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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름

2016년 3월 13일 높은뜻 푸른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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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지유석 기자)
▲김동호 목사

성경본문

마 16 : 24.

설교문

저는 저희 아버지가 47살에 낳은 독자였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 환갑잔치를 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연세가 많으신 것이 늘 불안하였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난 어떻게 사나?'를 늘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으로 다짐하였던 것이 '나는 결혼을 일찍해야지'였습니다. 저는 27살에 결혼하여 32살에 셋째 막내를 낳았습니다.

저는 공부하는데 그렇게 탁월함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열등했던 것은 아닌데 소수의 탁월한 사람들만이 살아남는 경쟁사회 속에서 저의 앞날은 거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습니다. 무엇을 해야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열심히 그리고 잘 불렀던 찬송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라는 찬송이었습니다.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찬송의 가사가 나의 심정과 똑같다라는 생각을 하였고 그래서 그 찬송을 엄청 불러댔습니다.

저는 55살에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가 된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55살 지금보다 얼굴 피부 팽팽할 때 할아버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어색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심정적으로 부인하려고 하는 마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저는 심정적으로 할아버지 소리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냥 연령적으로 잘 어울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타공인 실력(?)으로 할아버지입니다. 이젠 할아버지라는 말이 어울립니다.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습니다. 어렸을 적 삶의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불안했던 것을 생각하면 제 삶은 기적입니다. 저는 한 번도 꿈꾸지 못했던, 욕심내지 못했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제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고백한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삶에 전혀 자신할만한 그 어떤 것도 없어서, 그래서 불안하고 너무 삶이 불투명해서, 앞이 캄캄하고 하나도 보이질 않아서 살려고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붙잡은 것 그게 이유였습니다. '나는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라고 찬송했던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다윗이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도 저와 똑같습니다. 여호와로 자신의 목자를 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그 엄청난 시편 23편의 고백은 단 한 문장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기막힌 고백의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문장과 고백입니다.

주를 따르면 삽니다.

주를 따르지 않으면 죽습니다.

주를 따르면 무능한 자도 삽니다. 그냥 사는게 아니라 잘 삽니다. 삶의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를 따르지 않으면 아무리 유능한 자도 죽습니다. 실패합니다. 망합니다.

우리의 생명과 성공과 구원과 행복은 단 하나의 조건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주를 따름'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로마서 1장 17절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단순해 보이는 조건이 단순하질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냥 따름이 쉽질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따라가려면 십자가를 져야만 한답니다. 주를 따름 자체가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주를 따라 살아 구원을 얻고 승리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며 지내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 기간에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오락을 금하고 자신이 즐겨하는 것들을 절제하며 지냅니다. 아무런 의식없이 그냥 막사는 것 보다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오락을 얼마동안 금하고, 먹고 싶은 좋은 음식들을 잠간동안 삼가는 것이 꼭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해서 그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음을 아닙니다. 그런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십자가는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십자가 가면 같은 것이 아닐까요? 가면 십자가를 쓰고 마치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스스로도 속는 것이 아닐까요?

주를 따라가기 위하여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주를 따라가기 위하여 우리가 져야 할 구체적인 십자가가 무엇일까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몇 가지가 떠 올랐습니다.

제가 생각한 첫 번째 십자가는 '믿음'이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뒤틀어진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진리이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대로 산다는게 십자가를 지는 것 만큼 힘들고 아팠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한 석달 병원에 입원해 계셨던 적이 있습니다. 다리를 다치셔서 깁스를 하고 계셨는데 뼈는 잘 붙어 문제가 없었는데 오랬동안 깁스를 하고 있어서 굳어진 관절을 푸는 재활운동이 참 힘들었습니다. 재활운동은 거의 고문 수준이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굳어지고 뒤틀어진 마음과 생각과 철학을 다시 뒤틀어 말씀대로 살게 한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라는 찬송가 가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꼭 죽을 것 같아보입니다. 망할 것 같아 보입니다. 실패할 것 같아 보입니다. 제가 제일 믿고 따르기 힘들었던 말씀 중에 하나는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이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순서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9장 62절의 '뒤돌아 보지 않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과 누가복음 9장 62절을 함께 연결하면 '어떤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뒤돌아보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함'이 됩니다.

