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출13:17-22)
[바로는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블레셋 사람의 땅을 거쳐서 가는 것이 가장 가까운데도, 하나님은 백성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바꾸어서 이집트로 되돌아가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백성을 홍해로 가는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은 대열을 지어 이집트 땅에서 올라왔다.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엄숙히 맹세까지 하게 하여 "하나님이 틀림없이 너희를 찾아오실 터이니, 그 때에 너희는 여기에서 나의 유골을 가지고 나가거라" 하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숙곳을 떠나 광야 끝에 있는 에담에 장막을 쳤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군할 수 있도록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앞서가시며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앞길을 비추어주셨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그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
설교문
- 버리고 떠나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두 주 동안 미국에 다녀오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여정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인생의 가장 어려운 때를 지나고 있는 분들 곁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떨어져 있었기에 더욱 우리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진 시간이었습니다. 함께 신앙 생활하는 이들이 우리 삶에 얼마나 소중한 이들인지를 절감한 나날입니다. 이즈음 우리는 또 다시 역사의 격랑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한반도는 또 다른 긴장 상황에 돌입했습니다. 정부는 개성공단의 '전면 중단'을 선언했고, 북한도 그 지역을 군사통제 구역으로 선포함으로써 소담하게 심겨졌던 통일의 꿈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인들은 억장이 무너지는 좌절감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평화의 길은 또 저만치 멀어지고 있습니다.
사순절 순례 여정을 시작하면서 희망의 조짐도 있습니다. 우리는 2월 13일 쿠바의 아바나 공항에서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종과 러시아 정교회의 키릴 총대주교가 만났다는 소식에 접했습니다. 1054년에 갈라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수장들이 처음으로 만나 화해를 도모하는 자리였습니다. 양측은 공동 성명에서 "거의 1천년간 가톨릭과 정교회는 성찬 의식의 교감을 박탈당했고 통합의 손상과 인간의 죄로 고통받았다"면서 "이번 만남이 신의 뜻인 통합으로 가는 길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명서는 또한 "우리 안에 있는 희망을 세상에 설명하기 위해 두 교회의 공동 노력이 시급"하다는 사실도 언급했습니다. 화해와 평화를 향한 용기있는 만남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분단과 분열의 세월 속에 처해 있지만 자유와 평화의 새 땅을 향한 갈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삶은 끝없는 벗어남입니다. 익숙하던 것과 결별하고 낯선 세계를 향해 자신을 개방할 때 우리 삶은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예수를 따르던 이들을 생각해봅니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 같은 흥분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병자들이 치유되고, 귀신이 내쫓기고, 짓눌린 채 살던 사람들이 인간다움을 회복하고, 무너졌던 공동체성이 회복되었으니 말입니다. 로마의 압제가 끝나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멋진 세계가 도래하리라는 낙관론이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악의 뿌리는 깊습니다. 선한 뜻을 가진 이들은 현실 속에서 자기들의 뜻이 속절없이 꺾이는 것을 늘 경험합니다. 그런 씁쓸한 경험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적당히 비관론자가 되어 살아갑니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세상은 변화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순간 현실과의 타협 혹은 적응이 시작됩니다. 현실에 길들여지는 것이지요.
문제는 믿음의 사람들조차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발돋움 혹은 도약입니다. 신앙은 안전한 자리에 서서 평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용기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은 모험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옛 삶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다닌다면 그처럼 허망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순절은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 삶을 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 예속의 길을 떠나 참된 자유를 향해 나아갈 생각이 있는지를 묻습니다. 예수의 길이 참 생명의 길이고, 예수 안에 참 생명이 있다고 믿는다면 더 이상 주저하면 안 됩니다.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과거의 기억과 습관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에움길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내리자 바로는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허락했습니다. 자유를 향한 긴 행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해변길로 인도하지 않고 광야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지름길이 아닌 에움길로 말입니다. 게다가 그 에움길은 시련을 예고하는 길이었습니다. 변변한 나무 하나 만나기 어려운 광야, 낮에는 햇빛을 가려줄 그늘 하나 없고, 밤이면 혹독한 추위와 맞서야 했던 곳, 독사와 전갈이 우글거리는 땅을 걷고 또 걸어야 한다는 것,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출애굽기 기자는 하나님이 그들을 해변길로 인도하신 것은 이미 그 길목에 터잡고 살던 이들과 전쟁이라도 벌어지면 마음을 바꿔 애굽으로 돌아갈까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뒤늦게야 깨닫게 되는 현실일 뿐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도 하나님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어 방황할 때가 많습니다.
