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사 5:1-7
설교문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노래를 해 주겠네. 그가 가꾸는 포도원을 노래하겠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기름진 언덕에서 포도원을 가꾸고 있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 내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한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거기에 포도주 짜는 곳도 파놓고,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열린 것이라고는 들포도뿐이었다네. 예루살렘 주민아, 유다 사람들아, 이제 너희는 나와 나의 포도원 사이에서 한 번 판단하여 보아라. 내가 나의 포도원을 가꾸면서 빠뜨린 것이 무엇이냐?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있느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느냐?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울타리를 걷어치워서, 그 밭을 못쓰게 만들고, 담을 허물어서 아무나 그 밭을 짓밟게 하겠다. 내가 그 밭을 황무지로 만들겠다. 가지치기도 못하게 하고 북주기도 못하게 하여,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만 자라나게 하겠다. 내가 또한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겠다." 이스라엘은 만군의 주님의 포도원이고, 유다 백성은 주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 뿐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
- 관계의 시작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완연한 봄 기운이 느껴지는 나날입니다. 새싹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매우 큽니다. 매화나무에 피어난 흰 꽃이 등잔처럼 환하고, 산수유나무 노란꽃망울이 해를 머금은 것 같습니다. 효창공원에는 벌써 두꺼비가 엉금엉금 기어다니고 있더군요. 어제가 절기상으로 경칩이었으니 그럴 때도 되었습니다. 한가롭게 웬 계절 이야기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계절의 변화야말로 변함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다양한 은총을 전달하는 통로가 아닐까요? 이제 농부들이 바쁜 때가 되었습니다. 잘 아는 농부 목사님에게 이제 농번기가 되어 분주하겠다고 묻자 설레는 눈빛으로 이미 농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더군요. 지인들의 작은 텃밭이나 터앝을 볼 때마다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땅에 씨를 심고 그것이 새싹으로 돋아나 하루가 다르게 생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부자가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설명하면서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 그 자체가 아닙니다......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고전15:36-37, 42)라고 말했던 바울 사도도 대단한 관찰자였음이 분명합니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이런 언어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을 포도밭에 빗대 말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시편 시인은 "주님께서는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를 뽑아 오셔서, 뭇 나라를 몰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습니다. 땅을 가꾸시고 그 나무의 뿌리를 내리게 하시더니, 그 나무가 온 땅을 채웠습니다"라고(시80:8-9) 노래합니다. 그 나무가 그렇게 무성하게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것을 심고 가꾸신 분 덕분입니다. 포도밭은 또한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아가서에 등장하는 여인은 "사랑하는 그이는 나에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 꽃송이"(아1:14)라고 노래합니다. 지중해성 기후 아래에서 잘 자라는 포도는 옛날부터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식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사야는 아주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기름진 언덕에 있는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 낸 후 그곳에 심으신 아주 좋은 포도나무라고 말합니다. 그 포도원을 얼마나 아끼셨던지 그곳에 초막이 아니라 굳건한 망대를 세우고, 수확철을 내다보며 포도주 짜는 곳도 이미 만들어 두셨습니다. 하지만 기대는 금방 실망으로 변했습니다.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지만 열린 것이라고는 들포도뿐이었습니다. 이사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누구나 출애굽 사건을 떠올렸을 겁니다. 애굽의 전제정치 하에서 시달리던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시고, 역사 속에 개입하시어 천대받던 이들을 자유의 새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 말입니다. 생명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 몫의 삶을 한껏 누리며 사는 세상, 억압과 착취와 경쟁이 아니라 사랑과 나눔과 협동이 삶의 원리가 되는 세상의 꿈이 바로 포도원 이야기 속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절망적입니다.
