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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길을 닦아라

2015년 12월 13일 경동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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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이사야서 40:1-8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고 외쳐라." 한 소리가 외친다.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다." 한 소리가 외친다. "너는 외쳐라." 그래서 내가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아멘.

고린도전서 4:1-5

사람은 이와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경우에 관리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실성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내가 의롭게 된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아무것도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을 환히 나타내시며, 마음 속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11:2-10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물어 보게 하였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들이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을 두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이 사람을 두고 성경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였다. 아멘.

설교문

찬양 들으시니 마음이 기쁘시지요. 성탄이 가까이 왔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한 언론과 인터뷰를 하다가 말미에 갑작스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요즘 성탄에 신이 나지 않는 것 같은데 목사님에게 성탄은 무엇인가요? 제가 이 질문을 받고 멍하고 있었는데 이 분 설명이 요즘에는 성탄하면 장사하는 분들이 물건 많이 팔려고 홈쇼핑이나 거리에서 성탄 선전을 많이 하는데 그게 성탄 아니지요? 생각해 보니 그것은 성탄이 아니고, "비즈니스 마스"입니다. 주님이 오셨는데 기쁨이 없고 그래서 성탄절은 어떻게 해야 된다고 보십니까? 제가 그 질문을 받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성탄은 Christmas 곧 Christ-Mas. 마스는 미사와 같은 말입니다. 예배하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입니다.

지금은 그리스도가 있을 자리에 그분이 안계시고, 나 홀로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I-MAS. 당신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You-MAS. 좀 더 보태면 I-You MAS. 마스는 마스인데 누구를 위한 마스인지 불분명해 졌습니다. 오늘은 성탄, 그분의 탄생을 찬양합니다. 그분이 누구시길래요. 무엇하시려고 오신 분이신가요? 성탄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나서 마지막 승천하시기 전에 사람들 앞에서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마지막 이 이야기는 꼭 해주고 가야겠다. 아마 성탄을 맞이한 사람들에게 준 답변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고. 오늘 이 말씀 속에 보면 성탄이란,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닦으라는 뜻입니다. 그 분 자신이 살아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성탄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길 닦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올 길을 닦아라. 그래야 구원의 복음을 들고 이 땅과 이 역사에 오겠다. 이 모든 사람 속에 와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겠다고 말씀하셨는데 하나 덧붙여서 말씀하십니다. 길닦이 할 때, 길이 너희들을 닦지 말고, 내가 길이니 나를 닦아라. 나 그리스도를 길 삼아 살아라. 이렇게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길입니다. 길은 우리가 다시는 길입니다. 오고가고 사는 길입니다.

오늘 여러분 아까 예배순서 중에 '용서의 선언'때 읽은 성경본문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1절의 길 이야기죠. 길 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만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납니다. 만남이 있고, 상통이 있고, 소통이 있습니다. 그것이 길입니다. 길은 움직이지는 않지만 그 길 위를 다니는 사람은 그 길을 다니면서 살고 또 계속해서 길에서 만납니다. 그리스도 자신인 길, 그 위에서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실 선물이 있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답예물이 있습니다. 길에서 사람과 하나님이 서로 만나서 자기의 가진 것을 교환합니다. 오늘 본문에 무엇을 교환하는지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을 예수의 생명으로, 또한 우리의 죽은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음을 드립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죽음을 받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라고. 죽음과 생명을 맞바꾸는 곳이 길입니다. 요약된 말씀이지만 일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과 역경과 죽음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역사를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받으시고, 그 빈자리에 생명, 승리, 축복, 그리고 기쁨을 한 곳에 묶어서 생명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죽음과 생명 맞바꾸기, 그것을 바꾸는 장소는 성경에 보면 십자가입니다. 맞바꾼 것을 실증으로 보여준 증거가 바로 부활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이 부활의 생명으로 움터났습니다. 우리는 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이런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런데 옛날 옛적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 이야기를 예수 이전에도 기억하며 살았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40장에 보면, 이렇게 선지자가 선포합니다. "광야에 여호와께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큰 길을 닦아라. 하나님이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길을 닦으려면 평지에 닦아야 오는데, 어느 동네는 산이 너무 높고, 계곡이 낮아서 그 길로는 길을 닦을 수 없으니 "산은 깎고, 계곡은 메꾸어서 평지를 만들어라". 또 어디는 너무 굴곡이 심어서 내가 갈 수 가없으니 "굴곡은 펴라". 험산 준령이 너무 많으면 그것을 "깎아서 평지를 만들어라". 길은 그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만납니다. 높은 곳, 낮은 곳이 만나야 되니까요. 이렇게 해야지 소통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도대체가 무슨 광야에 산이 있고, 계곡이 있습니까. 무슨 사막에 구부러진 길이 있고, 험난한 길이 있습니까. 우리 성경말씀에 쓰여진 모든 말씀은 상당부분 은유적 표현이 많습니다.

