄러운 것은 우리의 삶이 공자와 맹자와 노자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배우려고 하였던 우리의 옛 조상들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도 사람답게 살려고 애쓰는 세상 사람들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처음 이 땅에 들어왔을 때 우리 믿음의 선배들과 조상들은 말씀 속에서 세상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배우고 그대로 살려고 애썼습니다. 저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사람다움이 훌륭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고 그것이 개신교의 부흥과 성장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관심이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바뀌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부자되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형통하고, 건강해 지는데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 개신교는 전보다 더 부흥하고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가 아니었습니다.
그와 같은 미신적인 욕심에 사로잡혀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삶이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세상의 이치도 모르고 사람의 도리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양심적인 세상 사람들보다 못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많이 성장하였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고, 손가락질을 받고 드디어 교회는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많이 안타까우시고 속상하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속상하고 안타까우신 마음을 오늘 본문 1절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저는 이 말씀을 그냥 이렇게 읽습니다.
"평생 예수를 믿으면서 그래도 가끔씩 은혜도 받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느끼기도하고, 성령의 교통하심을 느끼기도 했다면" 그 말씀을 곰곰히 곱씹어 읽어보면 그 말씀 속에 하나님의 안타까우심과 속상하심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그렇게 나하고는 생각이 다르냐?'
'사는게 그렇게 나하고 하나도 닮은게 없냐?'
'어떻게 예수를 알고 믿는다고 하는 것들이 나를 알지 못하면서도 도와 진리를 찾아 애쓰고 그 부분적으로 찾아 낸 진리를 지키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보다도 못하냐?' 하나님이 오늘 본문에서 그렇게 속상하신 구체적인 이유는 우리가 하나되지 못하고 자꾸 다투고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 2:1-4)
옛날 삶의 이치와 도리를 찾고 배우려고 하였던 우리 선조들이 가장 중시하였던 것 중에 하나가 '예'였습니다. 사람에 대한 예의가 사람이 갖추고 살아야 할 가장 큰 도리였고 법도였습니다. '예'란 한 마디로 사람을 귀히 여김과 높힘입니다. '예'는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에서부터 옵니다. 겸손에서부터 옵니다. 자기의 유익을 먼저 구하지 않고 상대방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마음에서 옵니다. 하나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예'입니다. 사람에 대한 '예'입니다.
'예'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욕심에 사로잡혀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려 할 때 우리는 예의를 잊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다른 사람의 일도 돌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예'는 자기를 높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높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낮추고 깔보다 자기를 높히는 허영과 교만은 무례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이 '사람에 대한 예' 만큼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뒤지면 안 되는 부분입니다. 사람과 다투지 않고, 사람 깔보지 않고, 사람을 자기 이익의 도구로 생각지 않고 귀히 여김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한 마디로 겸손과 착함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낮추실 뿐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심으로 사람을 살리고 섬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되어지는 그런 아름다운 삶의 도리들이 하나님을 믿고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에게서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안타까움이시고 속상함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뜻과 생각이 예수님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장 크고 귀한 마음은 사랑과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해서가 아닙니다. 가끔 그럴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과 생각이 같을 때에도 사랑하시지만 그렇지 않고 다를 때에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깔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함부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시고 우리의 의사를 존중해 주십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말씀 중에 하나는 계시록 3장 20절의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문을 열지 않아도 얼마든지 우리의 문을 부스시고 들어오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어오시는 것이 정의이고 우리를 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들어오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문 밖에서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끝까지 문을 열지 않고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는 자에게 대한 궁극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대한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하나님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피조물 정도가 아니라 죄인인 우리들의 인격을 존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에 폭력을 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참 폭력적입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자기의 이익에 반하면 서슴없이 공격합니다. 비난합니다. 폭력을 가합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대부분은 정의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의 유익 때문입니다. 설령 백번 양보하여 그것이 정의라고 하여도 정의는 폭력을 덧 입는 순간 변질 됩니다.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참 다툼과 분쟁이 많은 세상입니다. 우리 나라가 특히 좀 더 심한 것 같습니다. 세상이 참 폭력적입니다. 사람에 대한 예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조금만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함부로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그리고 공격합니다. 아에 죽이고 매장하려고 합니다. 남만 그런게 아니라 저 자신도 그러며 살고 있습니다.
참 가슴이 답답합니다.
우울합니다.
세상을 떠나 도피하고 싶습니다.
죽고 싶습니다.
이꼴 저꼴 안 보고 빨리 천국 같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더 답답하고 우울합니다.
이러한 저의 마음에 하나님이 생각나게 하시고 새삼스럽게 묵상하게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아멘.
저는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하지만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 보려고 힘써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처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섬김으로 다툼과 분쟁과 싸움으로 얼룩진 이 세상에서 다른 삶의 양태를 보이는 작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도 은혜가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