미국에서 오랜만에 대학원 동기를 만났습니다. 그는 일찍이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정착하여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또 교회를 섬기며 살았습니다. 이민자들의 신산스런 삶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싸안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동안 입은 내적 상처들로 인해 교인들 사이에 다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마음이 맞지 않아도 교회를 떠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는 거듭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생활을 해야 했기에 그는 전기 기술을 배우고, 배관 기술을 배워 그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신학자로서의 알량한 자존심은 다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고, 전기선을 연결하기 위해 천장 위를 기고, 배관공사를 하기 위해 바닥을 기다가 그는 문득 자기 곁을 기고 계신 예수님을 느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만난 주님은 그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이르셨습니다. 신학자라는 자부심, 포기할 수 없었던 신학자의 언어와 생각을 내려놓고 보니 비로소 예수가 관념이나 추상이 아닌 실재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광야와 같은 삶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오랫동안 머리로만 알던 예수님의 마음과 깊이 접속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지름길을 좋아합니다. 남보다 앞서 어느 목표에 당도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때로는 우리를 빈곤하게 만듭니다. 실패와 좌절 그리고 눈물은 우리를 하나님과 이웃의 마음에 접속해주는 연결선이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어렵고 보잘것 없는 장소나 형편이 창조적인 삶을 위한 공간이 될 때가 있습니다. 플라톤은 <티마이우스>에서 그런 장소를 '코라'라고 부릅니다. 코라는 도시와 사막 사이에 버려진 땅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곳이야말로 만물을 소생시키고 어머니처럼 아이에게 젖을 먹여 일으켜 세우는 장소입니다(배철현 ,<부정적 수용능력>, 경향신문). 코라를 거치지 않고는 사람이 성숙할 수 없습니다. 익숙하고 편하던 세계를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 삶은 깊어지지 않습니다.
- 유골을 모시고
오늘 본문은 출애굽 공동체가 요셉의 유골을 모시고 애굽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요셉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지만, 유골을 모시고 가는 행위는 의미심장합니다. 요셉의 유골은 출애굽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이어주는 정체성의 근거인 셈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속에의 욕구를 지니고 삽니다. 소속이 없는 삶처럼 불안정한 삶이 또 있을까요? 지금 세상 도처를 떠돌고 있는 난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뿌리뽑힌 나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든든한 울타리 구실을 해주었던 나라가 전쟁터로 변하면서 그들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세계로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유골함을 안고 세계를 떠돌게 될까요? 유대인들은 순례의 절기 때마다 자기 조상들이 걸어온 고난의 여정을 상기하곤 했습니다. 구질구질한 이야기는 우리 인생의 페이지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만 그것을 망각의 강물에 띄워보내는 순간 우리의 뿌리 또한 잘려나가게 마련입니다. 자랑스러운 기억이든 부끄러운 기억이든 자기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존재에의 용기입니다. 우리 인생의 이야기는 나 홀로 써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쓰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딱한 사람은 자기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 하셨습니다. 이 한 마디를 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이 든든해질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살아갑니다. 지향이 분명하면 그곳에 이르는 길도 환히 보이게 마련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자국을 지니고 다닙니다"(갈6:17)라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길을 걷다가 얻은 상처가 그를 자유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상하지요, 상처가 자유를 주다니요? 예수님도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편안한 길로만 가려 하니 인생이 고달픕니다. 한번쯤 십자가를 지기 위해 몸과 마음을 낮출 때 영적인 자유가 우리에게 유입됩니다.
우리의 지향이 우리를 두고 세우신 주님의 뜻과 일치한다면 현실이 어렵다고 하여 낙심할 것 없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길이 지름길이 아니라 하여 투덜거리지 말고, 그 에움길을 걷는 동안 주어지는 은총과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인도하고, 비추어주고,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 삶은 든든해 집니다. 세상은 분열을 획책함으로 이득을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믿는 이들은 끈질기게 화해와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열된 세상을 하나로 잇기 위해 애쓰시다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영생의 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사순절 순례길을 걷는 동안 우리 모두 진정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