여기 광야에 길을 닦아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하면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는 세상의 맨 처음 아무것도 없었던 시절, 창조주 하나님이 역사하던 공허한 곳의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또 하나 광야는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게 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공인된 역사가 출발하는 장소입니다. 시내광야 말입니다. 광야 생활 40년, 400년 동안의 식민살이 이집트에서 구원 받아서 광야에 왔습니다. 40년 살고, 가나안 복지로 이동을 합니다. 그 광야의 생활은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기는 하지만, 제 2의 창조의 역사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동시에 그곳은 구원해주신 하나님, 구원을 일으키신 주님을 만나는 장소,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약속 받았습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 이 두 가지를 약속을 가지고 광야가 시작됩니다. 광야는 출애굽 하시는 하나님을 맞이하는 역사,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것을 확인하는 역사, 그래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역사가 출범하는 곳, 그곳이 광야입니다. 그곳이 사막입니다. 광야는 빈공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 하늘과 함께 사는 곳, 그곳이 역사의 현장입니다.

이렇게 광야의 의미를 알고 읽으시면 구약에 쓰여진 말씀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나라에도 통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봤습니다. 대한민국이라 이름하는 이 땅에 주님의 축복이 풍성하게 임하옵소서 라는 내용을 시로, 글로 쓰고 싶으시면 우리 땅을 그냥 대한민국 땅이라고 표현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축복이 풍성하게 임하옵소서라고 쓰면 좋습니다. 외국 사람은 모를 수 있지만 우리나라 얼을 지닌 사람은 다 압니다. 우리나라가 너무 아름다워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어떤 사람은요 이 땅은 너무 조용하고 좋아 아침만 되면 아름다운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도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라고 하는 표현이나, 우리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라고 하는 표현이나 다 같은 의미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표현 속에서 하나님이 주인이고, 우리는 백성인 역사를 살아간다는 고백을 하며 지냅니다. 이 역사 굽이굽이 속에 높은 언덕이 있고, 낮은 계곡이 있고, 극과 극이 있고, 양극화가 있고죠. 길위에 부자유, 불신이 가득하고, 사람의 마음도 너무 강퍅해서 너무 굴국이 심하고, 이러면 안 됩니다. 그곳에 평탄한 길을 내라고 하십니다. 성탄의 목적은 하늘과 땅의 양극을 만나게 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하는 길을 만들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 분이 오셔서 구원을 이루시게 길을 펴서 반듯하게 만들려고, 세상을 정정당당하게 만들려고, 아름답게 만들려고, 구부러진 것을 펴서 직선으로 만들려고 그래서 성탄이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나는 길이요"라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이 길의 주인이시며 동시에 이 길을 닦으려고 오셨습니다. 길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길이요 동시에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 분의 길은 진실해야 됩니다. 그 길은 튼튼해야 됩니다. 그 길에는 가식이 없어야 합니다. 가식이 있는 길은 성수대교가 무너지듯이 무너집니다. 길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길의 내용은 진리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이 진실 된 길은 진리의 길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살아가는 역사의 과정이 진실로 덮여야 합니다. 진실은 굽어지는 것이 아니죠, 그것은 펴는 것이죠, 굴곡이 아니라 평지가 되는 것이고, 서로 나누며 사는 곳이며, 아픔과 슬픔이 항존하는 곳이 아니라 치유와 기쁨ㅇ으로 변하는 곳이고, 서로 다른 것들이 합해서 평지가 되는 것, 그것이 진리의 뜻입니다. 살아있는 진리, 진실된 과정이 이 길의 특징입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본문 말씀 보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길을 주시고, 길을 걷게 하시면서 여러분에게 부탁하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실성"이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을, 역사를, 삶을, 신실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진리를 품고 살라는 것입니다. 요러분 거짓이 아닌 진실로 사십시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정말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진실로 우리의 길로 모셨으면, 그 길에 들어서면,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살아야 합니다. 거짓이 아닌 참 말입니다.