- 현실의 어둠
호세아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나라가 강대해질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이런 역설적인 상황을 이렇게 적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매가 무성한 포도덩굴, 열매가 많이 맺힐수록 제단도 많이 만들고, 토지의 수확이 많아질수록 돌기둥도 많이 깎아 세운다"(호10:1). 제단과 돌기둥은 모두 우상숭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풍요로워지자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 앞에 엎드리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이게 인간의 버릇입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하나님께 바짝 엎드리지만 위기가 지나가고 나름대로 살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타락이 시작됩니다. 풍요로움이라는 것이 어쩌면 영혼의 가장 큰 유혹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느냐?"(5:4b)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마음이 좀 울컥해졌습니다. 지금 개신교의 현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날이 갈수록 한국교회는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해가고 있습니다. 선한 뜻을 품고 애쓰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한국을 대표한다는 목회자들이 보이는 이해할 수 없는 행태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성장주의야말로 한국교회에게는 독이 든 성배라는 생각을 금할 길 없습니다. 성장을 목표로 삼는 순간 복음의 본질은 왜곡되거나 숨겨지게 마련입니다. 성장이 결과일 수는 있지만 목표여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배우느라 많은 목회자들이 분주합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이 있듯이 교회가 커지면 좋은 목사 대접 받습니다. 교인수와 예산액의 증가가 한 목회자의 목회 성공을 가늠하는 요소가 된 순간 교회는 확고하게 본질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 개신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힘있는 이들 편에 서는 일에 익숙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기에 약자들의 편에 서거나 그들에게 눈길을 돌리자고 말하는 순간 불온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거나 내쫓기기도 합니다. 저는 이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애굽에서 신음하던 이들을 찾아오신 하나님, 떨기나무 불꽃 사이에서 당신을 드러내신 하나님,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을 자처하시던 분은 오늘 한국교회에서 실종된 것입니까? 서럽고 원통합니다. 한국교회의 타락이 가속화된 것은 1980년 신 군부가 들어섰을 때 그들을 하나님이 내신 종이라며 추켜세웠던 조찬기도회 멤버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한국 개신교회의 흑역사입니다. 이런 상황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서 힘있는 이들의 타락을 준엄하게 꾸짖어야 할 이들이 그들에게 빌붙어 권력의 단맛을 나누려 합니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애쓰던 이들은 늘 박해받는 자리에 서게 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현실을 통탄하셨습니다. 주님은 종교 지도자연 하는 이들의 위선을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민다. 그러면서 '우리가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피 흘리게 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마23:29-30)
지금 그들 곁에 있는 예언자들은 죽이거나 몰아내면서 지나간 세대의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꾸지람이 현재성을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십자가 정신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 출판사의 편집인이 제게 책 몇 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담장을 넘는 크리스천>이었는데 아직 그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내용은 모르겠지만 그 책의 원제는 흥미로웠습니다. 그 본래의 제목은 'Gaining by Losing', 즉 '잃어버림으로 얻는다'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살리기 위해 자기 뜻을 포기한 이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다른 이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자기를 바친 이에게 주어진 대가입니다. 교회 성장이 목표가 되는 순간 십자가를 지는 일은 사라집니다. 십자가를 그저 찬미하거나 싸구려로 판매할 따름입니다. 다 나가서 고난을 받거나 죽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지향만큼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담장을 넘는(도종환의 '담쟁이') 담쟁이처럼 조금씩이라도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 피흘림과 울부짖음이 넘치는 세상
포도원 주인은 예루살렘 주민들과 유다 사람들을 불러 따져 묻습니다. "내가 나의 포도원을 가꾸면서 빠뜨린 것이 무엇이냐?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있느냐?" 이런 질문 앞에서 그들은 유구무언일 따름입니다. 마침내 주인의 엄중한 선고가 내려집니다.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울타리를 걷어치워서, 그 밭을 못쓰게 만들고, 담을 허물어서 아무나 그 밭을 짓밟게 하겠다. 내가 그 밭을 황무지로 만들겠다. 가지치기도 못하게 하고 북주기도 못하게 하여,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만 자라나게 하겠다. 내가 또한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겠다."(5:5-6)
택함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무참하게 무너뜨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를 철회하시는 순간 포도밭은 결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나 들어가 그 밭을 짓밟을 것이고, 그러면 그 아름답던 포도원은 금세 황무지로 변할 것입니다. 묵정밭으로 변한 그 땅에서는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만 자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인생에 빗대 보아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영혼들이 어떻게 타락해가는지 우리는 참 많이 보았습니다. 꽤 괜찮은 사람 같았는데, 어느 순간 낯선 사람으로 변해 버린 이들이 참 많습니다. 불안과 근원적 외로움이 그의 마음을 거북의 등처럼 갈라놓기 때문일 겁니다.
