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눅 12:35-40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마치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곧 열어 주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되어라. 주인이 와서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이 허리를 동이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나 새벽에 오더라도,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다. 너희는 이것을 알아라. 집주인이 언제 도둑이 들지 알았더라면, 그는 도둑이 그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문
- 본문의 상황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사순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삶의 속도를 좀 줄이고 자기 삶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성찰해 볼 것을 요구하는 시간입니다만, 우리는 이런저런 분주한 일에 쫓기며 살고 있습니다. 늘 뭔가를 하는 것 같긴 한데 마음은 헛헛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마음을 다 담아 어떤 일을 도모하지도 못합니다. 일상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을 익숙한 방식으로 처리할 뿐입니다. 종말론적인 긴장감이 사라지면서 우리 삶은 진부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우리의 삶을 타격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라는 경고인 셈입니다. 좀 강박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사람은 늘 긴장상태 속에서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허리 띠를 좀 풀고 느긋하게 지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저도 너무 일에 집착하는 벗들을 만나면 좀 놀면서 일하라고 권고하기도 합니다. 본문은 쉬지 말고 늘 긴장상태 속에 머물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휴식과 놀이도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있으라는 명령은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 언제든 응답할 준비를 하고 살라는 말일 것입니다.
본문 말씀 바로 직전에는 예수를 따르는 이들의 경제생활에 대한 교훈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허망함을 일깨우기 위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이들은 재산을 축적하는 것을 생의 보람으로 여기며 삽니다. 그런데 비유 속의 그 사내는 많은 것을 축적했지만 그것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어리석음입니다. 그 비유에 이어지는 것은 미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먹고 사는 문제가 매우 심각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이 교훈은 외면당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가감해서는 안 됩니다. 똑같은 현실에 처해도 누구는 행복해 하고, 누구는 불행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객관적 기준 같은 것은 없습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이들은 늘 결핍감에 시달리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삶의 문법을 스스로 만들며 사는 이들은 쉽게 불행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가져다 준 큰 선물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끝없이 상기시키셨다는 사실입니다. 남보다 높아지려고 아우성치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낮추면서도 비굴해지거나 굴욕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무지 염려하지 말라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자기를 누군가에게 증여하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서, 자선을 베풀어라."(눅12:33a)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12:34)
몽골에서는 유목민들의 집을 게르라고 합니다. 유목민들이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떠나는 모습을 보면 감탄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들은 3시간이면 집을 해체하여 마차에 싣고 떠납니다. 새로운 곳에 도착하여 게르를 세우는 데도 3시간이면 족합니다. 그 홀가분함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 주인의 부재
오늘의 본문 말씀은 앞에서 언급한 이야기와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지 않은 많은 것들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청명한 하늘, 파란 바다 물결, 봄이면 돋아나오는 새싹,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여름이면 쏟아질 듯 퍼붓는 비, 무성한 나뭇잎들, 가을의 소담한 열매와 단풍, 겨울에 내리는 눈,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삶을 신비 앞에 불러 세웁니다. 자연 속에 깃든 하나님의 숨결을 알아차리는 눈만 열려도 우리 삶은 풍요로워질 겁니다. 장자는 그런 사람을 일러 '속에 빛을 품고 있는'(葆光) 사람이라 했습니다. 우리 속에 그런 빛이 있을 때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척도는 힘을 잃게 됩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살라고 이끌어 주신 사람들입니다. 내 곁에 있는 이들을 소중히 여길 수만 있어도 우리 삶은 맑아질 겁니다. 다른 이들을 경계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이용하려 하는 이들,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이들로 인해 세상은 점차 지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경제가치가 블랙홀이 되어 다른 모든 가치를 삼켜버린 세상에서 사람들은 이웃에 대한 여유를 갖기 어렵습니다. 모두가 화난 것처럼 보입니다. 난폭하고 무례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가슴 가득 먹장구름이 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요6:3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마음 하나만 품고 살면 좋겠습니다. 살리기 위해서는 나를 자꾸 선물로 줄 줄 알아야 합니다. 필요하면 물질도 나누고,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을 보듬어 안으려 할 때 우리는 생명을 북돋는 사람이 됩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온 주인이 문을 두드릴 때 곧 열어 주려고 대기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 마음이면 됩니다. 잠들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남들을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선의는 일쑤 왜곡되거나 무뎌집니다. 이웃을 향한 우리 사랑은 미움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래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렘17:9) 히브리의 지혜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곧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잠4:23) 삶이 관습이 될 때 우리는 지향을 잃고 떠돌게 마련입니다. 삶이 곤고해지면 이웃들의 고통에 점점 무감각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얻기 위하여 달려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영혼이 납작해진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라는 말씀을 자꾸만 되새겨야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45절 이하는 주인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종이 마음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여 있으면, 그가 예상하지 않은 날, 그가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주인이 와서, 그 종을 몹시 때리고, 신실하지 않은 자들이 받을 벌을 내릴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종은 주인이 있을 때 매우 신실했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주인이 그에게 집안 일을 다 맡기고 먼 길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우자 종의 숨겨졌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위임된 권한을 섬기고 돌보는 데 사용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강압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는 위임된 권한을 자기 고유의 권한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더디 오리라는 그의 판단은 오판임이 드러났습니다. 심판의 시간은 예상치 않은 때에 도둑처럼 찾아오는 법입니다.
