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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크리스천이 오해하는 기도와 관련된 용어

prayer
(Photo : ⓒ베리타스 DB)
▲한 성도가 기도하고 있다. 위 사진은 해당 기사와는 관련이 없음을 알립니다.

예배의 변화와 갱신을 연구해 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교회발전연구원은 최근 '한국교회 잘못된 예배용어, 이것만은 고치자'라는 주제로 연구발표회를 가진 바 있다. 아래는 기독교인들이 오해하는 기도와 관련된 용어들을 추려낸 것이다. 김세광 교수(서울장신대, 예배학)의 발제문을 부분 편집한 것임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1. 당신⇒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은총으로..",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 세우신 이 교회를..".

이와 같이 하나님을 '당신'이라 부르는 것을 종종 보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만일 어느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당신이 주신 돈으로 이것을 샀습니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말은 의당 다음과 같이 고쳐서 말해야 한다. "아버지,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이것을 샀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직접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이다. 우리말 2인칭 '당신'은 결코 존대어가 될 수 없다. '당신'은 다만 3인칭에서는 극존대어로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3인칭이 될 수 없고 우리 간구를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에 해당되므로 '당신'이란 호칭은 안 된다.

2. 기도 드렸습니다(기도하였습니다) ⇒ 기도 드립니다(기도합니다)

기도를 끝낼 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와 같이 동사 '기도하다'의 시제를 현재형으로 써야 하는데 요즈음 이를 '기도하였습니다', '기도 드렸습니다'와 같이 과거형을 쓰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것을 본다. 이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5분이나 10분전에 기도를 시작했으므로 간구 한 모든 말들은 문법적으로는 이미 과거 또는 현재완료가 되므로 동사 '기도하다'의 과거형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각도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않다. 기도(祈禱)는 글자 그대로 그 핵심이 하나님께 아뢰는 우리의 간구다. 간구의 내용은 소원이며 소원은 미래 지향적이다. 이러한 미래 지향적인 소원을, 즉 우리의 바람을 '기도하였습니다'로 끝낼 수는 없다. 기도의 핵심인 간구의 내용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영원한 현재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기도의 마무리는 과거가 아닌, 현재로 끝내는 것이 옳다.

3. 주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 주님. 하나님 아버지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해 '주여', '주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라 부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어법상의 문제가 있다. 즉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 국어에서는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지 못한다. 2인칭에는 존칭이 아닌 경우에 한하여 호격 조사 '-아'나 '-야'가 붙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친구 사이나 아랫사람에게는 "복동아.", "철수야."와 같이 부를 수 있지만 손윗사람에게는 호격 조사를 붙일 수 없기 때문에 "아버님이시여.", "할아버님이시여."라 부르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존칭의 2인칭이 되기 때문에 이미 사어가 된 '-이여', '-이시여'를 붙여서는 안되고 그저 '주님',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로 해야 옳다.

4. 우리 성도님들이 ⇒ 저희들이, 교회의 권속들이... 등등

국어 존대법에서는 청자(聽者)가 최상위자일 경우 다른 어떤 인물에게도 존대를 쓸 수 없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은 바른 표현이 못된다. "할아버지. 형님이 가셨어요.", "아버지. 누님이 오셨어요." 첫째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자인 '할아버지'와 주어인 '형님' 및 화자(話者)인 손자 '나'다. 여기서 청자인 '할아버지'가 최상위자이므로 '형님'과 '나'는 존대를 받을 수 없다. 둘째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자인 '아버지'와 주어인 '누님'과 화자인 '나'다. 여기서도 청자인 '아버지'가 최상위자이기 때문에 '누님'과 '나'는 존대를 받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위의 문장들은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한다. "할아버지. 형이 갔어요.", "아버지. 누나가 왔어요." 공중기도에서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일한 입장, 동일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즉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격이다. 그러므로 지존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회중을 가리켜 '우리 성도님들'이라 존대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순히 '저희들', '교회의 권속들' 등으로 바꾸어야 한다.

