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산정현교회를 떠나 부산 나병원으로

<만우 송창근 바로보기 10>

송창근 목사의 지도 아래 산정현교회는 날이 갈수록 부흥했다. 교인 수가 많이 늘어서 교회 건물이 비좁아졌다. 교회 건물은 한식으로 건물 내부에 여기저기 기둥이 박혀 있어서 1935년 여름 교회 신축 문제가 대두됐다. 이는 전 교인이 모두 동의하고 있었다.

교인이 늘어서 교회를 새로 늘려 지어야 한다는 일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교회당 신축자금 때문에 문제가 일이났다. 송창근 목사가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이래 처음으로 목사와 장로들 사이에 큰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 교회 건축자금 문제로 인한 의견 충돌이었다. 교회에는 이미 비축된 재산이 많이 있었다. 교인들이 특별한 사용 목적을 밝히고 그걸 위하여 헌금한 재물들, 또는 죽으면서 기증한 재물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장로들은 교회 신축을 그 자금으로 하자고 나섰다. 그러나 송창근 목사의 의견은 달랐다. 그 헌금은 헌금한 이들이 제시한 특별한 용도에 따라서 사용되도록 해야 하고, 교회 신축 자금은 새로 모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본다면, 이때 장로들이 보인 행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교회당을 새로 짓는다면 아무래도 장로들에게 제일 먼저 “건축헌금을 내라”는 유형무형의 압박이 가해진다. 그리고 장로들은 당연히 일반 교인들보다 더욱 많은 헌금을 낼 것이다. 당시 산정현교회 장로들은 교회에 이미 비축되어 있는 재물을 사용함으로써 그러한 건축헌금 압박에서 피할 길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송창근 목사가 거기에 제동을 건 것이었다.

송 목사로서는 그간 자신이 세워놓은 권위와 지도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장로들이 처음에는 반대한다 해도 자신이 강력하게 밀고 나가면 이내 수그러들 줄 알았다. 그러나 장로들의 입장은 완강했다. 게다가 장로들 중에서 그가 부임한 뒤에 새로 장로로 뽑은 ‘홍 장로’의 행태가 송 목사의 눈에 너무나 거슬렸다. 그가 다른 장로들보다 앞장서서 송 목사에게 반기를 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홍 장로’의 그런 행태는 송 목사로서는 너무도 뜻밖인 일이었다. 송 목사가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뒤에 보니까, 홍 모 집사라는 교인은 매우 가난하고 배운 것도 전혀 없는 사람으로서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 믿고 교회 일하는 것에 아주 극진했고 열심이었다. 그래서 송 목사는 그를 장로로 만들고 싶었다. 산정현교회는 보낼 전국적인 명성을 지닌 거물급 장로들이 진치고 있는 교회로 유명했는데, 그런 유명인사들만이 아니라 무명의 보잘것없는 사람도 예수를 열심히 믿는 믿음 하나만으로 그들과 같은 장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그가 그 유명한 장로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교회를 섬기면서 열심히 교회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또한 목사의 욕심이라 치면 욕심이로되 참으로 선한 욕심이었다.

송 목사가 홍 모 집사를 장로로 만들고자 하는 뜻을 밝히자 기존의 유명한 장로들이 모두들 반대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한 교회의 장로라 하면 배움도 어느 정도 있어야 하고 기타 사회적인 여건도 어느 정도는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식의 반대였다. 그러나 송 목사는 그런 반대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송 목사가 평신도들에게 직접 영향력을 발휘해서 장로 투표에서 그가 뽑히도록 밀었다. 그 결과, 그 ‘믿음 좋은 홍 집사’는 ‘홍 장로’가 되었다.

그런데 건축헌금 문제로 송 목사와 당회원인 장로들 사이에 갈등이 일자, 다른 사람 아닌 홍 장로가 제일 앞장 서서 반대하고 나섰다. 본래 무식한 사람이라 반대도 무식하게 했는데 다른 장로들은 방관했다. 아마도 송 목사가 자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그런 사람을 장로로 뽑았다가 그렇게 당하고 있는 것에 대한 고소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송 목사는 그런 사태를 당하면서 강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교회 신축 문제’의 차원을 넘어서는 중차대한 사태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이런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자신이 더 이상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할 수도 없고, 또 목회할 필요도 없다고 느꼈다.

1936년 4월, 송창근은 장로들이 자신의 의견에 끝내 따르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마지막 통첩을 준비했다. 그리고 당회를 소집했다. 장로들은 여전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서 담임목사 직을 사임했다.

그리고는 곧장 평양을 떠날 준비를 했다. 갈 곳은 이미 생각해 두었다. 부산이었다. 거기는 호주 선교부 관할 구역이었다. 부산에서 호주 선교부 소속 매켄지 선교사가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큰 병원을 세우고 그들을 돌보는 목회를 하고 있었다. 청년시절부터 늘 아시시의 성자 성 프란시스를 진심으로 기리고 사모하고 있었던 송창근은 본래 빈민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일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는 그대로 부산으로 가서 매켄지 선교사와 함께 나병원에서 일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송창근 목사가 사임 의사를 전했을 때 누구보다도 당회원들이 제일 크게 놀랐다. 교회 건물 신축 문제가 필수적으로 제기될 만치 교회가 크게 부흥한 상황이란 것은 당회원들로서도 매우 기쁜일이었다. 다만 교회 신축자금 마련 문제에 대하여 서로 이견이 생겼을 뿐이라서 목사님 쪽에서 양보해서 모든 일이 편편해질 것을 바라고 버틴 것인데, 그것이 ‘담임목사 직 사임’이라는 천만 뜻밖의 일로 번진 것이다.