보이지 않은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영 200억 원이라는 헌금을 해 놓은 상태에서 예배처로 사용하던 숭의여자 대학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우리 교회는 그 마태복음 6장 33절과 누가복음 9장 62절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길바닥에서 예배드릴 각오를 하고.... 그리고 실제로 우리 높은 뜻 푸른 교회는 길바닥에서 예배드리는 것과 같은 고생을 했었습니다.

고생이었지만, 힘들었었지만 결론은 승리였습니다. 엄청난 승리였습니다. 우리가 그 엄청난 승리의 증인들입니다. 믿기 힘들고, 순종하기 힘들었지만 그 믿음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랐던 결론이 오늘 우리의 삶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 부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와 '자기 부인'이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예수님은 같은 문장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기부인에 두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의 것을 부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냥 자기자신을 통째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기가 자신의 삶에 주인 되는 것을 부인합니다. 세상과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것들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돈과 자리의 주인됨 을 포기하고 부인하는 일이 참 힘듭니다.

돈을 포기하기 위해 십일조 훈련부터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레위기에서 말씀하셨던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네 귀퉁이를 떼라는 말씀을 실천하려고 평생 노력하였습니다. 궁극적으로 희년의 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나누어 주신 토지를 제외한 모든 잉여 재산을 다시 가난한 사람과 세상에 돌려보내는 일을 실천해 보고 싶었습니다.

계산이 정확했는지는 자신 없으나 재작년과 작년에 걸쳐 희년 흉내를 내 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는 날까지 부족한 것들을 더 보충하며 재물과 재산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삶으로 고백하는 삶에 도전하려 합니다.

자리를 포기하기 위하여 부족하지만 노력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셨던 자리들이 제법 컸습니다. 특히 마지막 목회지인 높은 뜻 교회에서의 자리가 제게는 컸습니다. 자리는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일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일이 끝나면 깔고 앉으려하지 말고 후임에서 축복하여 넘겨주고 자신은 모세처럼 느보산으로 올라가 아무런 권리 주장과 영향력 행사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올해 말 은퇴 할 때 아무런 권리주장하지 않고 귀한 일에 쓰임 받았음만 감사하며 교회를 떠나려 합니다. 누가복음 17장 9절의 말씀 "명한대로 행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할 일을 한것 뿐이라 할찌니라"는 말씀에 순종해보려 합니다. 쉽지 않지만 죽을 각오를 하고 순종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야만 제가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내가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것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는 것을 요즘 새삼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자기'입니다.

최근 제가 말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 전 사람들과 만나서 했던 이야기들을 생각해보면 찝찝합니다. 마치 인공조미료를 듬뿍 넣은 음식처럼 뒷맛이 깨끗질 못함을 느낍니다. 그게 뭘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걸 찾아내었습니다.

'자랑'이었습니다. '자기 자랑'이었습니다.

성경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니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척하고 결국에는 그 하나님의 영광과 자랑을 나 자신의 것으로 가로 채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 따라가는 삶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는 삶이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워도 자기의 것과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가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해되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 말씀을 무조건 붙들고 이해가 되든 이해가 되지 않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무엘처럼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고백하며 남은 여행 예수 잘 믿다 하나님 앞에 가는 삶 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높은 뜻 푸른 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 믿는 거 쉽지 않습니다.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예수 쉽게 쉽게 적당히 믿으려하지 말고 믿음과 예수 따름에 생명을 걸고 한 번 믿어 보십시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삶의 승리, 구원, 생명의 풍성함과 아름다움을 누리며 다윗처럼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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