또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에 들어서면 길의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지향점과 방향이 분명해야 합니다. 방향은 생명입니다. 요한의 제자가 예수께 와서 묻습니다. 우리 선생님 말씀인데 당신이 진짜 우리가 기다려야 할 길 되신 그리스도 입니까? 예수께서 답하신 말씀입니다. "가서 전해라"고 하시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눈 먼 사람이 눈을 뜬다. 그것이 생명이다.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걷는다. 새 역사입니다. 나병환자가 깨끗해짐을 받았다. 귀 먹은 사람의 귀가 열려서, 말씀을 듣는다. 마지막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 보았지 않느냐, 본대로 전해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밟은 사람에게는 마지막 목표가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 눈먼 자가 눈 뜨는 것, 귀머거리가 듣게 되는 것,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 역사 한 가운데에서 억압된 사람들이 기쁨을 누리는 것, 가난한 자가 복음을 듣는 것, 이 모든 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의 말씀입니다.

로마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요. 왜 그런 말하는지 아십니까. 로마는 로마 제국의 수도입니다. 로마제국 아래 있는 식민지 국가들은 수도 로마를 중심으로 살아야 했읍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때 로마제국의 제왕들은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한다고 로마 중심주의를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 때문에 가장 피해를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고 해서 로마로 왔더니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긴 하는데, 그곳은 물질적, 영적 것의 중심이었읍니다. 고로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믿는 사람은 신앙적으로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섬겨야 했읍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 숭배가 강행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선언의 구체적인 한 단면입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네로 통치시절에는 심지어 죽임 당한 기독인들의 시신을 횃불로 매달아 불 붙여 거리를 밝히는 등불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죄목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무신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였습니다. 하나님 믿는데, 무신론자라고 합니다. 무신론과 유신론은 철학적, 사상적 논리가 아닙니다. 상황적 논리입니다. 로마 황제가 유일무이한 신이다. 그러니 로마 황제를 신으로 믿지 않는 사람은 무신론자라는 거이지요. 그래서 초대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자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역사의 굴곡은 이렇게 많이 왜곡됩니다. 그 당시 가장 포악했던 황제는 네로 황제였습니다. 아주 험한 높은 산입니다. 그런데 역사가들의 기록을 보면 그렇게 오만한 네로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죽였는데 신하들 앞에서는 가장 비참하고, 졸렬하고 성갈이 악독한 나쁜 왕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이지요. 가장 높은 자가 사실은 가장 낮은 행보를 하고, 가장 교만한 자가 가장 비겁합니다. 가장 포악한자가 가장 약합니다. 이것은 어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의 왜곡이라 이름하는 현실 바로 그것입니다. 거기서 "무신론자들"이 이야기 합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지 않는다고. 로마제국이 급기야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화하는 극단의 변화를 합나다. 그런 이후로는 로마로 가는 길은 로마를 새롭게 건설한 그리스도인의 길이 되었읍니다. 모든 길은 로마의 그리스도를 향한 길리 되었읍니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길, 생명의 길에도 정도가 있어야 하고,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진리와 생명의 길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아야 합니다. 그럼 어떤 길을 가야 합니까? 우리는 진리가 내용인길, 생명이 목표인 길을 가야 합니다.

