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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이 행함이 되어

2015년 12월 06일 경동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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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경동교회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아모스서 5:4-7, 14

"나 주가 이스라엘 가문에 선고한다.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산다. 너희는 베델을 찾지 말고, 길갈로 들어가지 말고, 브엘세바로 넘어가지 말아라. 길갈 주민들은 반드시 사로잡혀 가고, 베델은 폐허가 될 것이다." 너희는 주님을 찾아라. 그러면 산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요셉의 집에 불같이 달려드시어 베델을 살라버리실 것이니, 그 때에는 아무도 그 불을 끄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공의를 쓰디쓴 소태처럼 만들며, 정의를 땅바닥에 팽개치는 자들이다.

너희가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아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다. 아멘.

야고보서 2:14, 24-26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아는 대로,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내보내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10:25-37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아멘.

설교문

우리교회가 출발한지 70년이 되었습니다. 오늘 70주년인데 70년 전에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던 교우들이 70주년이 지나면 어떤 교회 모습일까 하고 상상을 했을 텐데 지금의 우리겨회 모습을 상상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 역사를 보면 아주 훌륭하신 목사님 세분이 계셨는데 세분 모두 북에서 남으로 남하한 분들이셨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김재준 목사님입니다. 강원용 목사님은 김 목사님을 모시고 평신도로서 교회를 만드는 일에 주동적으로 공헌하셨고,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 세분 중 선배가 되시는 송창근 목사님이 성남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무슨 본문으로 첫 번째 주일 설교를 하셨고, 그 당시 공동기도는 어떻게 하셨는지, 찬송은 무슨 찬송을 불렀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마지막에 부를 찬송이 첫 예배때 부른 찬송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영락교회는 베다니 교회라고 했고요, 송창근 목사님은 교회를 선교해야 한다고 해서 바울교회로, 우리 교회는 믿음이 깊어야지만 되는데 그런데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어야 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우리는 하자. 행하자. 믿음을 실천하자고 강조하면서 야고보 교회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오늘 예배의 본문 말씀에 야고보서 본문이 들어가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교회, 믿고 행하는 교회, 방점은 행함에 들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70년 동안 살아왔는데 우리는 오늘 예배는 지나간 70년을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감사하는 만으로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저녁에는 2부 순서로 진행합니다. 지나간 70년에 머물지 맙시다. 우리도 앞을 향해서 100년쯤은 바라보고 삽시다. 그래서 30년 뒤에 100년의 꿈을 우리들이 펼치자고 결단하는 예식을 진행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교회는요, 사람의 연령만큼만 사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살다가 죽고, 또 다른 사람이 오고 그러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 역사는 계속됩니다. 그래서 저녁에는 30년 후의 우리교회를 미리 내다보는 시간을 동시에 갖도록 하겠습니다. 70년 전 시작된 교회는 많은 변화를 겪어 왔습니다. 그 중에서 변화하지 않은 것이 딱 하나있습니다.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제 생각에 당시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면서 야고보 교회라고 이름은 지었지만 야고보서만 읽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읽었느냐하면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서도 반드시 읽으셨을 것입니다. 특히 누가복음 10장에 나온 선한사마리아 사람의 행동하는 믿음 이야기를 읽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주고, 신앙의 방향도 정해주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선한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통해서 보면 선한 사마라아 사람은 선한 일을 하는 사람, 선린의 사람이죠. 그래서 강 목사님께서 평신도 운동을 하시면서 선린회를 만드시고, 그것이 우리교회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면 이제 선한일을 하는 사람, 곧 누가복음에 나와있는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보겠습니다. 이 비유는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우리가 내세웠던 핵심 내용이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 그것이 로마서 1:17(하박국 2:4)에 나타난 종교개혁 기치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오늘 야고보서는 구원은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개가 대립된 양상입니다. 루터같은 사람은 믿음은 구원으로만 받지 무슨 행함으로 받느냐고 하면서,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에 불과한 책이라고 폄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분명히 구이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믿어야 받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베푸신 것이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 말고 행함은 무엇인가요? 사람의 행함은 아니지요. 하지만 루터가 볼 때 중세기 기독교는 사람이 자기가 믿는 대로 행함이 뒤따르고, 면죄부까지 살수 있고, 이 만큼 행실을, 행함을 했으면 구원에 이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세교회의 씻을 수 없는 잘못이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처럼 경동교회가 출발할때 우리는 중세교회 처럼 인간 행함의 신앙을 말하지는 않았읍니다. 행함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행함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믿음의 결과이어야지, 믿음없이 선을 행하는 것이 구원의 동력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때 잘못해서 사람이 행하는 것이 구원의 길인것처럼 잘못 생각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마 종교개혁을 하게 된 동인 중 하나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잘 믿으면 선행이 따라옵니다. 선행이 결실을 맺는 것은 먼저 잘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면 기독교 복음은 아닙니다.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따로 분리시켜 놓으면 성경말씀을 제대로 보는게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과 행실을 전부 다 끌어 안은 삶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행함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찾아 온 울법학자인 사람과 예수님이 이런 대화를 하십니다. 제가 영생을 얻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네가 진정으로 살고 싶다는 말이지? 네 살고 싶습니다. 어떻게든 행복하게 잘 살고 싶습니다. 여기서만 아니라 제가 죽은 다음 저 세상 하나님 품 안에서라도 영원한 나라의 안식을즐기고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사는 삶은 물론이고, 영원한 생명까지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이죠.

