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고후4:10-12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죽음은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생명은 여러분에게서 작용합니다.]
설교문
- 속죄판 상징
부활의 첫 열매이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열두 시 경부터 오후 세 시까지 어둠이 온 땅을 뒤덮었다고 전합니다. 그것은 창조 이전의 흑암 혹은 출애굽 직전 애굽에 내렸던 어둠을 연상시킵니다. 그 어둠은 심연처럼 깊고 스산합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던 지난 한 주간 우리는 세상의 어둠을 목도했습니다. 총선을 앞두고 공천 갈등을 빚고 있던 정치권에 눈길을 주고 있던 때, 벨기에의 브뤼셀의 공항과 전철역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매스컴은 희생자들을 숫자로 환원하곤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소개할 수 없기에 그럴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죽어간 그 사람들 그리고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 다 행복을 꿈꾸던 평범한 사람들, 살고 싶은 생명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고 있던 이들의 하늘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동서간의 이데올로기 갈등만 끝나면 세상이 비교적 평화로워질 거라는 지난 날 우리의 기대는 무너진지 이미 오래입니다. 세상은 더 잘게 조각나 있습니다. 조각난 세상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마련입니다. 사소한 일에도 거칠게 화를 내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모욕하고 조롱하고 냉소하는 일에 열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상식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로 인해 세상은 혼돈 속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런 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겁니다. 부활은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거짓과 폭력이 늘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 승리는 진실과 사랑임을 증언합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부활절 이야기 가운데 제가 그 동안 주목하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 무덤문을 막고 있던 돌문은 이미 굴려져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다가 몸을 굽혀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는 흰 옷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고 묻자 마리아는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20:13) 하고 대답합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 대목에 한 가지 상징이 숨겨져 있습니다. 천사들은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과 발치에 있었다고 합니다. 신학자인 애덤 해밀턴은 이것을 언약궤를 덮고 있던 '속죄판'(mercy of God)의 상징이라고 말합니다. '속죄판 혹은 속죄소'는 그 백성을 만나러 오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속죄판의 좌우편에는 하나님을 보좌하는 그룹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애덤 해밀턴은 시신의 머리맡과 발치에 있던 두 천사가 바로 그룹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영화로 이야기하자면 이 미장센(mise-en-scene, 무대에 오른 등장 인물의 배치나 동작, 무대 장치, 조명 따위에 관한 총체적인 설계 혹은 배치)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백성들의 죄를 사하는 속죄주인 동시에 백성들을 만나 그들에게 길을 제시해주시는 임마누엘이라는 것입니다(Adam Hamilton, <24 Hours That Changed the World>, Abindon, 2009, p.128 참조). 예수님의 십자가가 죽음조차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면, 부활은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 우리 마음을 밝히는 빛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의 은총 속으로 초대받은 이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믿는 이들은 먼저 부끄러운 행실을 버려야 합니다. 간교하지도 말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거칠거칠한 십자가의 복음을 매끄럽게 사포질해서 생명을 잃게 해서는 안 됩니다. 믿는 이들은 십자가가 곧 생명의 길임을 삶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비틀거리고 가끔은 변형된 형태의 욕망에 이끌려 넘어지곤 합니다.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은 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인 경우가 많습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약1:15). 문제는 욕심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할 말한 내적 힘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노자는 '스스로 족한 줄 알면 욕된 일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고 말했습니다. 욕망에는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믿음이란 그 욕망의 실체를 보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욕망에 휘둘리며 사는 까닭은 우리 속에 하늘의 빛이 희미해졌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고후4:4)
우리 시대를 일러 '지위 편집증' 시대라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지그문트 바우만). 사람들은 인터넷 서핑과 텔레비전을 통해 본 것을 자신도 누리고 싶어합니다. 광고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제시하면서 과시적 소비를 부추깁니다. 그것을 소유하는 순간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까스로 획득한 것을 즐길 사이도 없이 새로운 상품이 나와 우리를 좌절시키곤 합니다. 그 악순환 속에서 빠져서 허덕이는 동안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허물어지고, 복음의 빛은 흐려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의 빛을 갈망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의 은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고후4:6)
이것이 바로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리스도의 빛,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과 만난 사람은 세상의 유혹에 덧없이 빠져들지 않습니다. 그 빛과 만나기 전에는 아직 우리는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 죽음을 짊어지다
부활의 빛을 경험한 이들은 더 이상 세상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어떤 풍파가 닥쳐와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물론 가끔 실망할 때는 있겠지요. 또 마음이 무거워질 때도 있겠구요. 하지만 우리가 부활의 빛 앞으로 우리 몸과 마음을 자꾸 가져갈 때 우리 힘이 아니라 하늘의 힘이 우리를 붙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4:8-10).