5. 대표 기도 ⇒ 기도 인도

예배 순서 가운데 기도 시간이 되면 예배 인도자가 "우리를 대표해서 000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000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 "000님이 대표 기도를 하시겠습니다."와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 못된다. 온 회중이 머리를 숙여 무언의 기도를 할 때 한 사람이 소리를 내어 기도를 할 경우 우리는 이를 '기도 인도'라 부르는 것이 좋다. 기도 인도자는 기도의 대표자가 아니다. 이 기도 인도자는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다른 사람들과 분리될 수 없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또는 생각까지도 그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기도 인도자는 대표로 뽑힌 어느 운동 선수와는 다르다. 그는 대표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며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온 회중의 생각을, 즉 그들의 소원을 보다 깊게, 보다 하나님 뜻에 맞게, 아울러 그 절차를 정리해 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기도 인도자가 기도할 때 회중은 결코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없다. 만인제사장의 사상은 하나님 앞에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사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도 기도에 있어서 '대표', '대신'은 불가하다. 그러므로 '대표기도', '대신하여 기도'는 '기도 인도'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6. 사랑의 예수님 ⇒ 사랑의 하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 대신에 '사랑의 예수님', '고마우신 예수님' 등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예수님을 호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를 끝낼 때 반드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에게 우리의 소원을 아뢴 후 다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기도는 일차적으로 성부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 성자 되신 예수님 이름으로 아뢰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고 하신 말씀에 근거를 둔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도 그 서두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되어 있다. 역시 이 속에도 성부 하나님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 기도의 본임을 알아야 한다.

7. 참 좋으신 하나님 ⇒ 거룩하신, 은혜로우신, 전능하신, 진실하신, 자비로우신..하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을 부르면서 그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요즈음 '참 좋으신'과 같은 말이 사용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은 재고를 요하는 말이라 하겠다. 즉 성경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쓰인 말들을 보면 '거룩하신', '만유의', '생명의', '신실하신', '의로우신', '자비하신', '영원하신', '위에 계신', '능력이신', '진실하신', '구원하시는', '하늘에 계신', '사유하시는', '은혜로우신', '보수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홀로 하나이신', '천지를 지으신'... 등과 같이 대부분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들이 수식어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참 좋으신'은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수식어가 된다. 즉 '참 좋으신'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의 주관적인 감정, 정서로 느끼는 바대로 표현한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얄팍한 주관적인 감정으로 그 속성을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를 과장하여 발전시킨다면 '사랑스러운 하나님'('사랑의 하나님'과는 판이한 뜻이 된다.), '미운 하나님', '야속한 하나님', '귀찮은 하나님'...등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8.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 ⇒ 사용불가

기도하는 중에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영원히 존재하시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살아있다는 표현은 '언젠가는 살아있지 못할지 모른다' 또는 '아직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등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극히 제한하는 표현이 된다.

9. 중보기도 ⇒ 중보적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

기독교에서 "중보"라는 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있는 단 한 분의 중보자이시다.(딤전 2:5) 그러므로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과 다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다. 영원 전부터 계시고 성육신 이전에도 선재(先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도 중보자이셨다.(요 1:3,10; 골 1:16; 히 1:2)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행위가 가장 명백하고 독점적으로 드러난 곳은 바로 십자가에서의 구속사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중보는 이미 완성된 구속의 역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구속의 열매에 동참하고 있는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에 끊임없이 의존하며 살아간다. 예컨대, 믿는 자들이 드리는 감사와 기도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려진다.(요 14:14; 롬 1:8; 골 3:17; 히 13:15)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눅 22:69; 골 3:1; 히 12:2) 하늘에서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요한 일면은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롬 8:34; 히 7:25)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종말에 있게 될 부활과 심판의 때에도 계속될 것이다. 즉 부활과 심판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다.(요 5:28~29, 고전 15:22, 52~54; 살전 5:16; 마 25:31~46; 요 5:27; 행 17:31) 그러므로 중보기도라는 표현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으며, "이웃을 위한 기도", "중보적 기도", 라는 표현으로 사용함이 적절하다. 중보적 기도는 중보자의 기도(중보기도)와는 다른 "나" 아닌 "남"을 위한 기도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출처: NCCK 자료실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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