- 기다림의 자세
주인이 있을 때와 주인의 부재시에 행동이 달라진다면 그는 진실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옛 사람은 군자란 홀로 있는 데서도 삼간다 했습니다. 그게 바로 신독愼獨입니다. 남이 보거나 보지 않거나 한결같아야 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훈련을 해야 할까요? 유학에서는 두 가지를 제안합니다. 존천리存天理와 거인욕去人欲이 그것입니다. 기독교적 언어로 번역하자면 존천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무는 것이고, 거인욕은 자기를 내려놓는 것 즉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꾸만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마음의 습관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참의 길에 접어들었다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자꾸만 다른 이들의 필요에 응답해야 합니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타자들의 세계에 마음을 열고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하려고 할 때 우리는 자기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조금 막연하지요? 일전에 우리 교회 정현모 집사님이 만드는 T.V 프로그램 <명견만리>를 보다가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경제위기로 아주 힘든 상황에 처한 그리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운동이었습니다. 일단의 사람들이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시키면서 두 잔 값을 지불합니다. 카페 주인은 조그마한 종이 쪽지를 그에게 건네줍니다. 손님은 그 종이 위에 뭔가 간단한 메시지를 적습니다. 대개는 격려의 말입니다. 주인은 그 메시지를 카페 벽에 부착합니다. 돈이 없어 커피를 사먹을 수 없는 형편의 사람이라도 그 가게에 들어와 그 메시지를 바우처 삼아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걸 suspended coffee라고 합니다. 적극적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곁으로 다가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작은 실천이라도 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열린다면 세상은 조금씩이나마 평화로운 곳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정죄하거나 잔소리를 늘어놓는 대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따뜻한 눈갈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주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작가이면서 목사인 프레드릭 비크너는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말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온전하게 임하시기를 기다리는 것은 수동적인 일, 경건하게 기도하면서 교회에서나 하는 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우리가 아는 방법대로 최대한 그리스도 대신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어주어야 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가 되고, 우리가 가진 그리스도의 치유와 소망의 최대치를 그들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전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프레드릭 비크너, <어둠 속의 비밀>, 홍종락 옮김, 포이에마, 2016년 2월 15일, p.484)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리스도의 분신이 되어 다가가는 것입니다. 치유와 소망의 최대치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간인지라 늘 그렇게 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일을 성실하게 수행할 때 우리 삶 또한 온전해집니다.
- 주인의 사랑
예기치 않은 날 주인이 돌아올 것입니다. "주인이 와서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다"(37). 깨어 있다는 것은 자기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는 말일 겁니다. 누가 깨어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으뜸가는 특색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귀히 여기고 다른 이들을 존중하며 자연을 아낍니다. 그들은 언제나 다른 이들을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들 안에 있는 깊은 갈망을 알아차리고 그 필요에 응답하려 애씁니다. 만나는 사람들 속에 잠들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불러냅니다. 바로 그것이 깨어 있음입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깨어 있는 종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늘 깊은 잠에 빠져 지내다가 우연히 주인이 돌아온 시간에 깨어 있으면 복이 있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눈을 뜨고 있어도 잠들어 있는 사람이 있고, 잠들어 있어도 깨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일과 자기를 분리하면 일은 고역이 됩니다. 하지만 주인의 일을 자신의 일로 아는 성실함이야말로 깨어 있음입니다.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난민들의 인권을 위해 애쓰는 이들도 있고, 꿈을 잃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헌신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평화가 무너진 곳에서 화해의 사역을 감당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노숙인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기 위해 늘 그들 곁으로 다가서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땀흘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 덕분에 세상은 조금씩 좋은 곳으로 변합니다. 그들은 어떤 보상을 바라서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낯설기까지 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돌아온 주인이 허리를 동이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들 것이라는 것입니다. 종이 성실하다고 하여 주인이 이렇게까지 할까요? 상식적으로는 맞지 않는 말 같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는 사라집니다. 섬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복입니다. 위와 아래를 가르는 일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낯선 광경이지만 믿음 안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장면입니다.
주인이 언제 오든 조바심 치지 말고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성심껏 감당하면 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됩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고통받는 이들은 우리 믿음이 진실한지를 묻는 물음표로 서 있습니다. 강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일이 습관이 되면 우리는 예수의 마음과 접속하기 어렵습니다. 뿌리가 드러난 나무들을 보면 보드라운 흙을 덮어주어야 하는 것처럼 시린 영혼들을 어루만지고 그들이 다시금 생명의 싹을 틔울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고통 앞에서 돌아서는 이와 고통 받는 이들 곁에 다가서는 이들 말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물론 고통 받는 이들 곁에 다가서는 이들입니다. 자꾸만 속으로 움츠러드는 마음을 추슬러 세우면서 십자가를 든든히 붙잡고 나아가십시오. 예수를 경배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말고 그분의 마음과 깊은 일치를 이루기 위해 오늘도 깨어나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