부활의 주님을 믿는 이들은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때 비로소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길을 뚜벅뚜벅 걷는다는 뜻일 겁니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도 유사한 진실을 보여줍니다.
"비겁은 안전한지를 묻는다. 편의주의는 정치적인가를 묻는다. 허영은 인기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양심은 옳은가를 묻는다. 안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이 옳다고 말하기 때문에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휘황찬란하지만 그 이면을 보면 사람들을 죽음으로 유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삶의 문법에 충실하게 살려다 보면 누구나 다 허덕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 자기를 과잉 착취하며 살아갑니다. 남보다 나은 성과를 거두기 위해 불철주야 일합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승리감을 맛보고 다수의 사람들은 패배의 쓰라림을 느끼곤 합니다. 삶은 점점 분주해지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날마다 증대되고, 우울증이 점점 심해지고, 죽음의 유혹이 커지고 있습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희곡소설인 <성 앙투안느의 유혹>에서 의인화된 '죽음'은 성인을 이렇게 유혹합니다.
"안 돼! 안 돼! 삶은 나쁜 거야. 세상은 추해. 창조 한가운데 혼자 버려진 걸 못 느끼니? 그 누구도 네 걱정을 하지 않아. 너도 알지? 날고 있는 까마귀도, 자라는 식물도, 작은 별도 그래. 네 마음이 우울한데 하늘은 푸르게 변하고, 안개가 네 슬픔을 더 짙게 하고, 네가 큰 소리로 울고 있을 때 네 목소리에 화답하는 건 개구리의 개굴개굴 소리지. 매일 아침 깨어나야 하고, 먹고, 마시고, 가고, 오고, 한결같이 일련의 행위를 반복해야만 하잖아? 삶은 이런 것으로 이루어져 있고, 바로 이런 것일 뿐 다른 게 아냐. 이런 보잘것없는 느낌들이 하나하나 덧붙여지는 거고, 존재의 여로는 이런 비참함으로 끊임없이 짜여지는 천일 뿐이지."(귀스타브 플로베르, <성 앙투안느의 유혹>, 김용은 옮김, 열린책들, 2010년 4월 25일, p.334)
저도 하마터면 이 말에 설득당할 뻔 했습니다. 인생이란 '죽음'의 말대로 정말 비참함으로 짜여지는 천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죽음과 맞서고, 스스로 죽음 속으로 들어간 이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십자가는 죽기 위한 죽음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죽임을 보여줍니다. 다른 이들을 복되게 하기 위해 자기 욕망을 제한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생명은 여러분에게서 작용합니다"(고후4:12). 이 말씀은 참으로 강력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이들은 이제 고통과 시련의 땅, 눈물의 땅, 죽음의 땅에서 서성이고 있는 이들 곁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여전히 신원되지 못한 세월호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 파견 근로에 나섰다가 죽음을 맞이한 유성기업 근로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세상 도처에서 울부짖고 있는 아벨들 곁에 다가서야 합니다. 선뜻 그들 곁으로 다가설 수 없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라도 해야 합니다. 삶이 힘겨워 신음 소리를 내는 이들에게 돌팔매질을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짊어지고 다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산 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전히 우리는 죽음에 속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산 자의 땅으로 인도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