성경에 무엇이라고 했느냐. 바리새파 사람과 율법학자가 대답합니다. 이들은 점수받은 대로 구약의 말씀 두 곳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첫째 신명기서 6장 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하나님 만을 사랑하여라"고.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냐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쓰여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 보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되어 있읍니다. 그런데 이웃은 "네가 내 몸을 사랑하는 만큼 네 이웃도 사랑해라",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신명기의 하나님 사랑, 레위기의 네 몸과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가지를 답으로 말씀했더니 예수께서 옳다고 하셨읍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네 몸 사랑과 네 이웃 사랑의 3가지 안에 뭉쳐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네 이웃을 네 몸과 사랑하라고 알고 있는데 정확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진실로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사랑의 사람 만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압니다. 자기를 헐뜯고 짓밟으며 이웃을 사랑한다고요? 거짓입니다. 자기를 진실로 사랑할 줄 알면 생명은, 사랑은, 홀로 하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 생명이고, 함께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나의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진실로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세 부류입니다. 이 사랑은 삼위일체적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자기 사랑, 이웃 사랑 ,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의 얼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얼인 사랑을 받았지요. 제 자신이 사랑의 몸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의 몸입니다. 우리가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는 제대로 생명을 살아갑니다. 저만 사랑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지요. 저와 함께 산 이웃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창조 되었지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사랑해서 사랑의 존재가 되는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도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하나님 사랑하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저는 저를 사랑하고, 또 제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맞는 사랑나뭄의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사는 것이 구원 받은 삶입니다.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그렇게 고백합니다. 그게 바로 믿음이지요. 진실로 믿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먹고, 마시고, 행하고 살아야지요. 진실로 행함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을 아멘으로 받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행함이요, 동시에 믿음의 구결입니다. 행함은 우리가 만드는 상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행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사랑자체가 행함입니다. 그 사랑은 이웃뿐만 아니라 자신도 사랑하는 사랑이고, 그런 사람의 사랑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 됩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면 믿습니다. 믿으면 사랑합니다. 그런 뜻으로 우리 교회가 고백했읍니다. 믿되, 사랑하며 믿겠습니다. 사랑하되, 믿는 마음으로 사랑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이 교회를 세웠다고 믿습니다. 사실 그렇고요. 오늘 예수께 온 사람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랑을 행하라". "사람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을 행하라", "자기사랑과 함께 사랑을 행하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오는 길이 있습니다. 당시의 기록에 보니까 이 길이 37km 정도 된다고 해요. 이 거리는 서울에서 수원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50m, 여리고는 250m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오는 이 산길이 험준합니다. 평균 해발 1000m라고 합니다. 바로 이 길에서 사고가 난 것입니다.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강도만난 사람이 쓰러졌습니다. 그 길로 유대교 율법을 잘 지키는 제사장이 오다가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왜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율법에 시신을 만지지 않도록 되었습니다. 정결법의 위반이기 때문닝 것입니다. 아니면 강도 만났으니까. 나도 강도 만나면 어떡하나. 생명의 대한 위험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제사장은 도와주지 않고 지나쳤습니다. 평신도 지도자인 레위인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모르고, 유대교인도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와서 상처를 싸매주고, 병원에 데려다 주고, 돈이 모라자면 또 와서 줄 테니 하고 응급조치까지 취합니다. 예수님이 묻습니다. 누가 사랑이신 하나님, 자기를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 누구의 믿음이 진짜냐? 누가 제대로 하나님을 믿었느냐? 그랬더니 이 사람의 대답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랍니다. 믿음은 선한일로 귀결 되는 것이니라!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가 꼭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사람도 인간이었는데 왜 마음이 졸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환자를 보고, 골치가 아팠고. 