그럼 이제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맺었던 들포도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신명기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세가 그 백성들에게 들려주는 마지막 교훈 가운데 한 대목입니다.
"그들의 포도는 소돔의 포도나무에서 온 것이며, 고모라의 밭에서 온 것이다. 그들의 포도에는 독이 있어서, 송이마다 쓰디쓰다.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으로 담근 독한 술이요, 독사의 독이 그득한 술이다."(신32:32)
그들은 물론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의 포도가 소돔의 포도나무에서 오고, 고모라의 밭에서 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성경에서 소돔과 고모라는 이웃들에 대한 환대의 의무를 저버렸다가 멸망한 도시들입니다. 낯모르는 이들을 환대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두 도시는 낯모르는 이들을 함부로 대했습니다. 이웃과 낯선 이들을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타자를 수단으로 삼는 것, 바로 그것이 독이 든 포도주입니다. 본문에 의지해서 이 문제를 조금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 뿐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5:7)
이 짧은 구절은 매우 강력합니다. 번역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지만 이사야는 일종의 말놀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인상깊게 전하고 있습니다. '선한 일'이라 번역된 단어는 미슈팟(mishpat)입니다. 법관이 법에 따라 편벽됨 없이 판단하는 사법적 정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미슈팟 대신 돌아온 것은 미슈파흐(mishpah) 곧 '살육, 피흘림'이었습니다. 정의가 사라지진 자리를 폭력이 채운 겁니다. '옳은 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쩨다카(tzedakah)입니다. 이것은 사회적 불평등을 바로잡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 단어를 회복적 정의라고 번역합니다. 안식년법이나 희년법은 바로 회복적 정의를 위한 장치입니다. 그런데 쩨다카 대신 들어선 것은 쩨아카'(tze'akah) 곧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쩨다카가 아니라 쩨아카가 가득 찬 세상이 바로 지옥에 가까운 곳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다 이런 세상이 되었을까요?
- 오하나
인간의 탐심이 하나님을 몰아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정의와 공의가 사라진 자기 시대의 참상을 고통스럽게 직시하고 있습니다. 한 대목만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5:8)
간단합니다. 다른 이를 돌아보지 않는 탐욕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는 말입니다.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은 간 데 없고, 넉넉한 이들끼리 즐기는 일에만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자기들을 향해 크게 벌린 스올의 입을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조롱하는 이들로 인해 세상은 점점 황무지로 변합니다.
이제는 정말 돌이켜야 할 때입니다. 욕망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진 우리 삶의 키를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돌려야 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이들 가운데 어려운 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이번에 다녀온 LA 연합감리교회 이창민 목사님의 글을 읽다가 아주 귀한 단어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하나'(O'hana)는 하와이 말로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피로 맺어진 관계에 한정하여 사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약속으로 맺어진 관계 또한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오하나'의 가족정신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누구도 뒤쳐지지 않는다"(No one gets left behind)입니다. 못났다 욕하거나 따돌리지 않고, 사랑으로 품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약자들의 속도에 맞춰야 합니다. 삶을 성공의 사다리 오르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이 말을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삶을 원을 이루어 추는 춤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이 가리켜 보인 삶이 바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밭에 심기운 좋은 포도나무에서 들포도가 열리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누구보다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삶이 욕망의 강에 떠밀려 가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한걸음씩이라도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 우리는 그 길 위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그런 자리로 이끄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