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5일(화)은 세월호 참사 발생 700일을 맞는 날이었다. 어느 덧 2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현실은 참담하다는 말만으로는 너무 부족하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꾸려진 특별조사위원회는 사실상 마비 상태다. 무엇보다 여당 쪽 추천위원 5명이 모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세월호 참사를 불편해 하는 정서 때문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렇다 치자. 교회는 어떤가? 세월호 참사를 마주대한 교회의 모습은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교회는 세월호 참사가 못내 불편한가보다. 언론을 통해 잘 나가던 강사나 찬양 사역자가 세월호 리본을 달았다는 이유로, 아니면 광화문 광장에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피켓 시위를 벌였다는 이유로 집회나 강연이 취소되고 강연 동영상이 삭제되는 수난을 당했다는 소식이 잇달아 불거져 나왔다.
여기까지는 표면적인 이야기다. 보다 근본적으로 한국교회는 세월호 참사라는, 아니 세월호 참사에 집약된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제대로 바라볼 역량 자체가 없어 보인다. 얼마 전 백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는 "세월호 유가족을 우상시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의 말은 이랬다.
"슬픔을 당할 때 그 슬픔에 동참하는 것,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단체든 우상이 되는 것을 금해야 한다. 세월호 유족들이 슬픔을 당했기 때문에 그분들의 모든 것이 ‘언터처블(untouchable, 건드릴 수 없는)', 아무도 터치할 수 없는 우상이 된다고 한다면 그건 아니다."
이 목사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범접할 수 없는 성역 쯤에 있는 것으로 보이나 보다. 혹시 있을지 모를 오해를 줄이고자 이 목사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로 했다.
"모든 분들이 다 슬픔을 이야기하고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은 달리 말씀드릴 필요가 없고,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일을) 조명을 하고자 할 때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충분히 해야 하지만,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어떤 한 개인이나 한 집단을 언터처블한 우상으로 만들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거기에서 깨어 있는다면 우리의 동참,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진선미를 전해 주는 좋은 통로가 되리라 생각한다."
이 목사의 말을 좀 더 들어 보니 감이 잡힌다. 이 목사는 우리 사회가 세월호 유가족을 ‘언터처블'한 우상으로 만드는 것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높다.
해석의 오류에서 허우적 거리는 이재철 목사
단도직입적으로, 이 목사는 해석의 오류에 빠져 있다. ‘언터처블'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 목사의 시각대로 ‘범접할 수 없는'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불가촉의'란 의미다. 현실로 눈을 돌려 보자. 우리 사회가 세월호 유가족들을 범접할 수 없는 성역으로 대했던가? 그래서 이들에 대한 그 어떤 비판도 금기시했던가?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 사회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불가촉천민으로 취급했고, 온갖 막말로 매도하기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이런 움직임에 앞장섰다. 일반 교회라고 다르지 않다. 안산 지역 교회들이 세월호 유가족들을 배제하고 나섰으니 다른 교회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목사가 어떤 경로를 통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보를 얻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 현장을 취재한 기자가 아닌 이상, 또 주위에 고급 정보를 주는 유력인사를 두지 않은 이상 언론을 통해 정보를 취득하지 않았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이 목사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언론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 왜곡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특히 ‘주류' 언론들이 정권에 사실상 장악된 상태이고, 그래서 이들이 세월호 참사 같이 정권의 심기를 불편해 하는 사건을 아예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주류 언론이 쏟아내는 왜곡된 정보를 근거로 세월호 유가족들을 보상금이나 더 받아내려는 부류로 매도하고 있는 현실을 알기나 할까?
영국 성공회 사제인 데이브 톰린슨은 그의 책 『불량 크리스천』에서 "깊은 슬픔 앞에 말은 참을 수 없이 가볍다"고 일갈했다. 그렇다. 제발 잘 모르겠으면 그냥 침묵했으면 좋겠다. 자식 잃은 슬픔은 슬픔 가운데도 으뜸이다. 그런 슬픔 당한 사람들 앞에 목회자라는 사람들이 가벼운, 아니 잔혹한 말을 뿜어내니 그 후폭풍을 어찌 감당할 것인지 궁금하다.
한국교회에 당부한다. 정히 세월호 리본이 불편하다면, 교회 건물과 본당 안에 건 십자가를 당장 떼어내기 바란다. 예수는 한국교회가 설교하기 좋아하는 ‘성공'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허름한 마굿간에서 태어나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고, 공생의 삶을 살 동안 권력을 추구하기보다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찾아갔다. 그러다 당대 종교 기득권자인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의 눈 밖에 났다. 이러다 보니 예수는 고향에서 조차 환영받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 없다"고 탄식하셨을까?
십자가는 실패의 정점을 찍는 상징물이다. 당시 지배자였던 로마는 예수를 가장 치욕스런 형벌인 십자가형에 처했다. 십자가 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를 조롱했고, 이에 앞서 제자들은 혼비백산 달아났다. 결국 예수는 쓸쓸히 최후를 맞아야 했다. 운명하는 그 순간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탄식하시면서.
십자가 사건을 되짚어보면 십자가는 결코 자랑스럽게 내세울 상징물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십자가를 기본 상징으로 내세우는 근본 이유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마찬가지다. 세월호 리본 역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고, 더 나아가 세월호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기억하고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다. 세월호 리본을 불편해 하는 교회가 어찌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내걸 수 있을까? 자기모순일까, 아니면 정신분열일까?
지금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면 어디에 계실까? 아마 아직도 자식이 죽은 이유를 알지 못해 슬퍼하고 아파하는 세월호 유가족, 그리고 세월호에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소중한 가족들을 간절히 기다리는 미수습자 가족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과 함께 슬피 우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