당회원인 장로들은 즉각 사임을 만류했다. 은혜롭게 추진해야 할 교회 신축 문제에서 당회원인 장로들이 고집을 부려서 돌연 목사를 잃게된 상황이란 것은, 그 자체로 매우 난감한데다가 더욱이 일반 교인들을 대할 면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창근 목사는 단호했다. 마지막 당회를 마친 뒤 즉각 이삿짐을 쌌다. 사태를 알게 된 교인들은 이삿짐을 붙들고 떠나지 못하도록 버텼다. 그러나 송 목사는 완강했다. 그런 만류를 끝내 물리치고 표표히 부산으로 떠나버렸다.

송창근 목사의 직제자 김정준 목사의 글에 송창근 목사의 사임과 관련한 ‘홍 장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해 여름 송목사님은 돌연히 교회를 사면하고 부산으로 내려 가시고 말았다. <전기편>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목회에 실패했다”는 전격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자기가 세운 한 무식한 장로가 자기를 배신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하셨다. 이 사람이 장로될 때 그 유명한 장로들이 반대를 했다. 송 목사의 의도는 그 유명한 장로들이 사회적 명성과 위치 그대로를 교회에서 인정받는 것보다는, 사회에서 무명하고 학식이 좀 모자라는 사람도 교회에서는 장로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인간평등론과 교회는 결코 사회의 연장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프로테스탄스적인 만인사제론에 의한 신도론에 의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사상을 받아 이해할 만한 사람이 장로가 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그렇게 평양을 떠나서 부산으로 간 송창근 목사는 마음이 계속 몹시 아팠던 것 같다. 부산에 가서 처음으로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데 산정현교회 생각 때문에 자꾸 눈물이 나서 눈을 감은 채 설교를 하는데 산정현교회 생각 때문에 자꾸 눈물이 나서 눈을 감은 채 설교를 했더니 “목사님이 졸면서 설교를 했다”고 소문이 났다는 후일담이 있다.

송창근 목사가 당회원들과 의견이 일치하는 않는다 해서 그처럼 표표하게 산정현교회를 떠난 행위 안에는, 당시 교계의 풍토에 대한 반감과 경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시절에는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면 서로 끝까지 버티면서 싸우는 경향이 강했다. 같은 평양 시내에 있는 대교회이자 산정현교회의 모교회이기도 한 장대현교회의 경우를 보아도 그러했다. 1930년대의 전반에 들어서서 담임목사인 길선주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분규가 일어나서 2년여 세월을 두고 격렬히 싸운 끝에 양쪽 모두 큰 상처를 입었다. 평양노회에서 나서서 노회 차원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 여러 가지 모양새로 개입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끝내 결말은 길선주 목사가 1934년 5월에 장대현교회에서 자신을 따르는 교인들 2백2십여 명을 이끌고 나가서 다른 교회를 세운 것으로 마감되었다. 그리고 산정현교회 자체를 보아도 그러했다. 전임 목사인 강규찬 목사가 새 목회자가 부임한 뒤에도 계속 여러 달 동안을 버티고 있다가 마지못해 사임했을 때의 일 역시 편편하지 못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송창근 목사는 그러한 교계의 모습과 현상에 질색했다. 그래서 오히려 보란 듯이 표표히 떠난 것이니, 그 또한 김인서가 지적한 바 ‘송창근의 결벽과 강직’에 해당한 것이었다.

산정현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송창근의 마음에 떠오른 것은 조승제 목사를 통해서 알게 된 ‘부산 나병원’이었다. “그곳의 나환자들을 향해 가리라”하는 것이 그의 결심이었다. 미리 부산 나병원 원장 매켄지 선교사에게 그 곳으로 가겠다고 전하여 서로 양해가 된 듯하다.

부산에서 나병원을 운영하면서 나환자 구료사업을 크게 벌렸던 매켄지 선교사와 함께 사진을 찍은 송창근 목사. 사진제공=경건과신학연구소

당회원들의 입장에서 보면 송창근 목사의 사임은 너무도 뜻밖이고 갑작스러웠다. 그래서 몹시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이 송창근 목사에게 바랐던 것은 ‘건축헌금 문제에서의 양보’였지 ‘사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송창근 목사가 단호하게 떠난 뒤에 그들은 후임 목사를 구하기 시작했으나 얼른 정해지지 않았다. 결국 송창근 목사가 떠난 뒤 석 달이 흐른 1936년 7월에야 마산 문창교회 담임목사이던 주기철 목사가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주기철 목사가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뒤 곧 교회 신축문제의 방향이 매듭지어졌다. 건축헌금 문제는 이전에 기부되어 있던 교인들의 재물도 사용하고 교인들에게서 새로 건축헌금도 걷는 이중의 절충방식이 선택됐다. 송창근 목사 사임에서 얻은 교훈 때문인가. 이번에는 당회에서도 ‘새로 건축헌금을 걷는 방식’을 받아들였다. 교인들이 크게 줄어들어서 이젠 ‘교회 신축’이 전혀 다급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지만, 목사의 사임까지 불러온 현안이었다. 당회원들로서는 그 문제로 교회를 떠난 교인들을 되불러 들이기 위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교회 신축 문제를 계속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새 예배당은 1937년 9월 초에 완공되었다. 건축헌금 5만여 원을 들여서 지은 300평 규모의 서양식 2층 벽돌건물이었다. 9월 5일에 입당예배가 성대하게 울려졌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가 부임한 뒤 1년 2개월이란 세월이 쌓인 그때에 이르기까지, 산정현교회의 교세는 ‘600명’선으로까지밖에 회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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