머리가 아팠을 것입니다. 할까, 말까하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머리 굴리기 전에 그냥 피흘리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픈 것은 마찬가지입니다만, 그 뜻은 전혀 다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렵고 힘든 일 배고픈 사람을 보면, 매 맞는 사람을 보면 누구나 아픕니다. 그러나 누구나 막상 사랑의 행동으로 가면 가슴이 아프든지, 머리가 아프든지 할 것입니다. 그런데 둘 다 아파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프시기 때문에 환자를 가서 고쳐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살리는 사랑이지 죽게 내버려 두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지, 파괴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리는 하나님이지, 죽이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적어도 그렇습니다. 강도 만난 자가 팔레스타인 사람이었으면, 강도 만난 자가 무슬림이었으면, 강도 만난 자가 우리가 미워하는 북쪽의 어느 사람이었으면, 그냥 지나가시렵니까? 아니면 살리시렵니까? 이 이야기는 옛날 이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랑으로 일단 살려라. 살리고 나서 살린 사람이 잘못한 죄인이면 회개시켜라. 그리고 구원에 이르게 하라.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결실입니다. 사랑을 베풀고, 베푼 사랑이 열매 맺게 하려면 믿게 하여라. 좋은 사람이면 살려서 칭찬하여라. 하나님 말씀은 사랑해라. 우물쭈물 사랑해라가 아니라 사랑해서 고치고 새로 만들어서 살려라. 하나님은 죽은 자를 그냥 살린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하셨잖아요. 인간 대신에 죗값을 치르게 하시고, 그러나 용서하신 다음에는 살려서 부활시키셨잖아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는 그리고 새 사람을 만드는 그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원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베푸는 것이 진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 받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강도 맞아서 피 흘리는 사람 속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보이지 않는 신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을 넘어서 무언가 이 사람을 살려낸 얼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있어도 못 보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못 보는 신의 존재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생명의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왜 우리가 우리를 사랑해야 하느냐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제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러니 제가 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잖습니까. 제 안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해야지요. 사랑이신 하나님이 인간 속에도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자괴하지 마십시오. 짓밟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분신입니다. 강도 만나자도 사람이 만든 종교와 이념과 신념 말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 할 동네는 하나님의 사랑의 분신입니다. 사람이 싫다고 도망가지 마시고요,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 하나님의 눈물이, 하나님의 기쁨이, 하나님의 호소가 있으면 그것을 믿음으로 들어야지요. 그리고 가서 행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유대교의 한 이야기입니다. 유대교 아닌 사람이 율법학자를 찾아 왔습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사랑하라, 도와주어라. 베풀라. 하라는 계명이 많지요. 하라는 계명 수가 284개, 사람의 뼈마디와 같습니다. 하지마라는 계명이 365개, 합쳐서 613개입니다. 너무 많으니까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어떻게 하는 것이 하지 말라는 것의 종합입니까. 율법의 대가인 힐렐(Hillel)dl 대답합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이것이 하지 말라는 것의 핵심입니다. 내가 먹고 싶지 않은 것 남에게 주지 말라. 내가 싫어서 찌꺼기로 남은 것 남에게 선물로 주지말라. 내가 원하지 않는 것 남에게 주지 말라. "그것이 하지 말라는 계명의 요약이니라. 그 나머지는 보조해석이니라". 달리 말하자면 내가 싫어하는 것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 이것이 황금률입니다. 그러면 철학 사상에서, 신학 사상에서. 하라는 것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태복음 7장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대접받고 싶은 남에게 대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 받고 싶으면 먼저 사랑해라. 행복하고 싶으면 먼저 이웃을 행복하게 만들어라. 그것이 이웃사랑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지 모르시면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 남에게 시키는 것은 사랑 아니다. 내가 생명을 받고 싶으면 생명을 살려라. 내가 아파서 낫고 싶으면 환자를 찾아가 위로해라. 내가 목 마르면 남에게 물을 주어라. 이것이 모든 율법의 원천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하나님은 스스로 행복을 원하셔고, 기쁨을 원하셔서 저를 살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냥은 안되니까요. 하나님은 자기가 좋은 것을 인간에게 주셨지, 자기가 싫은 것을 찌꺼기처럼 주시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강할수록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없는 믿음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형제자매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 없이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사랑으로 행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까요. 하나님이 진실로 사랑이시니까요. 우리를 돌봐주시고 역사해 주시지 않습니까.