제가 최근에 뉴스를 하나 봤습니다.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사회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고아원에서 자란 청년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벌어서 생활을 영위하고,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평생에 그리던 꿈대로 돈을 벌어 좋은 스포츠카를 하나 샀습니다. 매일 아침 차를 닦습니다. 하루는 차는 닦는데 차 뒤 쪽에서 바싹바싹한 소리가 나서 가봤더니 자기 귀여운 아들이 차를 찍찍 긋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지 모르고 자기 아들의 손을 일하던 망치로 내리쳤습니다. 아이의 손목이 망가졌는데 너무 많이 마져서망가져 병원에서 손목을 잘랐다고 합니다. 그 다음 날 마취에서 깬 다음에 이 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하는 말, "아빠, 다시는 못으로 차를 긁지 않을게요, 용서해 주세요"라고. 이 아버지가 기가 막히지요. 집에 돌아와서 다시 차를 닦으면서 아이가 굵었던 곳을 가봤다고 합니다. 가봤더니 이렇게 긁힌 채 쓰여있더랍니다: "Papa, I love you." 아들은 아버지의 스포츠 카 기쁨에 자기 방식대로 동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것을 보는 순간, 고민, 고내, 분노로 며칠 고민하다가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들을 편모슬하의 고아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일상에서 있을 수 있는 인생의 길을 들어섰으나 목적이 분명치 않았던 삶, 과정이 진실로 되지 못했던 삶, 그냥 분노와 좌절을 딛고 일어서고 싶었던 막연한 이런 삶, 나이 먹은 사람이나 안 먹은 사람이나, 남자나 그리고 여자나 경험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입니다. 그 길에 들어서면 길에는 진실이 풍만합니다. 진실대로 살면 그 다음에 주어지는 것은 생명이라 이름하는 우리의 목적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도 그렇고요. 역사의 흐름도 그렇고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원하는 생명의 역사, 생명의 삶입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인이자, 진실의 주인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역사 속을, 이 세상 속을 잘 살아 갈 수 있을까요. 모든 옛것을 다 파괴시키고, 새로 지어야 하나요. 저는 몇 주 전에 영등포 문래동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가봤더니, 우리 김항래 교우가 사진전을 여는 곳이었는데 그 집이 옛날 철공소 자리 이었습니다. 옛날 철공소 공간에 예술 문화 공간을 만들었더라고요. 요즘 이런 곳이 서울에 여럿이 생기나 봅니다. 이런 생각을 현장에서 했습니다. 과거 문래동의 철공소 공간은 어둡고, 불편하고, 지저분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우리가 배고팠을 때, 굶주렸을 때 우리가 부흥의 동인이 된 한 생산공장의 명소였습니다. 그것을 허물 필요가 없지요, 그대로 두고 있으면 되지요. 산업화의 결과로 우리가 복지사회가 되고, 이제는 우리 문화를 즐길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을 잘 수리해서, 하나의 예술 공간으로 만들었더니 아름다운 문화예술 전시장이 되었습니다. 산업사회와 문화사회가 공존할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길이 생긴 셈이죠. 유럽공동체(EU)는 매년 2개의 낡은 옛 도시를 선정해 문화도시로 만듭니다. 경기도 시흥이 우리나라 최초로 전통문화를 복구하는 명품 도시로 선발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뻣습니다. 새로운 길, 생명의 길은 새로운 것을 파괴하고 만드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옛날의 아름다움을 계승하고, 새로운 창조를 시작할 수 있으면 그것이 더 아름다운 조화입니다.

예수께서 오시는 성탄은 모든 것을 없애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옛것 속에서 새것을 찾아가고 개발해 가는 온고지신의 동인일 수 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시려고 합니다. 한국 땅에, 삼천리 반도 금수강간에 성탄 하고 싶다. 이 땅을 고히 간직해라. 그리고 새로운 역사를 그 속에서 만들어라. 우리는 성탄을 축하하며 오랜 된 새길, 오래된 새 역사, 그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우리 역사의, 우리 신앙의 참된 길입니다. 그 길은 진실이 지배합니다. 힘들지만 오셔서 십자가라 이름하는 진실의 길을 함께 걸으며 십자가의 진실속에 자신을 담그십시오. 그러면 생명이 주어집니다. 부활의 생명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함께 결단하십시오. 지금 성탄은 나의 마스가 아니고, 인간의 마스도 아니고, 세상의 마스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마스입니다. 길 되신, 진실이신, 생명이신 그리스도, 그 분의 마스 입니다. 우리 깊은 곳에 잉태하실 그 분의 마스입니다. 우리 마음속으로 선언하십시다. 서로 격려하며 큰 소리로 외쳐봅시다. 진실로 외칩시다: "메리 크리스마스!". 아멘.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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