아모스서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하는 일을 보니 공의가 없다. 도대체가 정의라고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힐책하십니다. 우리사회도 정의를 살려야 합니다. 정의가 메마르니까요, 세상이 온통 불평등입니다. 공의가 없고, 공정성이 없고, 너무 편파적입니다. 우리가 모두 다압니다. 어떻게 하면 정의를 실현합니까. 정의가, 공의가 강물처럼 흘러야 되지만 사랑이 없는 정의는 사람을 죽입니다. 정의란 이름으로 사랑을 밟습니다. 정의는 사랑이 있어야 진짜 정의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정의가,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 정의를 만드신 분이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죽이는 정의 아니고 살리는 정의, 오늘 강도 만난 사람을 살려준 이 사마리아 사람은 이제 결단해야 합니다. 이 결단은 각자의 믿음의 결단입니다. 이 결단은 자유의 축복입니다. 자유를 어떻게 행사하는 것입니까. 사랑이 있는 자유만이 서로 자유를 나눌 수 있습니다. 자유가 중요하고, 공의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공의와, 자유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교회는 행함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공의를 실천하고, 사랑을 바탕으로 자유인이 되고, 사랑을 바탕으로 하나님 믿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고, 그렇게 해서 야고보 교회라고 이름했다고 믿습니다.

먼저 사랑은 십자가를 보고 믿는 스스로를 희생하는 희생적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희생의 머물지 않고 고난에만 머물지 않고 죽음에만 가둬두지 않으시고 뚫고 일어나서 새 생명을 주시는 부활의 은총을 주시는 사랑,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각자 살아갑니다.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교회는 바로 이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여서 공동체를 꾸리고, 동시에 예수의 몸 된 공동체가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님의 몸으로 만든 교회, 이 교회는 우리가 거주하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 영이신 성령이 주재자로 계시는 곳입니다. 경동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경동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경동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의 전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는 고백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 사람, 자연. 하나님의 사랑, 나의 사랑, 이웃 사랑. 사랑과 믿음과 행함 이 모든 것이 합쳐서 경동교회 공동체를 만듭니다. 그 공동체가 사랑의 역사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역사입니다. 경동교회에서 서로 사랑하며 삽시다. 사랑으로 공의를 행합시다. 사랑으로 믿음을 굳게 합시다. 사랑으로 자유하며 삽시다. 사랑으로 선교하고 봉사하며 삽시다. 경동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항상 풍성한 축복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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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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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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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